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98화 (98/307)

제98화

98화

치이이이익-.

예상했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깨진 플라스크 조각 사이로, 안에 담겨 있던 초록색 액체가 기화되어 흘러나올 뿐.

“……??”

설마 독인가? 호캉스 중에 찾아왔다고 독살하려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조금 늦게 터지는 종류의 폭탄인가?

온갖 경우의 수를 따지는 에르제에게 이내 윤소희가 정답을 알려 주었다.

“냄새 좋지?”

윤소희는 점점 투명해지는 초록색 기체 쪽에 손을 가져가서 코 쪽으로 공기가 흐르도록 부채질을 했다.

“흐으읍……. 하아.”

그러고는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뱉어 냈다.

“내 희대의 걸작이야. 향기가 예술이거든. 심신이 편안해지고, 숙면을 취하는 데에 아주 효과적이야.”

윤소희가 캐리어를 뒤져서 똑같은 플라스크가 담겨 있는 나무 상자를 꺼내 열었다.

“줄까? 나중에 뱀파이어들 영면에 들 때 도움이 되라고 만들어 본 거거든.”

하지만 태연하게 말하는 윤소희와는 다르게, 에르제는 뻣뻣하게 굳어 있다가 그제야 긴장을 내려놓았다.

“하아.”

에르제는 이마를 짚으며 참았던 숨을 뱉어 냈다. 그러고는 윤소희를 노려보며 화를 냈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뭐긴.”

윤소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저번에 나한테 힘으로 압박한 복수라고 할까? 나도 언제까지 만만한 마녀로 보일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을 인질로 잡을 필요는 없는 거 아니에요??”

“아, 그것도 포함이고.”

윤소희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테스트도 겸했지. 너는 여전히 올바른 뱀파이어일까, 하는 그런 거?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신뢰를 한 번 더 다질 필요가 있었어.”

“……뱀파리스에 포섭됐으면, 인간을 지킬 리가 없으니까?”

“응. 네가 너한테만 그…… 검은색 눈깔을 둘렀으면 바로 대화는 없던 걸로 하려고 했지.”

“좀 열 받네요.”

에르제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을 절레절레 저었다.

“알겠어요.”

윤소희가 행한 방식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의도는 이해했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기로 했다.

윤소희를 찾아온 목적도 있으니, 더 이상 적대감을 드러낼 필요도 없었고.

‘심신이 편안해진다더니, 그거 때문인가.’

그래도 생각보다 금방 진정이 돼서 플라스크 쪽에 눈길이 갔다.

‘나중에 챙겨 달라고 해야겠네.’

음악 방송 같은 건 많이 익숙해졌지만, 이윤의 말에 따르면 큰 무대들이 하반기에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때 멤버들이 긴장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럴 때 써먹으면 유용하겠다 싶어서였다.

에르제가 선 채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윤소희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그래서, 찾아온 이유가 뭔데? 물어볼 거 있다면서. 메시지가 아니라 야심한 밤에 찾아올 정도면 중요한 거 아니야?”

“맞아요.”

침대가 하나밖에 없어서 에르제는 어쩔 수 없이 서서 이야기했다.

플라스크 소동은 이 정도로 넘어가고, 본론을 꺼내야 할 때였다.

“의식에 관해서 물어보려고 왔어요.”

“의식? 저번에 다 말해 주지 않았나?”

윤소희가 고개를 갸웃하자, 에르제는 고개를 저었다.

“의식에 관한 기억이 날아갔다고 했죠?”

“그랬…… 지?”

종이가 부식돼서 사라지고, 의식에 관한 기억이 날아가는 것.

라하임이 쓰던 방식이었으니 아마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윤소희가 당시 ‘가수인 뱀파이어’까지 들먹이면서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리고 더욱이 한편이 된 마당에, 만약 그때 말하지 않았던 것이 있었다면 말해 줬을 것이다.

‘……물론 서은우와 의식을 하게 된 경위는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그거야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다.

