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94화
00:00. 벽에 걸린 디지털시계가 5월 20일로 넘어갔음을 알릴 때도, 그리고 자고 일어난 다음 날에도 멤버들은 윤치우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토트윈으로 데뷔한 이후 처음으로 멤버의 생일을 챙기는 날이었기에 몰래카메라를 하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하는 중이었다.
“다들 잘 잤어? 컨디션은? 아픈 사람?”
하지만 윤치우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고, 평소처럼 리더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는 중이었다.
거실에 모여서 멤버들의 컨디션 확인을 마치고, 태현우가 에르제에게 다가와 그를 툭툭 치며 속삭였다.
“이따 저녁에 생일 파티 하기로 했으니까 지금 바로 나가자. 그리고 팬들이 소속사로 보낸 선물도 오전 중에 도착한다고 했으니까 그 전에 나가야 해.”
“아하.”
에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몰래 나갈 준비를 하는 다른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연습 핑계를 대고 외출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있으니, 윤치우가 다가와서 물었다.
“애들은 다 연습 간다는데, 너희들은 어디로 가? 회사?”
태현우가 에르제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씩 웃었다.
“나 오늘 집에 일이 있어서 본가에 잠깐 다녀오려고.”
“은우는?”
“데려가서 밥이라도 먹이게. 어머니가 은우를 보고 싶어 하셔 가지고.”
“아아.”
윤치우는 알겠다는 듯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잘 다녀오고 조심해서 갔다 와. 대중교통 말고 웬만하면 택시 타고 가고.”
“오키오키~.”
태현우가 에르제의 등을 떠밀며 신발장으로 내보냈다.
“형은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응. 나는 부모님이 숙소에 잠깐 들르신다고 해서. 그리고 해야 할 것도 있고.”
“그래? 그럼 쉬고 있어!”
윤치우가 할 말이 있는 듯 잠깐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가 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덜컹-.
뒤에서 문이 닫히고 태현우가 낄낄댔다.
“치우 형, 약간 섭섭해하는 거 같지? 그렇지? 할 일 있다고 은근히 어필한 것 같던데. 그거 백퍼 팬들이 보낸 생일 선물 확인하고 SNS에 올리는 일일걸.”
눈치 빠른 태현우의 말이니 아마 대부분 맞을 것이다.
에르제는 속으로 동의하며 태현우에게 물었다.
“그래서 태현우, 우리는 어디로 가? 여기 인간들은 어떤 선물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네.”
“아!”
그제야 태현우가 피식 웃으며 잊었던 기억을 떠올린 듯이 말했다.
“너, 기억 잃었지.”
태현우는 스마트폰으로 택시를 잡으며 말을 이었다.
“요즘에는 기억 잃은 걸 떠올릴 일이 없어서 까먹고 있었네. 선물은 가서 같이 고민해 보자.”
택시를 잡은 태현우가 스마트폰을 짤랑짤랑 흔들었다.
숫자가 많았다.
“우리 정산금 많이 들어왔잖아. 흐흥.”
태현우를 따라 도착한 곳은, 압구정이라는 동네였다.
숙소가 있던 곳보다 도로가 훨씬 넓었고, 인도를 따라 띄엄띄엄 있는 건물들은 높기보다 옆으로 컸다.
“여기에 다른 유명 소속사도 있어. 3군데가 있는데, LAK가 소속된 곳도 여기에 있거든.”
태현우가 주변 지리를 설명하며 말했다.
“골목에 들어가면 보이긴 할 텐데, 오늘 적진 시찰 나온 건 아니니까!”
누군가의 선물을 사러 나왔다는 사실이 기쁜 건지, 태현우는 상당히 들떠 있었다.
‘누가 알아보면 어쩌려고.’
에르제는 고개를 저으며 태현우의 모자를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푹 눌러 버렸다.
“억.”
머리도 따라서 아래로 내려간 덕분에 순간 고꾸라질 뻔한 태현우가 에르제를 노려보았다.
“놀랐잖아……!!”
“목소리 좀 낮춰. 모자도 그렇게 드러내고 쓰지 말고.”
