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95화
연예인 병.
중2병에 이어서, 또 다른 병이 등장했다.
‘연예인들이 걸리는 건가?’
에르제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제이에게 반문했다.
“선배는 연예인 병에 걸려서 이곳에 있는 건가요?”
“뭐?”
제이가 어이없다는 듯이 존대하던 것도 잊고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옆에 서 있던 직원 둘이 고개를 돌렸다.
“큽…….”
태현우도 옆에서 웃음을 참다가 이내 에르제의 옆에 서서 보조했다.
“그런 겁니까!?”
태현우가 지원사격을 하자, 제이가 허탈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서은우 씨는 그렇다고 쳐도, 태현우 씨까지 그런 소리에 동참할 줄은 몰랐는데.”
느릿한 제이의 말에 태현우가 팔짱을 꼈다. 제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들어 올렸다.
“아무튼, 도와줄 거 없나 해서 물어본 겁니다. 마침 쇼핑을 온 참이라서.”
그러고는 은근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런 곳은 처음일 텐데, 익숙한 사람이 있으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괜찮아요.”
태현우가 필요 없다는 식으로 나왔으나, 어차피 선물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던 에르제는 제이에게 다가갔다.
“리더 선물을 사러 왔는데, 그럼 도와줄래요?”
“선물?”
제이는 태현우가 고른 선물을 흘긋 보고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일 선물을 말하는 거죠?”
“맞아요.”
“흐음, 데뷔하고 나서는 처음 선물을 주는 거 같은데, 벌써 이렇게 큰 지출을 한다라…….”
제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요즘 토트윈의 상승세 보면 정산금이 쏠쏠하게 들어오기는 했겠네요.”
조금 공격적인 말투를 하던 제이는 별 고민 없이 흔쾌히 에르제에게 대답했다.
“도와줄게요. 종류는 따로 고른 거 있습니까?”
“없어요.”
에르제는 태현우에게 알아서 계산하고 오라고 이야기를 하고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에르제가 제이에게 부탁을 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진짜로 선물을 뭘 사야 할지 물어보고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고, 또 다른 하나는 최근 장진규와 나누었던 이야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얘기를 하려면 태현우는 떼어 놔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태현우가 자신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바라보듯 하고 있어서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에둘러서 표현하면 알아듣겠지.’
에르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제이가 고민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흐르고, 태현우가 계산을 마치고 나올 때쯤 제이가 입을 열었다.
“뭐 좋아하는 거라든가 그런 건 따로 모릅니까?”
“음…….”
에르제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은 윤치우에 대해서 그리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전에 윤치우가 쓰러졌을 때 생명력을 나누어 주기도 했고, 같이 던전에 갇혀서 유일하게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인간이었지만.
‘……그 반대는 아니야.’
윤치우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자신이 윤치우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량이 한없이 적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 싫어하는지. 평소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라는 것 말고는 딱히.
“모르겠어요.”
“……어렵군.”
제이가 턱 밑을 쓰다듬으며 이번에는 태현우에게 물었다.
“그쪽은 알고 있습니까?”
“어느 정도는요.”
태현우는 여전히 제이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방어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최근에 지갑이 많이 헐어 있는 걸 봐서 저는 지갑을 선물하기로 결정한 거고요.”
“그 외에는 모른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로 생각해 보는 게 좋겠네요.”
제이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에르제에게 물었다.
“향수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굳이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향수를 비롯한 메이크업 제품이나 화장품 등은 안병인의 회사에서 알아서 챙겨 주고 있었다.
기업 차원에서 지원을 해 주고 있다 보니, 의상 같은 것도 굳이 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협찬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윤치우가 사복을 입고 밖에 많이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라서 더더욱.
이후에도 제이가 몇 가지 더 의견을 제시했으나, 에르제는 이렇다 할 느낌을 받지 못했다.
“실망이에요, 선배.”
“…….”