“그 기억을 제가 되살릴 수 있다면요?”

“……!! 그게 가능해?”

“네. 물론 조건이 필요하지만요.”

“조건? 어떤 조건? 위험하고 그런 건 아니지?”

“그럴…… 수도 있기는 한데.”

에르제는 입술을 안으로 말며 쯥,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순간, 망설이는 에르제를 보며 눈치를 챈 윤소희가 짜증을 냈다.

“너, 설마 내 기억을 뒤지려고 하는 거야? 그래서 직접 찾아오겠다고 한 거지?”

“……네.”

에르제가 느릿하게 대답하자, 윤소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장난해? 마녀라고 해도 난 인간이야. 내 정신에 문제가 생기면 네가 책임질 거야?”

“그래서 얘기했잖아요. 조건이 필요하다고.”

“……조건이 뭔데?”

일단 들어나 보자, 하는 태도로 윤소희가 다리를 꼬았다.

“제물이요.”

“제물?”

뜬금없는 말에 윤소희가 놀라 입을 벌렸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제물을 바친다고?”

“바친다고 표현을 할 수도 있겠네요. 정확히는 정신에 가해지는 압력을 제물에게 전가하는 거지만요.”

정신 지배는 강제적으로 대상의 정신에 접속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술법이다.

당연히 대상의 의지와는 반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정신 내부에 가해지는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뱀파이어와 같은 정신계 쪽으로 강한 종족들은 버텨 낼 수 있지만, 인간에게는 무리였다.

윤소희의 말대로 마녀도 인간이니, 에르제가 기억을 뒤지면 윤소희의 정신이 버텨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제물을 쓰는 겁니다. 정신 접속에 버틸 수 있는 튼튼한 놈으로.”

“……내 동의는 조건에 없는 거야?”

“네.”

어떻게든 알아내겠다는 의지를 에르제가 드러내자, 윤소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하기 싫다고 해도 강제적으로 하겠다는 거네.”

“원래는 라하임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했는데……. 오늘 갑자기 필요해졌거든요.”

“알고 싶은 게 뭔데?”

“의식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된 건지, 그리고 서은우가 진짜 의식을 하려고 한 이유요.”

“……서은우가 의식을 하려 한 이유는 내가 말해 줬잖아. 죽으려고 하던 서은우를 내가 살려 준 거라고.”

“거짓말일 수도 있으니까요.”

“……맘대로 해라.”

에르제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자, 윤소희는 결국 포기했다.

“내가 힘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으니 방법이 없네.”

그렇게 말한 윤소희는 역으로 조건 하나를 걸었다.

“대신 내 동의는 네 맘대로 무시했으니까 부탁 하나 들어줘.”

“부탁이요?”

“……네가 쉽게 기억을 찾을 수 있게 정확한 시기는 알려 줄게. 대신…… 그 외의 개인적인 기억은 읽지 말아 줘.”

윤소희의 말뜻을 알아들은 에르제가 입을 다물었다.

자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대놓고 기억을 읽으면 대상은 어떤 기억이 읽혔는지 알 수 있다.

대상과 같이 과거의 기억을 뒤지면서 동시에 필름을 재생하듯 기록을 읽어 내는 것이니까.

‘굳이 그것까지 읽어서 적대감을 높일 필요는 없겠지.’

에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어차피 윤소희 개인의 기억은 굳이 읽을 필요가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서은우에 관한 것뿐이니까.

“후우, 이럴 줄 알았으면 어디에 있는지 말해 주지 말걸.”

윤소희는 투덜대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닫고 고개를 에르제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제물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면 오늘 할 게 아닌 건가?”

“오늘 하는 게 아니면 도망치려고요?”

“응.”

당당하게 대답한 윤소희를 보고 에르제가 피식 웃고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새벽 1시를 막 넘긴 참이었다.

“곧 배달될 거예요. 이런 쪽으로 우수한 녀석이 있어서.”

“……배달?”

“뱀파리스 하나 잡아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뭐?”