하지만 에르제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저번에 마트에서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자칫하면 선물을 사러 왔다가 즉석 팬사인회를 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부주의한 녀석.’
에르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투덜대는 태현우를 따라 걸었다.
이럴 거면 굳이 왜 저쪽에서 택시를 내렸나 싶을 정도로, 백화점이란 곳까지 거리가 좀 되었다.
대략 태현우의 걸음 속도로 5분 정도 걸어갔을 때, 하얀색 건물에 ‘JALLERIA’라고 쓰여 있는 백화점에 도착했다.
“젤뤄뤼아?”
에르제가 유창한 영어 발음을 뽐내자, 태현우가 맞장구를 쳤다.
“어어. 젤뤄뤼아. 유명한 백화점이고, 무지하게 비싸.”
태현우가 검지로 에르제를 가리켰다.
“준비됐어, 서?”
“……?”
뭐지? 뭔데.
‘서’는 서은우의 서인가? 혼란스러워하던 에르제가 겨우 대답했다.
“준비됐어, 은우……?”
“…….”
태현우가 세워 둔 손가락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내가 ‘서’라고 했으면 ‘너는 준비됐어, 태!’라고 받아야지.”
“그런 거야?”
“그런 거야.”
태현우가 으휴,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는 에르제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 나중에 더 유명해지면, 이렇게 백화점에 못 올지도 몰라. 인터넷으로 주문해야 하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이럴 때 한 번씩 코에 바람을 넣어 주는 게 아주 중요해.”
“흐음.”
그냥 놀러 나오고 싶었는데, 윤치우라는 기가 막힌 핑계가 생긴 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문득 들었다.
눈치도 빠르고 멤버들과 둥글둥글하게 잘 지내는 녀석이기는 한데, 이렇게 통통 튀어 대니 어디 가서 사고를 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아닌가? 그 정도 앞가림은 하는 거 같기도 하고.’
생각해 보면, 태현우가 사고를 친 적은 딱히 없었던 것 같다.
가끔씩 인터뷰나 1위 소감 같은 거 말할 때, TMI 모드가 되는 것 말고는.
그룹 내에서 사고를 제일 안 치는 자신의 기억이니 확실한 듯싶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르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이 없는 태현우는 열심히 이곳 백화점에 대한 설명을 이어 갔다.
“여기가 남성 명품으로는 되게 유명해. 그만큼 초고가 브랜드가 대부분이기는 한데, 1년에 한 번밖에 없는 날이니까.”
태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에르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내 생일도 곧 오니까…… 알지?”
“……네 거는 문방구에서 살 거야.”
“으씨.”
태현우가 입술을 비죽 내밀며, 평상시의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지었다.
모자가 또 위로 밀려 올라가서, 에르제가 다시 한번 모자를 눌러 주었다.
“……그래서 뭘 살지는 정했어?”
에르제는 매장 내부를 전반적으로 둘러보며 태현우에게 물었다.
“나는 정했지. 너는?”
“아직…….”
직접 찾아와서 봤는데도, 사실 잘 모르겠다.
‘선물하는 사람의 마음은 선물의 값과 같다.’
카테이아 대륙에서 인간들끼리 생일 선물을 주고받을 때, 그런 이야기가 있기는 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이곳에서 선물을 구매하는 것이 나아 보이기는 하지만…… 뭐랄까. 윤치우라는 인간의 속성을 생각하면, 그렇게 끌리지는 않았다.
‘명품을 선물하는 거랑, 편의점에서 파는 과자를 선물하는 거랑 반응이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그냥 멤버들이 자신의 생일을 잊지 않고 챙겨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할 인간이다.
에르제는 고민하다가 기다리는 태현우에게 말했다.
“나는 조금 더 고민해 볼게. 네 거부터 사자.”
“그럴래?”
태현우는 알겠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고, 그렇게 도착한 곳은 시계와 지갑으로 유명하다는 매장이었다.
“흐응, 흥 흥.”
태현우는 데뷔곡 ‘HaLLo’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지갑들이 놓여 있는 유리를 관찰했다. 그 안에 있는 지갑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려는 모양이었다.