어째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도와주고 있는 자신이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지……? 제이가 그런 눈빛으로 에르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에르제는 친절하게 고개를 저어 주었다.
“연예인 병이라더니, 별거 아니었네요.”
“……평소에도 이럽니까?”
제이가 하소연하듯 태현우에게 투덜댔다.
“실망이에요.”
태현우도 같은 소리를 하며 픽 웃었다. 태현우까지 그렇게 나오자, 제이가 이를 악물었다.
“이거 오기가 생기는데.”
괜히 도와준다고 했다고 후회하는 것도 잠시, 제이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기로 했다.
“그러면, 일단 여기를 나가죠. 안에서는 마땅한 걸 찾기 어려울 것 같으니까.”
“좋아요.”
에르제와 태현우는 제이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모자챙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을 손으로 가리며, 에르제가 제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선배는 멤버들의 생일 선물로 뭘 줬어요? 그걸 알면 좋지 않을까요?”
“뭐, 별다른 거 안 했습니다. 애초에 우리는 이런 명품으로 선물을 주지도 않았고, 그냥 평소 먹고 싶어 하던 거나…… 쿠폰으로 때우는 놈들도 있기도 하고요.”
“쿠폰?”
“소원 쿠폰 같은 겁니다.”
“오?”
그 말에 에르제는 처음으로 흥미를 느꼈다.
이 얼마나 합당한 시스템인가.
선물을 받을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선물하고, 그가 고르도록 하면 되는 훌륭한 시스템이었다.
“그 사람은 천재가 분명해요.”
에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 소원 쿠폰은 어디서 살 수 있어요?”
“……?”
제이가 당황해서 에르제를 바라보았고, 태현우가 재빨리 그를 뒤로 끌어당겼다.
“그건 사는 게 아니야. 종이 같은 거 찢어서 ‘소원 쿠폰’이라고 쓰면 돼.”
“아하.”
파는 게 아니었구나.
에르제가 알았다는 듯이 굴자, 제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진짜 그거로 하려고요?”
“네.”
“……지난 30분이 굉장히 쓸모가 없어졌네.”
“원래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그런 과정이 필요한 법이에요. 쓸모없는 과정이란 없어요, 선배.”
“아, 머리 아파.”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제이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무튼 그럼 그걸로 하고, 저는 다시 쇼핑하러 갑니다.”
아무래도 태현우의 말대로 LAK의 소속사도 이곳에 있다 보니, 이곳에서 쇼핑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아직인데.’
하지만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던 에르제가 제이의 소매를 붙잡았다.
“잠시만요. 중요한 얘기가 남았어요.”
그러고는 태현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자리 비켜 줄 수 있어?”
“안 돼. 저번 한 번으로 충분해.”
저번이라면, 제이와 장진규와 만났던 때를 말하는 건가.
“그때도 우리가 대기하고 있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잖아.”
“…….”
굳이 따지자면, 그때 자신이 장진규와 제이를 공격했던 입장이었다.
장진규의 정신을 장악하고, 제이를 힘으로 옭아맸었다.
‘우혈충도 심었었지.’
그렇게까지 생각하던 에르제의 표정이 굳었다.
‘잠깐만.’
지금까지 생각할 일이 많아서 깜빡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자신은 그날 장진규의 몸에 우혈충을 심어 두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아무런 정보도 보내오지 않았어.’
처음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서 보고할 것이 없나 하고 여겼는데, 그로부터 벌써 몇 달이나 지났다.
‘우혈충이 죽었다면 내가 바로 알아챘을 거야.’
그렇기에 죽은 것이 아니라면 경우의 수는 두 개밖에 없다.
정말로 장진규가 지금까지 특이한 행동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우혈충의 존재를 알고 가사 상태에 빠뜨렸거나.
‘……만약 가사 상태에 빠뜨린 뱀파이어가 있다면, 확률이 제일 높은 건…….’
에르제는 바닥을 보며 생각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이를 바라보았다.
