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96화
태현우가 떨어지고 나서야, 에르제와 제이는 조금 더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더 이상 말을 고를 필요가 없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제이와 대략적인 정보를 주고받은 뒤, 에르제는 태현우와 함께 숙소로 돌아와서 생각에 잠겼다.
윤치우는 지금 밖에 나가 있는지, 몰래카메라를 하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서 가능했다.
‘수장도 대리인을 내보내겠다?’
의식용 단검에 대한 검증이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걸 알아본 뱀파이어가 없다는 건 좀 아쉬운데.’
혹시 알아본 뱀파이어가 있다면, 라하임의 소재를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애초에 에르제가 정보 교환으로 내건 조건이 의식용 단검을 사용했던 이에 대한 것이었으니.
‘그래서 검증을 하는 건가.’
혹은 단검 내에 다른 단서는 없는지 확인하는 작업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내부 사정을 제이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했어.’
하여 오늘 제이와 따로 골목에 들어갔을 때, 에르제는 그의 머릿속을 뒤져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하면, 조금 더 손쉬운 방법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제이는 이미 자신이 장진규의 정신을 장악했던 것을 본 뒤였다.
‘당연히 그에 대한 대비책은 마련해 뒀겠지.’
아마 뱀파이어 진영 내에 제이가 말해 두었을 것이다. 자신과 만날 때는 정신 지배에 당할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고.
‘그리고 제이가 방비도 없이 날 아는 척하지는 않았겠지.’
제이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시도를 하지 않았던 건 그래서였다.
때문에 저쪽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아서 답답했으나, 그래도 성과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 휴전을 하는 게 어떻습니까?
제이 쪽에서 먼저 휴전 제안을 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저번에 아육시에서 제이가 했던 짓 때문에 은근히 신경을 쓰고 있던 참이었으니까.
게다가 오늘 이야기를 나눠 본 결과, 제이는 뱀파이어 진영 내에서도 간부급에 속했고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보장받고 있는 위치였다.
그렇기에 제이가 ‘결과만 좋으면 돼’라는 마인드로 자신을 건드릴 여지가 충분했다는 것이다.
‘내가 직접 뱀파이어 진영에 들어간 게 아니라 장미영을 대리인으로 내세웠던 거니까.’
그렇기에 제이의 휴전 제안은 꽤 달콤했다.
게다가 휴전뿐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교류도 하기로 했다.
‘매일 안부나 묻자고 그런 말을 하진 않았을 테니.’
이로써 제이에게 주기적으로 뱀파이어 진영 내에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물어볼 수 있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무난하게 흘러간 대화였지만,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점이 아직 남아 있었다.
조금 전에도 떠올렸던, 수장이 대리인을 내세우겠다는 말.
‘굳이 대리인을 내세운다고?’
단검에 대한 정보를 확실히 얻어 내고 난 뒤, 인질로 잡은 자신의 정보를 교환하는 시점.
수장이 직접 나오거나 그냥 밑의 뱀파이어를 내보내도 될 일을 굳이 ‘대리인’이라는 말을 썼다.
이것으로 일단 추측해 볼 만한 것은 그쪽 수장이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는 것.
이쪽이 대리인을 내세웠으니, 똑같이 대리인을 내세우겠다는 심보가 아닌가.
수장의 정보는 주지 않으면서 궁금증만 키우는 방식. 저쪽도 ‘내가 누구게?’라는 정보를 인질로 잡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스읍.”
에르제는 입술 사이로 살짝 숨을 들이켜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준 정보가 뭐가 됐든, 수장을 직접 만날 수 있을 정도의 가치까지는 되지 않는다는 말이야.’
조금 짜증이 나기는 했으나, 에르제는 어느 정도 납득했다.
장진규에게 알려 준 정보는 자신이 고군분투하며 알아낸 것도 아니었고, 드워프에게 들은 정보였기에 그리 애착이 없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의식용 단검 사용자에 대한 정보만 얻을 수 있어도 충분해.’
