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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03화 (103/307)
  • 제103화

    103화

    잊고 있던 경쟁자의 등장은 부산에 휴가를 온 기분을 내던 토트윈을 마구 쪼아 댔다.

    부산에 와서 느긋해진 기상 시간은 다시 오전 6시로 당겨졌고, 잠드는 시간도 1시간 뒤로 밀려났다.

    그렇게 영화 더빙과 3집 앨범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토트윈의 살인적인 일정이 시작되었다.

    “끄으…….”

    윤치우는 좀비 떼처럼 차에서 내리는 멤버들을 보며 에르제에게 작게 속삭였다.

    “3집 앨범도 문젠데, 그보다 더빙이 더 심각하네.”

    “흠.”

    안단테와 태현우는 그래도 괜찮은 편에 속했다.

    본인들 캐릭터와 잘 어울리는 강아지와 너구리를 맡았으니까.

    거기다 평상시 자상한 리더의 이미지가 강했던 윤치우는 조금 엇나간 양아치 고양이를 맡았는데…….

    ― 발톱으로 그어 버리기 전에 당장 그거 내려놓으시지. 내가 연습 끝나고 먹으려고 숨겨 둔 거거든?

    평상시 리더로서의 스트레스가 많았던 건지 웃으면서 저 대사를 치더라.

    얌전한 이미지라서 성깔 더러운 고양이가 안 어울릴 줄 알았는데, 묵직한 목소리로 때려 박으니 제법 신선한 감이 있었다.

    ‘안단테랑 태현우의 부족한 연기력도 문제이기는 한데……. 민주혁이 제일 걱정돼.’

    더빙의 특성상, 대사의 양이나 개인의 역량에 따라 녹음하는 양이 매일 달라진다.

    이런 일에 익숙한 성우들은 한 큐에 끝내기도 해서 일주일 만에 절반 이상을 마친 인간도 있을 정도.

    ‘지서후도 진도 많이 뺀 것 같던데.’

    그만큼 일을 잘하면 빨리 끝나는, 워라밸이 높은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최악이 된다.

    더빙이 오래 걸리면 오래 걸릴수록, 해야 하는 녹음의 양이 많아질수록 본인의 부담감이 커진다.

    당연히 앨범 준비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그게 개인의 스트레스로 돌아온다는 게 문제였다.

    에르제가 스트레스를 받아 고통스러워하는 민주혁의 얼굴을 떠올리며 물었다.

    “민주혁이 그걸 견딜 수 있을까?”

    “……남들한테 엄격한 만큼 본인한테도 엄청 엄격한 애라서, 글쎄.”

    윤치우가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고, 에르제도 속으로 동감했다.

    다른 멤버들은 하나씩 끝내 가는데, 본인만 뒤처지고 있다는 사실에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건 아닌지.

    ‘……아니, 실제로 새벽에 대사 연습하는 게 들리기도 했어.’

    워낙 녀석이 그런 티를 내지 않아서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벌써 더빙이 시작된 지 일주일하고도 반이 지난 지금, 민주혁은 가장 뒤처져 있었다.

    ‘알바 몬스터 제과 제빵 알바 편’ 촬영을 위해서 자리를 비웠던 에르제도 민주혁보다 훨씬 많이 진도를 뺀 상태였다.

    “주혁이가 처음부터 더빙하기 싫어했던 이유를 알겠다.”

    윤치우는 녹음실로 들어가면서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연기 문제보단 본인이 캐릭터에 몰입을 잘 하지 못 하는 것 같아.”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윤치우에게 물었다.

    “좀 도와주는 게 좋을까?”

    “어떻게? 응원이라도 하게?”

    “아니. 그냥…… 내 능력으로?”

    “…….”

    윤치우가 그 말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너한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런 거 하지 마.”

    “?”

    당연히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라고 할 줄 알았는데, 윤치우의 대답은 예상외였다.

    그의 눈은 에르제에게서 벗어나 나머지 3명의 멤버들을 차례대로 보고 있었다.