‘제이밖에 없어.’
장진규보다 제이가 상관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마 우혈충을 심은 그날, 제이는 바로 눈치챘을 것이고 빠른 시일 내에 정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잠재워 뒀을 가능성이 높았다.
‘……가설을 확실하게 하려면 제이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데.’
차라리 윤치우가 옆에 있었다면 상관없었을지도 모르지만, 태현우는 아니었다.
자신이 뱀파이어인 것도 모르고, 인간들 사이에 인간이 아닌 종족들이 섞여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다.
태현우가 ‘장미영 님’이라 부르는 그녀조차도 서큐버스가 아니던가.
‘돌려서 표현하는 수밖에.’
당장 태현우를 떼어 놓을 마땅한 방법이 없었기에 제이와 자신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은 전음 같은 것도 쓸 수 있다던데.’
씁쓸한 표정을 지은 에르제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신 옆에서 그냥 듣기만 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오키.”
“……흐음, 괜찮겠습니까?”
제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고, 에르제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게 하죠.”
제이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할 말이라는 게 뭡니까?”
“음…….”
이제부터는 말을 신중하게 골라서 해야 한다. 태현우에게 괜한 오해와 의심을 사지 않도록.
‘일단은 장진규가 말한 것이 상부에 잘 전달되었는지부터 확인을 해야겠지.’
에르제는 긴장한 표정의 태현우를 슬쩍 보고는, 다시 제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래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나요?”
“……?”
“제 의식도 맡겼고, 받아들여 달라고 했잖아요.”
의식은 의식용 단검이었고, 받아들였냐고 묻는 것은 자신의 제안에 대한 것이었다.
“아아.”
제이도 무슨 말인지 알아챘는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안 됩니다. 조금 더 검증을 해 봐야 하니까요.”
“검증할 게 더 있나요?”
“아직 서은우 씨에 대해서 완벽하게 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받아들이는 데 신중을 기할 필요는 있죠.”
“……그 정도면 충분히 제 마음을 표현했다고 생각했는데요.”
“흐음.”
제이가 걷다 말고 팔짱을 낀 채 에르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더 간절함을 표현해 보는 것도 괜찮고요.”
간절함이라. 에르제는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서로 스케줄이 빌 때 제가 집으로 찾아갈까요? 그때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눠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박쥐로 변해서 찾아간다면 밖에 있는 카페나 애용하고 있는 비밀 회담 장소보다는 아예 집으로 찾아가는 것이 편하다.
하지만 문득 에르제는 제이도 아이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선배도 멤버들이랑 같이 살겠구나.”
“집은 단둘이 있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네요. 둘만 있을 공간이 있으면 조금 더 편할 텐데.”
에르제가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옆에서 잘만 걸어오던 태현우의 발목이 삐끗했다.
“읏!”
에르제와 제이가 동시에 넘어지던 태현우의 팔을 잡았다.
에르제가 제이보다 조금 더 빨랐기에 제이는 에르제의 손등을 잡고 있는 모양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
태현우는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두 손을 보며, 세상의 온갖 혼란과 혼돈을 조그만 얼굴에 가득 담은 채 힘겹게 일어섰다.
그러고는 두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미안.”
태현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조금 더 뒤로 물러났다.
“둘이 조용한 데 가서 이야기해. 내가 방해했나 봐. 미안!”
그러고는 이내 몸을 돌려서 후다닥 뛰어갔다. 태현우의 손에 들려 있던 쇼핑백이 마구 휘날렸다.
에르제가 그런 태현우를 보며 제이에게 말했다.
“저희 멤버들 중에서 눈치가 제일 빠른 편이에요. 중요한 이야기라는 걸 알았나 봐요.”
“저희 멤버 중에서도 그런 녀석이 있기는 합니다. 완전 반대가 이채선이고.”
피식 웃은 제이는 인적이 드문 골목 쪽으로 턱짓을 했다.
“저쪽으로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