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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01화 (101/307)
  • 제101화

    101화

    6월 중순.

    배우 ‘지서후’는 ‘Dreams on stage’의 더빙을 위해 부산을 찾았다.

    지서후는 야성적인 매력의 배우로 주연, 조연을 가리지 않고 다작을 하기로 유명했는데, 이번 애니메이션 더빙도 그 일환이었다.

    ‘재미있을 것 같고.’

    지서후는 제작진과 만나기에 앞서 다시 한번 같이 출연하게 된 이들을 떠올렸다.

    자신과 같은 배우 출신인 이들과 유명 성우들이 있었고, 주인공 역할을 맡은 이들은 ‘토트윈’이라는 아이돌이었다.

    지서후는 아이돌이 연기를 하는 것에 딱히 편견은 없는 편이었으나, 그렇다고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흠……. 저쪽 소속사에서는 연기 경력을 쌓아 보라고 이번 일을 시킨 것 같으니까.’

    마침 애니메이션 주제도 동물들이 아이돌로 성공하는 것이었으니 얼추 그림이 그려지기는 한다만…….

    같이 출연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괜히 비교가 되어 ‘다 된 밥에 아이돌 뿌렸다’고 사람들이 욕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문이 돌면 영화 매출은 확 떨어질 거고.’

    어쨌든 자신의 필모 중 하나에 들어갈 작품이다.

    흥행하지 못하면 그의 자존심에 금이 한 줄 그어질 거란 뜻이었다.

    ‘……필요하면 따로 연기 지도라도 해 주지, 뭐.’

    소속사에서 미리 연기 지도를 해서 보내기는 하겠지만, 실전에서 디테일을 잡아 주는 것은 또 다를 테니.

    지서후는 평소에도 후배들을 잘 챙기기로 소문나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며 제작진을 만나기 위해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오늘은 제작진뿐만 아니라, 같이 출연하게 되는 배우, 성우 그리고 문제의 아이돌까지 다 만나서 인사하는 날이었다.

    지서후는 문고리를 붙잡고 잠깐 고민했다.

    ‘토트윈 노래나 좀 들어 보고 올 걸 그랬나?’

    제작진 측에서 그런 질문을 하고 그러진 않겠지?

    시원시원하고 본능에 충실한 다른 늑대인간들과는 달리, 지서후는 상당히 생각이 많고 깊은 편이었다.

    그래서 일족 사이에서는 소심하고 남자답지 못하다는 평도 들었으나, 오히려 그 덕분에 인간들 사이에 섞여 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우두머리 자리에서 내려온 것도 그것 때문이고.’

    다만, 그 덕분에 인간들과 지내는 건 익숙해졌지만 자신과 배우로서 비슷한 위치에 있는 ‘장진규’는 종족 문제로 꽤 껄끄럽긴 했다.

    ‘그건 뭐…… 본능이라. 뱀파이어는 어쩔 수 없지.’

    그쪽도, 자신도 서로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의 일은 잊고 서로 편하게 지내면 좋을 텐데 말이다.

    지서후는 한숨을 살짝 내쉬고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혹시나 안에서 이야기를 먼저 나누고 있다면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허리를 살짝 숙이며 안으로 들어가자, 역시나 담소를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다.

    길게 찢어진 눈으로 내부를 둘러본 지서후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이름표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들어왔음에도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눈치챘는지, PD도 자신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담스러운데.’

    많은 시선에 멋쩍게 코를 긁적이고 있자, PD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지서후 씨! 오랜만이에요!”

    “안녕하세요. 감독님.”

    “그러게 말입니다. 한 2년 만인가?”

    “그 정도 됐을 거예요.”

    박권 PD는 예전 지서후가 주연으로 출연했던 드라마의 감독이었고, 그때의 인연으로 이번 더빙 제안을 지서후에게 한 것이었다.

    지서후는 별말 없이 흔쾌히 승낙했고, 박권이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 그렇지, 그렇지.”

    박권은 옛 추억에 빠질 뻔한 자신을 깨닫고는, 빠르게 다른 이들을 지서후에게 소개시켰다.

