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97화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에르제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긴 침묵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윤치우와 에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깨워 줄 수 있냐고? ……서은우를?”
“어.”
윤치우의 목젖이 크게 출렁였다.
“……가능해?”
“…….”
에르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저번에 던전에 갇혔을 때, 윤치우는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인간이었다.
그리고 윤치우가 서은우에게 들었듯, 의식을 통해 에르제라는 뱀파이어가 서은우의 몸을 차지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고.
‘……그러고 보니, 그때 서은우의 영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냥 어물쩍 넘어갔었던 기억이 있다.
윤치우도 다른 세계니 뱀파이어니 하는 것들 때문에 놀라서 당시에는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듯했고.
‘중요한 건 나도 모른다는 거지.’
윤치우는 토트윈의 리더이자 같은 멤버였다.
좋은 방향으로 설명을 해 주고 싶은데, 에르제 본인도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게 문제였다.
현재 서은우의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악마와의 의식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 두 가지 말고는 윤치우에게 말할 게 없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도 말하기 힘들어.’
대답하기 난감해진 에르제는 손바닥으로 눈과 이마 주위를 쓸었다.
“일단 확실한 것만 말해 줄게.”
“…….”
윤치우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에르제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겠다는 듯이.
“지금은 불가능해.”
“……지금은? 나중에는 가능하다는 뜻이야?”
“그것도 장담할 수는 없어.”
의식의 대가가 악마에게 서은우의 영혼을 바치는 거라면, 윤치우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은 ‘영원히 불가능하다’였다.
‘그건 아무리 같은 마족인 나라고 해도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이미 의식을 진행한 악마의 배 속으로 들어가 에너지로 변환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것을 다시 영혼으로 되살리는 일은 신이라고 해도 불가능했다.
‘괜히 미안해지네.’
에르제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의식을 통해서 내가 이 세계에 왔다는 건 알고 있지? 네가 나한테 말해 준 내용이니까.”
“……어어. 은우한테 직접 들었던 거라서.”
“그러니까 그리고 나는 그 의식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맞아…….”
“의식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된 건지 주관한 주체가 누구인지도 몰라. 의식에 관해서 나는 너보다 정보가 더 없는 상태야.”
“……그렇겠지.”
윤치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물었다.
“그럼 은우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거야?”
“…….”
에르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어째서.’
처음에는 왠지 모를 미안함이 느껴졌는데, 현재 에르제의 기분은 조금 이상했다.
짜증? 불안?
‘……아냐.’
그것보다 조금 더 원초적인 감정이었다.
서은우를 깨워 줄 수 있냐, 더는 볼 수 없냐는 말에…… 순간적으로 화가 치솟은 것이 분명했다.
‘……어째서지.’
에르제는 순간 끓어오른 기분을 심호흡하며 다시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왜?’
왜, 자신은 화가 났을까.
어느새 옆구리 쪽에 붙여 놓았던 손이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꾸욱-.
한 번 더 힘을 꽉 주고 주먹을 풀자,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에르제는 주먹에 둔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윤치우를 바라보았다.
씁쓸한 얼굴, 공허한 표정, 안타까운 눈빛.
윤치우가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서은우를 향해 있었다.
‘아.’
이제는 영혼도 없고, 몸도 자신에게 뺏겨 버린 녀석이다.
노래도, 춤도, 멤버들과의 관계도, 의지도. 그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한 녀석이었다.
멍청하게 윤소희에게 속아서 의식이나 진행하던…… 녀석이었다.
“나는…… 내가.”
에르제가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까지 내가 한 거잖아.”
무의식적으로 겨우 뱉어 낸 말이었다.
분명 로드였다면 하지 못했을 말이었는데, 인간의 몸에 들어와 있는 탓에 마음이 약해진 걸까.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화가 가라앉지를 않아서 속에 있는 말을 해야만 했다.
서은우가 지금까지 한 것이 대체 뭐가 있냐고.
