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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00화 (100/307)
  • 제100화

    100화

    에르제는 현실로 빠져나오자마자 윤소희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김지원과 정신적 부담을 잘 나누어 가졌는지,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물론 윤소희의 생각은 다른 듯했지만.

    “이게 멀쩡해 보여?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손에 경련도 일어나는데? 웬만한 독감보다 더 힘들었거든?”

    “마녀잖아요.”

    “마녀면 인간이랑 신체 구조가 다르다니?”

    온갖 방법으로 불만을 표한 윤소희는 옆에 놓여 있던 수건을 집어 식은땀을 닦아 냈다.

    “그래서 알고 싶은 건 다 알아냈어?”

    “어느 정도는요.”

    “짜증 나네. 내 기억인데, 나는 기억을 못 하고.”

    “……또 날아갔어요?”

    윤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기억을 읽을 때 나도 분명 같이 그 장면을 봤는데…… 지금 떠올리려고 하면 머릿속이 새까매.”

    “……녀석이 일 처리를 잘했네요.”

    라하임이 만든 의식용 문서에 담겨 있는 힘이었는데, 되새김질한 기억까지 다시 날리는 모양이다.

    물론, 그 기억을 읽은 자신의 것까지는 날리지 못하는 듯했지만.

    ‘항상 마무리가 어설프다니까.’

    에르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더욱 처참한 몰골로 변한 김지원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이건 제가 회수해 갈게요.”

    “죽일 거야?”

    “아뇨. 좀 회복되었다 싶을 때, 기억을 한번 뒤져 보려고요.”

    에르제는 윤소희에게 제이에 관한 사실을 말해 줄까 하다가 말았다.

    제이가 뱀파리스라는 게 기정사실로 밝혀진 것도 아니었고, 윤소희에게 그리 필요한 정보는 아닌 듯해서였다.

    “그래. 아! 필요 없어지면 나한테 넘겨도 괜찮아. 오랜만에 실험 대상으로 써먹게.”

    “지극히 마녀다운 발언이네요.”

    “뭐.”

    윤소희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거짓말해서, 미안.”

    “사과도 할 줄 알았어요?”

    “그러게.”

    윤소희가 피식 웃고는 손가락으로 에르제를 가리켰다.

    “의식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하나는 알고 있어. 네 안에 있는 진짜 서은우가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는 거.”

    “…….”

    “오늘 기억을 보여 준 것도 네 안에 있는 녀석이 자극 좀 받으라고 한 거니까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윤소희가 가 보라는 듯이 손짓했다.

    에르제는 윤소희가 그냥 오해하게 두었다.

    어차피 의식에 관련한 내용이라 말해 줘도 기억이 또 날아갈 게 분명했다.

    ‘……일부러 저 기억은 안 날아가게 둔 건가.’

    오해하게 해서 저렇게 기다리게 만들려는 듯했다.

    진짜 영혼이 원래의 몸을 되찾고 뱀파이어의 능력만 가질 수 있는 것처럼 꾸며서.

    지금은 그저 서은우의 영혼이 자신에게 졌기 때문에 몸속에 숨어 있는 것뿐이라고.

    ‘……그 조건이 반대로 이 몸을 지키는 체스 말이 되는 건가.’

    에르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윤소희가 뱀파리스와 손을 잡으면서까지 서은우를 지키 고 싶었던 건, 에르제가 아니라 서은우의 영혼이었다.

    ‘지금 협력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겠지.’

    서은우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면서 알려 주지 않은 것도, 자신이 서은우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 서은우의 영혼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까.’

    윤소희는? 서은우의 부모는?

    그러고보니 서은우의 부모는 의식이 끝났는데도, 왜 아직까지 찾아오지 않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나한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에르제는 잡생각을 날려 버렸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돌이킬 수도 없다.

    에르제에게는 무엇보다 일족들이 제일 중요했…으나, 딱 하나가 무겁게 마음에 걸렸다.

    ‘……윤치우한테는 뭐라고 해야 하지.’

    솔직하게, 다시는 서은우를 보지 못할 거라고 말을 해야 하나.

    답을 찾지 못한 에르제는 볼을 긁적이다, 김지원을 데리고 가기 위해 플랑의 이름을 불렀다.

    * * *

    김지원은 정신과 육체 모두 상당한 타격을 입었기에 바로 그의 기억을 읽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세리나의 집에 그를 맡겨 두었고 플랑에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그쪽에 상주하도록 명령했다.

    어차피 장 대표가 플랑의 경호를 하나하나 감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서 며칠 정도는 상관없을 듯해서였다.

    ‘당분간은 아이돌 활동에 집중해야지.’

    아직 2집 활동이 마무리 된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윤이 일거리 하나를 추가로 들고 왔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좀 특이한 거 하나 들어왔어.”

    이윤은 멤버들이 모인 것을 확인한 뒤, 새로운 일에 대해 설명했다.