윤소희가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뱀파리스를? 누가 뱀파리스인지는 어떻게 알고??”

“김지태 죽이기 전에 기억을 뒤져서 알아냈죠.”

그때 알아낸 뱀파리스들이 몇 있었다.

그리고 에르제는 그 정보를 주고 아무나 잡아오라고 시켰고 말이다.

“……일 처리 참 깔끔하게 하는구나.”

윤소희가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윤소희에게 온 메시지는 어디에 있냐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것 하나였는데, 그 물밑에서는 이미 많은 것들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소희는 플라스크로 작은 복수를 한 것 말고는, 결국 오늘 또 손해만 보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뱀파이어랑 마녀가 협력 관계라더니. 너무 일방적인 거 아닌가 싶네.”

윤소희가 불만을 담아 혀를 찰 때,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잡아왔나.’

에르제는 마치 방 주인인 것처럼 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자, 그곳에는 기절한 뱀파리스 하나가 놓여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플랑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인간들 눈에 띄지 말고 오라 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는 모르겠네.’

그 커다란 몸을 어떻게 숨기고 왔나 싶기는 했는데, 그래도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전 세계에서 자신을 경호할 때에도 플랑은 몸을 숨기는 데에는 천부적인 능력을 보였으니 말이다.

아마 지금도 완전히 돌아가지 않고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그게, 제물이야?”

윤소희는 에르제가 문을 닫고 질질 끌고 들어오는 뱀파리스에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네. 싱싱하네요.”

“얼굴이 저렇게 부었는데?”

윤소희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뱀파리스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굴은 벌에 쏘인 듯 퉁퉁 부어 있었고, 잡혀 오기 전에 거세게 반항했는지 왼팔은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하지만 에르제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대답했다.

“그 녀석 성격을 생각하면, 이 정도면 꽤 양호한 편인데요?”

플랑이 마음먹고 팼으면, 아마 이 뱀파리스는 온몸이 종이처럼 구겨진 채 배달되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제물에 쓴다고 해서 손속에 사정을 둔 결과물이 틀림없었다.

“아무튼 제물로 써먹기에는 충분하니까…… 바로 진행할까요?”

“……마음대로 해. 어떻게 하면 돼? 시체처럼 가만히 누워 있으면 되나?”

“일단 선부터 연결하고요.”

“무슨 기계 다루듯이 말하고 있어!”

어지간히도 기억을 읽히는 상황이 싫은지 계속해서 투덜대는 윤소희를 무시하고, 에르제는 뱀파리스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선을 연결하겠다는 건 뱀파리스와 윤소희의 정신 체계를 연결하겠다는 뜻이었다.

윤소희에게 가해지는 충격을 고스란히 뱀파리스에게 전가할 수 있도록 말이다.

“…….”

에르제가 정신을 집중하고 뱀파리스의 머리에서 반투명한 것을 길게 뽑아내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에 윤소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게 정신이야?”

“음, 일단 그렇다고 해 둘게요.”

정확히는 정신이 아니고 영혼 비슷한 건데, 에르제도 완벽하게 알지는 못해서 그냥 얼버무렸다.

에르제가 선을 뽑듯이 검지와 엄지로 길게 잡아당겨 윤소희의 관자놀이에 붙이자, 윤소희가 인상을 팍 썼다.

“왠지 기분 나쁘네. 실험체가 된 것 같아.”

“기분 탓이에요.”

그렇게 말한 에르제가 윤소희의 정신에 접속하기 위해 오른손을 폈다.

하지만 그 순간, 윤소희가 뱀파리스를 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잠깐만.”

“?”

뭔가 싶어서 에르제가 손을 멈추자, 윤소희가 뱀파리스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윤소희와 뱀파리스가 가까워지니 둘 사이에 연결되어 있던 선이 바닥에 닿으며 늘어졌다.

“이거…….”

윤소희가 뱀파리스의 턱을 잡고 좌우로 돌리다가 에르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 김지원 아니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