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102화
지서후는 몰래 빠져나가지 않고 매니저를 찾아가 이야기했다.
“나 옥상 좀 다녀올게.”
“어? 알았어. 너무 늦지는 말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서후의 매니저는 에르제를 한 번 흘긋 보고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별일 아냐.”
지서후는 매니저의 어깨를 한 번 툭 쳐 주고는 에르제에게 따라오라고 말했다.
그렇게 몇 층 걸어서 이동하자, 옥상으로 향하는 문이 보였다.
다행히 옥상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기분 좋은 바람이 한 차례 옥상 위를 쓸고 지나갔다.
덕분에 잠깐 기분이 상쾌해졌으나, 에르제는 곧 인상을 썼다.
“윽.”
늑대인간 특유의 불쾌한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기 때문이었다.
“걱정 마. 금방 지워 줄 테니까.”
지서후는 코를 막고 있는 에르제를 보며 피식 웃었다.
품에 손을 넣은 그가 담배를 꺼내 들고 입에 물었다.
칙, 칙.
불붙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담배 끝에서 흘러나왔다.
담배 길이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끝에 매달린 담뱃재는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와 비슷해 보였다.
툭 건들면 금세 끊어질 듯이.
“후우.”
지서후는 가볍게 손가락 끝으로 재를 털어 내며 반대편 손으로 넥타이를 풀었다.
“갑갑했는데, 시원하네.”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난간에 팔을 올리고 물었다.
“할 말이 뭔데? 치고받고 싸우자고 부른 건 아닐 것 같고.”
“…….”
에르제는 처음에 서 있던 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입술을 떼었다.
“내가 뱀파이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맞아?”
“……알았으면 여기 안 왔지.”
“그럼 알게 된 지금, 계약 파기할 생각은 없고?”
“명색이 아이돌이면서 계약 파기라는 말을 꽤나 쉽게 입에 담네? 돈은 네가 주려고?”
지서후가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씩 웃었다.
“싫다면 어떻게 할 건데?”
인간들에게 보여 주던 지서후의 태도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뱀파이어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지서후의 표정에서 날것 그대로 드러났다.
‘계약 파기는 말도 못 꺼내겠네.’
에르제는 더욱 공격적으로 나오는 지서후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가 카테이아 대륙도 아니고, 늑대인간과 전쟁이라도 벌였다가는 부산이 온통 쑥대밭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 생각했던 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저쪽도 같은 생각이면 좋겠는데.’
에르제는 옷깃을 여몄다.
“나도 계약 파기는 못 해. 너처럼 혼자 온 게 아니라 멤버들하고 다 같이 온 거니까.”
“그래서?”
“그러니까 배우 대 아이돌. 딱 그 정도의 관계로 지내는 건 어떨까 싶어서.”
“흐음.”
지서후가 다 타 버린 담배를 발로 짓이기며 마지막 남은 연기를 뱉어 냈다.
“그렇다고 문제가 아예 없는 건 아닐 텐데.”
지서후가 에르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질문에 에르제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서로 맡은 배역이 문제였다.
동물의 문제는 에르제에게만 있었다. 뱀파이어가 늑대 역할을 하게 된 것 말이다.
지서후는 거대한 코끼리 역할이었고, 늑대인간과는 딱히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코끼리라는 동물이 카테이아 대륙에는 없었고.’
하지만 문제는 배역, 그러니까 둘 사이의 관계였다.
늑대는 가수 지망생이었고, 코끼리는 음악계에서 배척 받은 작곡가 겸 프로듀서였다.
프로듀서와 아이돌.
현실이었다면 부딪힐 일이 뭐 있겠냐 싶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애니메이션이었다.
때문에 긴장감을 주기 위한 프로듀서와 가수 간의 심각한 갈등이 존재했고, 하필 갈등의 원인이 늑대에 있다는 것이다.