    “너희들, 더빙 알지?”

    “알아여.”

    “저희, 더빙 제안 들어왔어요?”

    의문스러워하는 민주혁의 말에 이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미국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인데, 이번에 한국에도 상영될 예정이라고 하더라.”

    이윤은 말을 이으며, 애니메이션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동물들이 인간처럼 나오는 애니메이션이야. ‘라X온 킹’ 알지? 아무튼, 미국 각지에 따로 살던 각종 동물들이 어쩌다 모이게 되고 아이돌이 되는 내용이라고 하더라고.”

    “아아, 그래서 한국 아이돌들 중에 더빙할 팀을 찾은 거네요?”

    “응. 여기도 마침 동물이 다섯 마리이기도 하고, 영화 관계자 중 하나가 우리를 추천했다나 봐.”

    “……우리를 추천했다고요?”

    태현우가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응. 이유는 모르겠는데, 우리랑 하고 싶다고 먼저 제안이 들어왔어.”

    이윤은 이후로 이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조목조록 들어 멤버들을 설득했다.

    이야기를 듣는 멤버들의 태도가 어딘가 미적지근해서였다.

    “좀 생소해서 내키지 않을 수도 있는데, 생각보다 좋은 기회야. 요즘 아이돌들 배우로도 겸업해서 많이 활동하는 거 알지? 그리고 연기력 안 좋으면, 욕바가지로 먹고?”

    “알죠. LAK 멤버 둘도 배우 일 같이 하잖아요. 그중에서 이채선은 연기 못한다고 욕 엄청 먹었고.”

    “응. 근데 그럼에도 꿋꿋하게 하잖아. 어쨌든 미디어에 그만큼 노출이 많이 되는 거라서 연기력이야 뒤로 좀 미뤄 두는 거지.”

    “최소한 병풍으로 써먹을 수 있으니까요?”

    “어감이 좀 그렇긴 한데, 뭐 맞아.”

    민주혁의 시니컬한 말투에 이윤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더빙은 너희들의 표정이나 행동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래도 부담은 좀 덜할 거야. 대신, 감정이나 톤 연기가 훨씬 중요하겠지만……. 우리는 너희들이 연기하고 싶다면 충분히 시켜 줄 의향이 있으니, 이번 더빙은 적극 찬성이야.”

    “경험도 쌓고, 적성도 테스트해 보고…… 뭐 그런 의도겠네요.”

    에르제가 방점을 찍자, 이윤이 “바로 그거지!” 하고 곧바로 동의를 했다.

    ‘영화 관계자가 추천을 했다고?’

    에르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진실은 전혀 달랐으나, 그쪽에서 그렇게 포장하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이번 일은 안병인과 청화의 작품이었다.

    며칠 전에 안병인에게서 온 문자가 이를 확실하게 증명했다.

    [ 조만간 더빙 일 하나 들어갈 겁니다. 사업적인 안목으로 보건대, 한국에서도 흥행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에르제 님께서 이 좋은 기회를 꼭 잡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 싫으시다면……. 크흠…… 음……. 주혁만이라도……. 네. 부탁드립니다. ]

    아버지가 아들이 하기를 원한다? 이보다 확실한 보증수표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도 청화를 홀로 일으켜 세운 안병인의 안목이라면.

    “저는 할게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아이돌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사건들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다른 종족을 만나기도 하고, 일족을 만나기도 하고……. 혹은 그에 대한 단서를 얻기도 했다.

    ‘이번에도 가능성이 높아.’

    더빙이라면 성우나 실제 배우들이 와서 같이 녹음하게 될 텐데, 그중에 일족이 없으리라고 그 누가 장담하겠나.

    “저두여! 재미있을 것 같아여!”

    먼저 찬성한 에르제의 뒤를 따라서 안단테가.

    “애들 가는데 제가 빠질 수는 없죠.”

    “앗, 저도! 저도 갑니다!”

    윤치우와 태현우도 차례대로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아직 대답하지 않은 한 인간에게로 쏠렸다.

    “…….”

    민주혁이 책에 책갈피를 꽂으며 소리 나게 덮었다.

    “4명이 하고, 한 명은 솔로 가수……. 이런 거로 안 되나요?”

    귀찮은 건지, 아니면 자신이 없는 건지. 뭐가 되었든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품고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에르제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민주혁 안 하면, 저도 안 할래요.”

    “……!!”

    그 말에 안단테가 패럿처럼 고개를 움츠리고 눈치를 살피더니, 민주혁에게서 슬쩍 떨어지며 입을 열었다.

    “이, 이건 공동체 의식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여. 할 거면 다 같이……!”

    “……하.”

    민주혁이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원망스런 눈빛으로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미안한데, 부탁 받은 게 있어서.’

    에르제가 어림없다는 듯 마주 보자, 결국 민주혁은 백기를 들었다.

    “저 연기 정말정말정말 자신 없는데, 망해도 책임 안 집니다.”