    제작진이 먼저였다. 작가, 카메라 감독 등과 인사를 나누고 난 뒤, 다른 출연진들과도 인사할 수 있었다.

    ‘벌써부터 진 빠지네.’

    박권과 드라마를 할 때도 그랬는데, 텐션이 높아서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참 벅차다.

    “여기는 이수진 성우님. 알죠? 웬만한 한국 더빙판에 거의 참여하시는 유명한 분이니까.”

    “당연히 알죠. 개인적으로 팬입니다.”

    “감사해요. 저도 지서후 씨 팬인데, 이런 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아하하.”

    가벼운 대화가 오가고, 마지막은 이번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맡은 토트윈 차례였다.

    ‘다섯…….’

    그들의 면면을 슬쩍 확인한 지서후는 자신도 모르게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꼬았다.

    멤버 중 2명이 은발이었는데, 반대로 자신은 흑발을 하고 있어서였다.

    작품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머리색을 한 상태였는데, 늑대인간의 상징인 은발을 보니 괜히 찔려서 그랬다.

    “큼, 큼.”

    지서후는 헛기침을 한 차례 하고는, 토트윈의 리더와 먼저 악수를 나누었다.

    “반갑습니다. 지서후라고 합니다.”

    “영광이에요. 저희 멤버들도 지서후 님 작품을 TV로 자주 봅니다.”

    “아, 그래요?”

    빈말이겠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말이라서 지서후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칭찬은 드래곤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괜히 어깨 높이가 3cm 정도 높아진 지서후가 다른 멤버들과 차례대로 악수를 나누었다.

    ‘윤치우, 민주혁, 태현우, 안단테.’

    멤버들의 이름을 하나씩 기억했다. 나중에 그들을 부를 때 이름을 잘못 부르는 실수를 하면 곤란할 테니.

    ‘그리고 이쪽이 서은우인가.’

    비주얼 멤버라고 하더니 확실히 그럴 만한 외모였다.

    은발에다 날카로운 콧날, 선이 확실한 눈매.

    자신이 저 얼굴이었으면 주연만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지서후에게서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왜 인상을 쓰고 있지?’

    서은우와 자신은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볼 이유가 없단 뜻이다.

    ‘교묘하게…….’

    주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불쾌함을 어째서 자신에게 드러내고 있는 건지.

    의아하긴 했으나, 일단 할 건 해야 했다.

    지서후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지서후입니다.”

    “……서은우예요.”

    그리고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잡았을 때, 지서후는 그제야 깨달았다.

    어째서 서은우가 자신을 불쾌하게 여기고 있는지.

    상대는 이미 냄새로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을 잡자마자 불쾌감이 자신의 손바닥을 타고 뒷목까지 찌르르 전해졌다.

    “뱀……!!”

    저도 모르게 그의 정체를 밝힐 뻔한 지서후가 맞잡은 손을 빼려 하는 순간, 서은우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읏.”

    지서후의 팔 근육이 살짝 부풀었으나, 손은 빠지지 않았다.

    불쾌감이 어린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먼저 입을 연 건 서은우였다.

    “흑발이네요?”

    “…….”

    지서후가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응수했다.

    “그쪽은 은발이네요.”

    “아하하.”

    서은우가 기계적으로 웃으며 손을 놓아 주었다.

    ‘무슨 힘이…….’

    지서후는 겨우 풀려난 손으로 주먹을 몇 번 쥐어 보며, 저린 상태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장진규랑은 비교도 안 되는 강한 힘인데? 누구지?’

    그리고 상기했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온 더빙 촬영은 그리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것 같다고.

    * * *

    이후의 시간은 가볍게 자신의 대사를 연기해 보며, 출연자들끼리 친목을 다졌다.

    ‘……하아.’

    에르제는 멤버들이 다른 이들에게서 조언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불길한 예감은 항상 틀리지를 않네.’

    무엇보다 이 세계에 온 뒤로 운 좋게 풀리는 경우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좋지 않은 것뿐이면 그나마 다행이지.’