― 단순하게 초식 동물이라고 업신여기다니. 아이돌이 꿈이라면, 인성부터 바로잡아라!
― 이 바닥은 실력이 전부다. 같잖은 네 힘이나 들먹일 생각이라면 당장 꺼져.
둘은 다양한 이유로 사사건건 부딪칠 예정이었다.
그래서 지서후가 돌려서 물은 것이다. 사적인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연기로만 풀어낼 수 있겠느냐고.
‘말로만 그렇다고 한다면 믿어 주지 않을 테고.’
그래서 에르제는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보여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터벅, 터벅―.
에르제는 대본에 쓰여 있는 대로 늑대가 그룹에서 쫓겨난 뒤의 한 장면을 연기했다.
완전 기억 능력에 의해 늑대의 호흡, 표정, 주변 분위기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온몸에 힘을 빼고 바닥만 본 채 에르제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분명 하늘은 쨍쨍했는데, 에르제만 본다면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처량함이 느껴졌다.
입을 꾹 닫은 채 걷던 에르제의 머리가 누군가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 뭐 해?”
에르제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지서후가 물었지만, 에르제는 꿋꿋하게 대사를 쳤다.
“어.”
프로듀서 코끼리가 자신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뭡니까. 여기서 절 기다리고 있던 겁니까?”
“……네가 불렀잖아.”
“저는, 노래를 부르고 싶을 뿐이라고요……!!”
“아니, 불렀다는 게 노래가 아니라…….”
지서후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으나, 에르제는 이미 감정에 몰입해 있었다.
에르제의 눈에 물기가 고였다.
“그런데! 자세한 상황 설명도 듣지 않고 멋대로 오해해서 나를 내치는 게 올바른 겁니까?!”
난간으로 밀려난 지서후가 쩔쩔맸다.
“자, 잠깐만.”
“실력이 전부라면서요!! 분명 당신이 그렇게 말했잖아!!”
“윽……!!”
에르제가 자신의 어깨를 잡고 흔들자, 지서후가 어지럽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그러다가 결국 못 참겠는지 에르제를 확 밀쳐냈다.
“뭐야, 도대체!!”
바닥에 넘어진 에르제가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을 닦아 내고 일어나서 바지를 털었다.
“네가 가능하냐고 물었잖아.”
“……뭘!!”
“사적인 감정 빼고 연기할 수 있겠냐고.”
에르제가 자신의 손을 내보였다.
불쾌한 감각을 무시하고 지서후의 몸을 잡은 채 연기를 했던 자신의 손을.
“…….”
지서후가 입을 꾹 다물어 버리자, 에르제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조금 실망이네. 바로 알아차릴 줄 알았는데. 설마, 배우 지서후는 아직 대본도 다 못 외운 거야?”
“하.”
지서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완전 기억 능력 덕분이잖아. 늑대인간한테는 그런 능력 없어.”
“그거 다 핑계야.”
에르제는 지서후의 속을 한 번 더 긁어 놓고는 자신의 옆을 빠르게 스치는 그림자를 덥석 붙잡았다.
앞으로 튀어나가려던 그림자는 소매를 붙잡혀 허공에서 발을 굴렀다.
그리고 곧 자신을 붙잡은 존재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로드, 늑대인간이다.”
“알아.”
에르제가 소매를 잡아서 뒤로 끌자, 플랑이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로드 넘어뜨렸다. 감히, 그것도 바닥에.”
“그것도 알아.”
에르제는 그렇게 말하며 지서후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충분한 대답이 됐어?”
“…….”
지서후는 품에서 담배를 찾다가 한 개비만 들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네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한번 떠본 거지.”
지서후는 플랑을 슬쩍 보곤 에르제에게로 걸어왔다.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쪽이거든. 그리고 굳이 지구까지 넘어와서 또다시 뱀파이어랑 싸우고 싶은 생각도 없고.”
“넘어왔다고……?”
“그런 게 있어.”