    “애들이 알아서 하게 둬야 해. 우리 2집 앨범 때 기억나?”

    윤치우가 다시 에르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글거리는 가사를 써야 했고, 또 그것을 무대에서 보여 줘야 했던 앨범이 2집 앨범이었다.

    “그때 주혁이는 가사 쓰는 것조차 힘들어했어. 네가 나서지 않았으면, 아마 2집 앨범 제작이 훨씬 오래 걸렸을 수도 있었지.”

    에르제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에서도 본인 파트 부르는 걸 어색해하기도 했고.”

    “맞아. 지금이야 반복으로 익숙해졌지만……. 솔직히 나는 그때 불만이었거든.”

    “불만?”

    “네가 시상식에서 그런 플래카드 들게 만들었던 거. 어떻게 보면 강제로 익숙해지도록 만든 거잖아.”

    “그때는…….”

    “알아. 너도 나름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는 거.”

    윤치우는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그런데, 우린 인간이야.”

    그러고는 녹음실 안으로 결연한 표정을 지은 채 들어가는 민주혁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이 있어. 주혁이도 스스로 이겨 내도록 해야 해. 토트윈이……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인간만의 방식이 있다. 그 말에 에르제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윤치우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기에 이렇게 말을 하는 걸까, 아니면 서은우의 영혼에 대한 대답을 자신이 미루고 있어서 그냥 심통을 부리는 걸까.

    ‘……심통은 아니야.’

    도와주지 않아서 피해를 보는 건 자신이 아니라 민주혁이니까.

    에르제도 민주혁이 들어간 녹음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현재 민주혁이 녹음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었다.

    하나는 애니메이션 및 동물 캐릭터이다 보니 오글거리거나 익숙하지 않은 대사들이 많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온전히 장면에 빠져들지 못하는 민주혁 본인의 문제였다.

    전형적인 ‘몰입’의 문제.

    민주혁은 현실에서 벗어나서 다른 세계에 빠져드는 일을 잘하지 못했다.

    에르제는 안병인에게서 읽어 낸 기억을 떠올렸다.

    ‘……어릴 때의 충격 때문인가.’

    당시의 일 때문에 지금과 같은 성격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현실적이고, 겉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성격 말이다.

    만약 그 때문에 지금의 녹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거라면, 곁에서 도움을 주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지 않나?

    자신의 일족도 인간들과 비슷한 역경과 고난을 겪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서로 힘을 합치고 도움을 주며 그 고난을 헤쳐 왔다.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혼자서 모두 이겨 낼 수 있는 게 인간 종족이라면, 그들이 마을을 만들고 국가를 세울 이유가 없었다.

    그게 단순한 유대감에 의해서라면 더더욱.

    이해를 하지 못하는 얼굴로 에르제가 생각에 빠져 있자, 윤치우가 이를 확인하고 그의 팔을 툭 쳤다.

    “……?”

    “먹이를 구해 오고, 먹이는 것까지 하는 것도…… 계속하면 버릇이 돼. 그냥 믿고 지켜보자. 혼자 이겨 내는 게 아니면, 의미가 없어.”

    “……그래.”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에르제는 군말 없이 따르기로 결정했다.

    생각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려는 이유가 컸다.

    결과가 궁금했다.

    로드였을 때의 자신은 일족들의 모든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혼자서 고군분투했었다.

    그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기 위해 노력했고, 그게 로드라는 자리가 가진 무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인간 세상에 나갈 때 장로들조차도 내게 의존했으니까.’

    그러나 토트윈이라는 작은 그룹에서 리더를 맡은 윤치우는 자신과 다른 선택을 했다.

    언제까지 어미 새처럼 돌볼 생각이냐고, 혼자서 이겨 내야 성장하는 거라고.

    인간 리더의 생각은 자신과 분명 달랐다.

    문득, 에르제의 머릿속에 세리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말고, 저희에게도 나눠 주세요.

    에르제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직까지도 일족을 지키기 위해서 손에 꽉 움켜쥐고 있는 것들이 보였다.