아이돌로서 지금까지 달려 온 건 서은우가 아니라 에르제였다.
노래도, 춤도, 예능도, 멤버들과의 관계도 모두 자신의 능력으로 이뤄 낸 결과였다.
진짜 서은우였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것들.
‘……하.’
에르제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단순히 화가 났을 뿐인 건지, 아니면 뭣도 없는 서은우에 대한 질투 때문인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인간에게 질투를 하게 될 줄이야.’
그렇게 멍하니 잠깐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에르제는 자신이 얼마나 철없는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윤치우도 서은우의 영혼이 어떻게 된 건지 걱정한 것뿐일 수도 있는데…… 내가 괜한 말을 한 건가.’
윤치우를 보니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또 왜 알아듣고서는.’
하여간 눈치 빠른 놈이 둘이나 있으니까 이럴 때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후우, 아냐. 아무튼.”
에르제는 말을 툭툭 끊으며 말하다가, 윤치우의 손에 찢어진 소원 쿠폰을 다시 쥐여 주었다.
“소원은 다시 생각해 봐. 못 들어주는 거니까 쿠폰은 안 쓴 걸로 칠게.”
“……어.”
윤치우가 소원 쿠폰을 바라보며 조그맣게 대답했고, 에르제는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털썩-.
침대에 눕자, 하늘색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약간 회색이 섞인 하늘색이었다.
“……서은우.”
에르제는 몸 주인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화풀이할 대상이 없으니 답답했다.
앞으로 윤치우의 얼굴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도 애매했고.
‘……팬들은 그런 거 귀신같이 눈치챈다고 하던데.’
자칫하면 불화설 같은 지라시가 돌지도 몰랐다.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하나.
에르제는 멍하니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한 인간의 얼굴을 떠올렸다.
의식과 서은우, 둘 모두와 관련된 유일한 인물을.
‘윤소희…….’
에르제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화풀이를 하려면 거기에다 하는 게 맞지 않겠는가.
이번에도 대답을 회피하려 든다면, 정신 지배니 뭐니 하는 것까지도 죄다 동원할 테다.
에르제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윤소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지금 어디 있어요? ]
* * *
아주, 정말 많이 어색한 윤치우의 생일 파티가 끝나고 난 뒤.
어두컴컴한 밤이 되고, 에르제는 창문을 열었다.
“으웅…….”
5월인데도 바람이 차서 자고 있던 태현우는 저도 모르게 이불을 몸에 둘둘 말았다.
그 모습을 힐끗 본 에르제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날리며 동시에 창문을 닫아 주었다. 인간이라면 하지 못할 멋진 묘기였다.
‘서은우는 이런 거 못해.’
괜히 승리의 미소를 한 번 지어준 뒤.
파드득-!
곧 박쥐로 변한 에르제가 빠르게 밤하늘을 날았다.
‘오래 걸릴 일은 아니니까.’
굳이 이윤이나 멤버들에게 알리고 나올 이유는 없었다.
원래는 윤치우에게 말을 해 두는 게 좋겠으나, 그쪽과는 아직도 어색한 상태였으니.
‘명동 마다가스카 호텔 1302호에 있다고 했지.’
오늘 밤에 찾아가겠다고 하니, 지금 자신은 그곳에 묵고 있다고 했다.
휴가를 내고 호캉스를 즐기고 있는데, 하필 지금 연락하느냐고 짜증을 내기는 했지만 말이다.
‘실장이면서 토트윈 휴가 기간도 아닌데 혼자만 휴가를 낸 벌이지.’
그동안 윤소희가 마녀 쪽 일과 실장 일, 두 가지 모두 처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에르제는 혼자 합리화를 마쳤다.
그렇게 얼마나 날아갔을까. 곧 윤소희가 말해 준 호텔이 보였다.
13층이라고 하길래 거의 꼭대기 층인 줄 알았는데, 중간쯤밖에 되지 않을 높이였다.