솔직히 뱀파이어 진영에서 라하임을 찾아 준다면, 그쪽 수장이 누구인지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의식용 문서가 남아 있었다면 더 확실했을 텐데.’
소실된 것을 뭐 어쩌겠는가.
오히려 그것 때문에 라하임이 이곳에서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있고.
그렇게 에르제가 거실에서 다리를 꼰 채 사색에 잠겨 있을 때, 초조하게 창가에 서 있던 태현우가 소리쳤다.
“왔어! 준비해!”
미리 창가에서 윤치우가 오고 있는 것을 확인한 태현우가 느긋한 숙소에 긴장감을 확 안겨 주었다.
아무래도 데뷔 후 처음 맞는 멤버의 생일이다 보니, 매니저인 이윤까지도 숙소에 와 있었다.
에르제는 선물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이동하는 사람들을 따라 현관문 쪽에 가서 섰다.
민주혁과 태현우가 조금 좁은 왼쪽에 일렬로 섰고, 그 반대편에 안단테, 에르제, 이윤이 섰다.
꿀꺽-.
안단테가 손에 폭죽 두 개를 들고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손에 케이크를 어정쩡하게 들고 있는 민주혁도 마찬가지였다.
‘초콜릿이 눈처럼 내려앉은 달콤한 매력 뿜뿜 케이크’로 요즘 인기 많은 케이크라고 하던데, 인터넷에 검색해서 이미지를 봤을 때 그냥 초콜릿 케이크랑 뭐가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맛은 있어 보이던데.’
애초에 에르제는 먹을 생각밖에 없기도 했고.
유일하게 긴장감이 1도 없는 에르제가 케이크만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띠디디디-.
현관문의 도어록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린 뒤에 윤치우가 걸어 들어왔다.
손을 앞으로 뻗어 둥그렇게 만든 곳 위에는 무언가가 한 아름 쌓여 있었는데, 아마 태현우가 말했던 팬들이 보낸 선물이 아닐까 싶었다.
“얘들아! 있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선물이 얼굴까지 쌓여 있는 탓에 현관문 앞에 사람들이 쪼르르 서 있는 것도 모르고 윤치우가 크게 소리쳤다.
“…….”
“…….”
어떻게 하지? 하는 눈으로 멤버들이 서로 쳐다보고 있는 사이, 윤치우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걸 확인했는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아무도 안 들어왔나 보네.”
윤치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에고, 하는 소리와 함께 선물을 현관 바로 앞에 내려놓았다.
위태롭게 놓여 있던 상단의 조그만 선물 몇 개가 데굴데굴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
굴러 떨어지던 것을 눈으로 좇던 윤치우의 시선에 발 4개가 들어왔다.
“응?”
‘지금?’
‘지금!’
안단테에게 태현우가 격렬하게 고갯짓을 하고, 안단테가 눈을 질끈 감으며 오른손을 잡아당겼다.
펑! 펑!!
양쪽에서 폭죽이 터지고, 이내 박수 소리가 칼 박자로 들어왔다.
“생일 축하합니다~.”
그리고 멤버들과 이윤이 함께 윤치우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주었다.
태현우가 아래로, 에르제가 위로 화음을 쌓았다.
“사랑하느으으으은~~~~.”
그리고 이어진 태현우의 애드리브까지.
대략 32단 꺾기로 정신이 혼미해질 즈음, 민주혁이 태현우를 자제시켰고, 겨우겨우 노래가 끝이 났다.
“생일 축하해여!!”
“축하해, 형!!”
안단테와 태현우가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채 엉거주춤한 상태의 윤치우를 뒤에서 꽉 안으며 얼굴을 비볐고, 민주혁이 그의 앞으로 와서 케이크를 내밀었다.
“……축하해.”
민주혁이 어색하게 축하 인사를 건네자, 이윤이 윤치우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축하한다. 이건 선물.”