지서후는 에르제를 지나치며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자신도 뱀파이어의 몸에 손을 대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듯 일부러 취한 제스처였다.
“아무튼 잘해 보자고. 나도 우리 일족들을 위해서 돈을 열심히 벌어야 하거든. 아! 부하 관리는 좀…… 잘해 줬으면 좋겠네.”
평화를 사랑한다고 말한 것치곤 도발적인 언사였지만, 에르제는 다른 게 신경이 쓰여서 생각이 많아진 상태였다.
‘……넘어왔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이지?’
설마, 카테이아 대륙에서 넘어왔다는 뜻일까?
혹시나 싶은 생각에 에르제가 고개를 들었지만, 지서후는 이미 옥상을 내려간 뒤였다.
‘분명 지구로 넘어왔다고 했어.’
그리고 자신이 알아듣지 못할 거라는 듯이 말하기도 했다.
‘배우로 지내고 있었으니까 다른 종족들을 만났을 가능성도…… 충분히 높아.’
게다가 장진규도 배우이지 않던가.
‘……지서후가 늑대인간이라는 기억은 지워진 것 같지만.’
장진규의 기억을 읽었을 때도 그랬고, 이후에 장진규가 늑대인간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자신에게 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거의 확실해지는데.’
지서후.
녀석은 파르만과 마찬가지로 신에게 선택을 받은 것이다. 지구로 보내질 유일한 늑대인간으로.
‘……나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어쩌면, 그래서 더 지서후의 말이 와 닿는 것 같기도 했다.
뱀파이어와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다는 말.
‘나도 마찬가지니까.’
그건 플랑과 자신의 차이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늑대인간이라고 오해했을 때, 그리고 오늘 지서후를 마주쳤을 때, 플랑은 두 번 모두 다짜고짜 공격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서후와 자신은 그러지 않았다.
대화를 먼저 시도했고, 그냥 서로 무시한 채 인간으로서의 본업에 충실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에르제는 피곤해진 눈가를 주물렀다.
‘……나도 지치기는 했지.’
이곳이 다른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자신 또한 그랬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종족들과 깊이 엮이지 않고, 일족들과 그저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랐다.
‘미친 황제’에게 당한 이들이라면.
특히 종족을 이끌던 위치에 있던 이들은, 아마 다들 비슷한 생각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그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일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
그게 플랑과 둘의 차이점이었고, 그런 사고가 신뢰의 한 축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수천 년 동안 이어 온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전쟁에 지서후와 자신이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중에 술 한잔하자고 해 볼까. 친구가 되는 것도 괜찮고.’
에르제는 카테이아 대륙이었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상상을 하면서 픽 웃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럴 기회가 있을 것이다.
‘같이 더빙 연기도 하게 됐으니까.’
담배 연기에 잠깐 지워졌던 늑대인간의 체취가 다시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흐읍.”
에르제는 일부러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오랜 시간 숨을 참았다.
“윽. 먼저 간다, 로드.”
결국 냄새를 참지 못한 플랑은 먼저 아래로 후다닥 뛰어 내려갔다.
그러나 에르제는 조금 더 그곳에 머물렀다.
지서후는 일족을 위해, 자신과 다른 꿈을 꾸고 있을까?
담배를 피우던 녀석의 모습은, 일족에 관한 ‘책임’에서 자신보다 조금 더…… 자유로워 보였으니까.
* * *
제작진과의 만남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 밤.
씻고 잘 준비를 하던 토트윈의 스마트폰이 동시에 울렸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던 태현우가 말했다.
“윤이 형인가?”
단체 톡방이라면, 매니저인 이윤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맞아.”
에르제가 발신자를 확인하고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 너희들 3집 컴백 준비 여유롭게 하면 안 되겠다. ]
그렇게 시작된 서두는 그동안 잊고 있던 존재를 상기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 아육시에서 데뷔한 애들, 우승자 보상으로 전국 투어를 시작한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