에르제는 박쥐로 변한 상태로 조그만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호텔 창문은 열 수 없다고 했지?’
창문으로 들어오려면 부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윤소희가 말해 줬다.
[ 그러니까 그냥 로비에 도착하면 나한테 연락해. 내려갈 테니까. ]
에르제는 그렇게 했다.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뒤, 윤소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하아.”
윤소희는 진짜 찾아왔냐고 묻는 듯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들어와.”
윤소희가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누른 상태로 말했고, 에르제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일부러 사람이 없는 엘리베이터에 탄 듯했다.
에르제도 꽁꽁 싸매고 오기는 했지만, 만의 하나라는 경우의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장소도 하필 오해 받기 딱 좋은 호텔이었고.
“그냥 며칠 기다리라니까 굳이 찾아온 이유가 뭐야? 라하임인가 하는 뱀파이어에 대한 정보는 아직 찾은 게 없다고 말해 줬잖아.”
“그거 때문이 아니에요.”
에르제가 무덤덤하게 대답하자, 윤소희가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면?”
“안에 들어가서 얘기할게요.”
마침 13층에 도착했기에 에르제가 그렇게 대답했다.
윤소희도 “그래라.”라고 말하고는, 성큼성큼 앞서서 1302호로 향했다.
그녀가 카드를 문에 대자,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았는데도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오.’
소속사 1층에서도 목에 건 출입증을 대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던데, 그것과 비슷한 원리인 듯싶었다.
“지구에 아직 완전히 적응한 건 아닌 모양이네?”
윤소희가 그 모습을 보며 풋 하고 웃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호캉스라고 하더니, 호텔에서 며칠 쉰다고 아예 살림을 차려 놓은 모양새였다.
노트북은 기본이고, 발 마사지 기구로 보이는 것과 뭘 그렇게 꾹꾹 눌러 담았는지 커다란 캐리어도 2개나 있었다.
“응?”
그래도 마녀랍시고, 연구 도구들도 챙겨 온 건지 플라스크 하나가 에르제의 시야에 들어왔다.
독극물처럼 보이는 초록색 액체가 담긴 삼각형 형태의 플라스크였다.
“어어!”
에르제가 그쪽으로 손을 뻗으려 하자, 윤소희가 다급하게 팔을 붙잡았다.
“그거 잘못 건드리면 호텔 전체가 터져서 날아간다?”
“…….”
그렇게 위험한 물건을 왜 이렇게 무방비하게 둔 건데.
에르제가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자, 윤소희가 조심스럽게 플라스크를 들어 올렸다.
“내 희대의 걸작이야.”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플라스크에 담긴 액체를 찰랑찰랑 흔들었다.
그 모습에 에르제가 인상을 썼다.
“……충격 잘못 주면 터진다면서요?”
“나니까 이 정도 컨트롤이 된다는 걸 보여 주려고.”
윤소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충격이라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거야.”
“?”
“잘 봐.”
윤소희는 그대로 어깨 높이에 들고 있던 플라스크를 떨어뜨렸다.
에르제의 눈동자가 이를 좇았다.
‘이 미친 마녀가.’
호텔 전체가 날아간다면서?
떨어지는 플라스크를 낚아채야 하나?
‘아냐. 오히려 그렇게 하면 그 충격으로 터질 수도 있다.’
호텔 전체가 날아갈 충격에도 자신은 살 수 있을 것이다.
‘윤소희도 모종의 방법이 있으니까 이런 짓을 저질렀겠지.’
하지만 그러면 이 호텔에 있는 사람들의 안전은 책임질 수 없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사고 가속 덕분에 결론을 내릴 때까지 걸린 시간은 1초도 채 되지 않았다.
사가가가각-.
다급해진 만큼 평소 능력을 쓰던 것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에르제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며 1302호 벽면을 감쌌다.
종이에 잉크가 퍼져 나가듯, 하얀색이던 벽면이 순식간에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쨍그랑-!
플라스크가 바닥에 닿으며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