“아! 저도여! 제 것도 있어여!”
“나도!!”
이윤이 가장 먼저 선물을 건네자, 다른 멤버들도 앞다투어 선물을 치우의 품에 안겼다.
조금 전 팬들 선물을 겨우 내려놨는데, 다시 윤치우의 품에 한 아름 선물이 들렸다.
“감사…… 합니다.”
정말로 이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윤치우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서 나왔다.
윤치우는 힘겹게 부엌까지 걸어가서 기다란 식탁 위에 선물을 내려놓았다.
그사이, 다른 멤버들은 팬들의 선물을 챙겨서 윤치우의 방에 넣어 놓았다.
“형! 이거 말고 또 있어여?”
“어. 아직 차에 더 있을 거야. 일단 둬. 내가 할게.”
“아니에여!”
“나도 도와줄게.”
안단테의 뒤를 따라 민주혁이 쫓아서 나갔고, 에르제는 윤치우에게 다가갔다. 주머니에서 꺼내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주기 위해서였다.
“뭐야. 은우도 선물 준비했어?”
윤치우가 밝게 웃으며 몸을 돌리자, 에르제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거.”
“……응?”
윤치우는 손바닥만 한 종이를 받아 들고는 ‘이게 뭐지?’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소원 쿠폰이야.”
“소원 쿠폰?”
“응.”
윤치우가 피식 웃으며 종이를 흔들었다.
“2개나 있네? 괜찮겠어? 내가 무슨 소원을 들어 달라고 할 줄 알고?”
“윤치우는 상식적인 사람이니까 그래도 상식적인 소원을 빌지 않을까 싶어서. 다른 인간이었으면 이거 안 줬을걸.”
“아하.”
윤치우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에르제와 동시에 옆에서 구경하던 태현우를 바라보았다.
“……뭐! 왜?!”
태현우가 괜히 찔린 듯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나도 상식적이거든?”
그렇게 말하고는 슬쩍 에르제를 바라본다.
“……자기가 제일 이상하면서.”
“?”
“제이랑…….”
태현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거실 소파에 가서 털썩 앉았다.
“이걸 말할 수도 없고. 에휴.”
이해할 수 없는 태현우의 말에 에르제와 윤치우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이내 소원 쿠폰 쪽으로 다시 주의를 돌렸다.
“그래서, 생각나는 거 있어?”
“흐음.”
윤치우는 고민하며 손으로 턱 쪽을 매만졌다. 그러고는 태현우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했다.
“뱀파이어도 소원 들어주는 쪽에 포함되어 있는 거야?”
“그렇게 할까?”
윤치우는 에르제 자신이나 그룹에 피해가 될 만한 소원을 빌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리한 부탁을 할 위인도 아니었고.
‘근데 뱀파이어에게 바라는 게 있을까?’
지인 중에 아픈 사람이 있어서 고쳐 달라든가, 뭐 그런 거라면 가능한 이야기였다. 비밀 엄수만 해 준다면 언제든지.
혹은 윤치우가 ‘나도 뱀파이어로 만들어 줘.’ 정도일 것 같은데, 그건 저번에 위험성을 설명해 줬기에 그걸 소원으로 빌 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윤치우가 굳이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 할 이유도 없었고.
“괜찮으니까 말해 봐.”
그렇기에 에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말했다.
“지금 생각나지 않으면 언제든지. 거기 밑에 유효기간 있으니까 그 전이면 상관없어.”
“선물을 소원 쿠폰으로 주면서 유효기간까지 있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윤치우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는, 곧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에르제가 추측했던 것과는 아예 다른 소원을 들이밀었다.
“일단 하나 생각난 게 있어.”
“뭔데?”
윤치우가 두 개로 이어져 있던 소원 쿠폰 하나를 찢어 냈다.
그리고 그것을 에르제의 가슴팍에 탁, 하고 붙였다.
“네 안에 잠들어 있는 은우, 잠깐이라도 깨워 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