    그냥 이 정도면 운이 지지리도 없는 거다.

    하필 늑대인간을 진짜 보게 될 줄이야.

    ‘부산이라고 해서 어째 좀 불안했는데.’

    그러나 부산 길거리에서 우연찮게 늑대인간을 마주친 것도 아니고, 그냥 배우로 활동하던 늑대인간을 마주쳤다는 사실이 짜증 났다.

    ‘……아냐.’

    그렇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다.

    뱀파이어인 장진규를 만났듯이, 언젠가는 지서후란 늑대인간도 마주쳤을 게 뻔했다.

    ‘그냥 그게 오늘인 것뿐인 거지.’

    에르제는 프로답게 마인드셋을 하며, 지서후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하길 바랐다.

    ‘아냐……. 차라리 따로 이야기를 하는 게 낫겠어.’

    자신은 2500년이나 살아온 어른스러운 뱀파이어지만, 저쪽은 지구에서 새로 태어난 늑대인간일 확률이 높았다.

    미성숙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따로 이야기를 해서 서로 건드리지 말자고 해야겠지.’

    하여간, 귀찮은 일들은 쉬지도 않고 자신을 찾아오는 것만 같았다.

    에르제는 흔한 직장인의 비애를 느끼며,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지서후를 흘긋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 다른 늑대인간들과 성정이 좀 달라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에도 조심스럽게 들어왔고, 이후에도 꿋꿋이 예의를 지키는 모습도 그랬다.

    ‘인간 세계에 잘 적응한 걸지도 모르지만.’

    하프나 쿼터 뱀파이어처럼, 저쪽도 늑대인간의 피가 옅어져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차라리 그쪽이 이야기하기는 편할 텐데.’

    에르제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윤치우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혹시, 이거 끝나고 지서후 씨랑 잠깐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 있어?”

    “음…….”

    이수진 성우에게서 연기 조언을 듣던 윤치우가 스마트폰으로 스케줄을 확인했다.

    이윽고 윤치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스케줄은 이따 저녁 먹고 우리끼리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대본 맞춰 보는 거 말곤 없으니까 잠깐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윤이 형한테는 내가 말해 놓을게.”

    스마트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던 윤치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개인적으로 팬이라서.”

    “……? 네가 팬인 사람이 있어?”

    “응.”

    윤치우의 의심은 더욱 증폭됐다. 하지만, 에르제의 표정을 보고는 ‘뱀파이어의 일’이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주위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알았어. 대신 어디 따로 나가지는 말고, 건물 안에서 해결해. 부산까지 왔으니까 네가 사고 치면 수습할 사람도 없어.”

    “응.”

    리더의 허락도 받았겠다, 에르제는 지서후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서후는 안단테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에르제를 발견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안단테.”

    “엇. 언제 왔어여?”

    이제야 그를 발견한 안단테가 앉은 채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이야기 끝났어?”

    “아! 반려동물 이야기 중이었어여.”

    안단테가 히히 웃으며 대답했다.

    “형도 낄래여?”

    “아니. 둘이서 따로 할 얘기가 있는데, 자리 좀 비켜 줄 수 있나 해서.”

    “아?”

    안단테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가 지서후와 에르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이여?”

    “응. 장진규 배우한테 지서후 배우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거든.”

    “아……!!”

    그 말에 안단테가 자리에서 일어나 비켜 주었다. 그러고는 작게 귀에다 속삭였다.

    “저분은 개를 좋아하신대여. 참고해여……!!”

    혹시나 대화에 도움이 될까 알려 준 것 같긴 한데, 늑대인간인데 개과 동물을 선호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한 말이니 에르제는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을 해 주었다.

    “그래? 참고할게.”

    “네!”

    안단테는 그렇게 말하고는 휙 자리를 떴다. 다른 인간들과 이야기를 나누려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슬쩍 바라본 에르제는 지서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잠깐 자리를 옮길까? 조용한 곳으로 갔으면 하는데.”

    늑대인간에게 딱히 존대할 이유도 없었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지. 따라와.”

    지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살짝 턱짓을 하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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