‘……신기하네.’
그리고 에르제는 그 모습을 보며 매장들이 어떻게 상품들을 진열했는지 구경했다.
확실히 카테이아 대륙의 상점과는 많은 점에서 달랐다.
‘애초에 명품 같은 개념도 특별히 없었으니.’
유명한 장인이 만든 것들은 이렇게 진열해 놓고 팔기보다는 보통 경매로 판매되었다.
카테이아 대륙에서는 경매가 상당히 활성화되어 있었고, 귀족들이나 황족들 혹은 돈 많은 상인들이 많이 참가하는 방식이었다.
‘거기서는 그렇게 해야 제값을 받는다고 여겼는데.’
이곳에서는 품질 좋은 것들의 생산이 그리 어렵지 않은지 이렇게 여러 개를 늘어놓고 정해진 가격에 파는 듯했다.
게다가 D.C라는 개념도 있어서 정가보다 몇 퍼센트 싼 가격에 판매하는 모양이었다.
‘장인들의 프라이드 때문에 저런 건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확실히 다른 차원의 세계이다 보니, 같은 인간들이라고 해도 사고방식이 많이 다른 모양이다.
‘……마법이 아니라 과학이 있는 곳이라서 그럴지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에르제가 구경을 하고 있을 때, 태현우에게 붙어 있는 직원 말고 다른 직원이 그에게 다가왔다.
“어머.”
그러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는 것 같은데.”
“?”
“혹시 토트윈의 서은우 님이에요??”
“아!”
마스크와 모자로 가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매장 안에 너무 오래 노출되어 있었나 보다.
그들을 관찰하던 직원 하나가 결국 알아본 모양이었다.
어차피 알아본 거 아니라고 할 수도 없어서 에르제는 기품 있게 한 손을 내리며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풋, 평소에도 이렇게 인사하는 거였어요? 방송에서만 콘셉트로 그렇게 하시는 건가 했는데.”
“인사는 사람의 품격을 나타내는 좋은 방법이니까요.”
에르제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직원은 쿡쿡 웃더니, 검지로 입술에 가져다 댔다.
“걱정하지 마세요. 연예인분들도 워낙 많이 오셔서 익숙하거든요. 말 안 할게요.”
“아,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직원도 물건을 파는 입장이다 보니 이곳을 팬사인회 장소로 만들고 싶지는 않을 거다.
“나중에 가시기 전에 사인 한 장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에르제가 흔쾌히 대답하자, 직원은 밝은 웃음을 짓고는 “잠시만요.” 하고 자리를 떴다.
사인을 받기 위한 종이를 가지러 간 건가 싶었는데, 다른 이유였다.
- 네가 없는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매장 내에 이번 토트윈의 2집 앨범 타이틀곡이 울려 퍼졌다.
조금 전까지는 은은한 음악을 틀고 있던 것에 비해 파격적인 변화라서 태현우도 그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오!”
그러고는 대충 눈치로 상황을 파악하고 직원에게 엄지를 세워 주었다.
그 모습에 에르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물건을 팔기 위한 전략이라면, 무조건 넘어갔겠는데.’
그리고 역시나.
“이거 주세요!”
매장 몇 군데 더 둘러보고 결정한다더니, 내 저럴 줄 알았다.
에르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신은 윤치우에게 무엇을 선물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토트윈 노래가 왜 나오나 했더니.”
에르제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로 토트윈이 여기에 왔을 줄이야.”
고개를 뒤로 돌리니, 그곳에는 한 손에 쇼핑백을 들고 있는 제이가 서 있었다.
6월에 앨범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더니, 그걸 위해서 머리도 분홍색으로 염색을 한 모양이다.
그 모습에 에르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분홍색 별로 안 어울리네요. 선배.”
으득,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는 한데, 에르제는 기분 탓이려니 하고 넘겼다.
제이가 숨을 훅 뱉어 냈다.
“……뭐, 아무튼.”
그가 태현우와 에르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연예인 병에 걸린 건 아닐 테고, 여기는 무슨 일로 왔습니까?”
연예인 병이라는 말에 에르제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