    정말을 3번이나 붙인 것을 보니, 자신이 없는 쪽이었나 보다.

    ‘말을 많이 이어 붙이니까, 엄청 강조가 되네.’

    역시 한국어는 알고 있어도 어렵다. 줄임말도 그렇고, 저렇게 강조하는 방식도 그렇고.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에르제가 방금 것을 마음속에 새겨 두자, 이윤이 그제야 밝게 웃었다.

    “좋아. 일단 자막 버전 있으니까 그거부터 한 번 보자.”

    “넵.”

    그날 저녁, 멤버들은 다같이 ‘Dreams on stage’를 감상했다.

    제작사 측에서 멤버들이 맡아 주었으면 하는 동물 캐릭터를 그들의 세계관과 평상시 행동을 보고 정해 두었기에 멤버들은 자신의 캐릭터에 몰입해서 영화 감상을 했다.

    다행히 멤버들은 모두 자신의 캐릭터에 만족했으나, 에르제는 오만상을 썼다.

    “저, 캐릭터 좀 바꾸면 안 될까요?”

    “왜? 잘 어울리는데.”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요? 저는 청결해요.”

    “뭐래. 이번에 2집 콘셉트랑도 잘 맞잖아?”

    이윤의 말 그대로였다. 2집을 위해 염색했던 은발에 이어서 다시 한번 늑대와 엮여 버린 것이다.

    하지만 에르제는 불안했다.

    ‘이제 와서 하지 않겠다고 할 수도 없고.’

    민주혁을 그렇게 끌어들여놓고선, 다시 자기만 빠지겠다고 하는 것은 로드로서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별일 없겠지.’

    설마 더빙하러 갔는데, 그곳에 다른 배역으로 늑대인간이 있는 그런 소설 같은 황당한 상황이 일어날까?

    운도 없고 업보에 당하는 자신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막무가내인 상황은 전개되지 않을 듯했다.

    ‘장진규가 말해 준 것도 늑대인간들의 움직임을 부산 쪽에 봤다고 했으니까.’

    뱀파이어와 마찬가지로 늑대인간도 조직적인 생활을 하기에 서울에서 그들과 마주칠 확률은 낮았다.

    ‘게다가 서울이면 ‘방랑자’일 확률이 높은데, 녀석들은 뱀파이어니 뭐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괜한 생각이었다고 정리를 하던 차에 이윤이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에 빠졌다.

    “음……. 아, 뭐지.”

    무언가 이야기를 빠뜨린 것이 있는지 생각하느라 끙끙 앓는 듯했다. 그 상태로 대략 10분 정도 흘렀을 때.

    “아!”

    이윤이 손가락을 튕겼다.

    “맞다. 이것도 말해 줬어야 했는데.”

    그의 말에 멤버들이 TV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이윤 쪽으로 향했다.

    “이번에 ‘Dreams on stage’ 시사회 장소랑, 같이 하게 될 성우분이 거주하는 곳도 겹쳐서 너희 더빙은 부산에서 하게 될 거야.”

    “부산??”

    에르제가 놀라서 이윤에게 물었으나, 태현우가 목소리를 키우며 차례를 가로챘다.

    “부산이요? 진짜요??”

    “응. 너희 활동이 거의 서울에만 집중되어 있었잖아. 대표님이 부산 내려가는 김에 소규모 공연도 같이하고 오라고, 대관도 해 주신다고 했어.”

    “진짜여? 대박.”

    “여행 기분으로 다녀오면 좋겠네요.”

    “오, 좋다~!! 선글라스 하나 살까?”

    다른 멤버들의 반대는 기대도 안 했다. 믿을 건 한 녀석밖에 없다.

    “……그건 마음에 드네요.”

    “그렇지?”

    믿었던 민주혁마저 장 대표의 악랄한 계획에 홀딱 넘어갔다. 에르제의 얼굴이 구겨졌다.

    일에다 여행이라는 포장지를 씌웠다고, 그게 휴가가 되냐고.

    에르제는 마른세수를 하며, 마지막 남은 희망을 떠올렸다.

    민주혁이 도움이 안 된다면, 그의 아버지는 어떨까.

    에르제가 빠르게 손가락을 놀려 안병인에게 코코아 톡을 날렸다.

    [ 그쪽 힘으로 혹시 다른 배역 교체가 가능합니까? 아니면 시사회 장소를 바꾼다든가……!! ]

    [ 불가능합니다. 투자자가 아니라서 그 정도의 권한은 없어요. 제가 그쪽이랑 어렵게 자리를 마련해서 넌지시 토트윈을 추천했던 거고요. ]

    ‘……안 돼.’

    에르제는 스마트폰을 꽉 붙잡은 채, 이윤에게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역할 바꾸는 거 안 되는 거에요? 정말정말정말?”

    “응. 안돼. 완전완전완전.”

    칼같이 날아온 대답에 에르제는 거실 소파 위로 허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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