    지구에 와서도 엮여 버린 뱀파리스, 일족들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지구의 뱀파이어들, 누구 편인지 확실하지 않은 마녀 등등…….

    지금 불안한 것들이 하나도 통제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가끔씩 아이돌을 그만두고 발품을 팔아서 일족들을 찾으러 다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눠 달라고 했지만, 결국 나눠 주지는 못했지.’

    자신이 세리나와 플랑에게 내린 명령이라고는 그냥 감시하라는 것 정도였다.

    어쩌면…… 일족들이 스스로 성장할 기회를 자신이 막아 버렸던 것은 아닐까.

    너무 많은 것들을 자기 혼자서 짊어지고 해결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에르제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머리를 쥐어뜯는 민주혁을 바라보았다.

    ‘……그건 민주혁이 보여 줄 결과에 따라 달라지겠지.’

    민주혁이 바뀐다면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잘해 왔다는 방증이 되리라.

    뱀파이어라고, 혹은 인간이라고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

    ‘……오히려 인간이 해낸다면 더 의미가 있을지도.’

    인간의 타고난 성정과 지난 삶에서 쌓은 것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믿는 에르제였다.

    ‘지구에는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말도 있던데.’

    그러니까 아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민주혁이 스스로 껍데기를 깨고 나온다면 반성해야겠지.

    ……모든 것을 떠먹여 주면 안 된다고.

    ‘결과가 나오면, 진짜로 지서후랑 술 한잔해야겠네.’

    지구로 넘어왔다면 녀석도 최소 로드의 자리에 위치한 늑대인간일 테니, 그때 가서 녀석의 생각을 들어 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녀석도 윤치우처럼, 자신과 다른 생각과 방법으로 일족들을 이끌어왔을지도 모른다.

    에르제는 눈을 감고 차례를 기다리는 지서후를 흘긋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 * *

    그리고.

    결과를 보기까지 생각보다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간의 기준에서 2주면 긴 시간일지도 모르겠지만, 에르제에게는 찰나에 불과했다.

    ‘……벌써?’

    에르제는 녹음실에서 차분하게 더빙과 연기를 해내는 민주혁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계속되는 뒤처짐에 마음이 조급했던 건지, 아니면 다른 계기가 있었던 건지는.

    에르제에게는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민주혁이 스스로 변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어떻게?’

    솔직히, 저번 시상식 때처럼 충격 요법이 아니면 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오글거리는 것은 2집 앨범으로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겨서 그렇다고 쳐도, 극현실주의적 성격이 바뀔 거라고는…….

    ‘예상 못 했어.’

    만약 민주혁이 바뀌는 것보다 더빙 감독의 인내심이 먼저 바닥나 버렸다면, 안병인이라는 충격 요법까지 사용할 생각이었던 에르제였다.

    물론 거기까지 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으나, 이번엔 반대로 에르제가 충격을 먹었다.

    충격 요법은 민주혁이 아니라 자신이 당한 듯했다.

    ‘정말, 내가 잘못하고 있었던 건가.’

    너무 온실 속 화초처럼 일족들을 다뤄서 그토록 쉽게 무너져 버린 걸까.

    다치더라도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깨우치게 했다면, 미친 황제에게 일족 전체가 대항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모르겠어.’

    결국 신이 다른 종족들도 지구로 보낸 건…… 그들 또한 미친 황제를 막아 내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나.

    과연 결과가 달랐을까, 라고 생각하면 답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해.’

    결과야 어찌 됐든, 지금은 윤치우가 리더로서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는 것.

    스스로 바뀐 것은 누군가가 강제로 바꿔 준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었으니까.

    ‘지속력도 다르지.’

    에르제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거북이’ 역할을 맡은 민주혁의 열연을 지켜보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으로 연기하는 민주혁의 모습을.

    ― 뀨엥, 뀨엥.

    ― 느으리이지이마아안…… 나아도오…… 노오래르을 하알 수우 있으을까아요오?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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