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93화
에르제가 이윽고 장진규의 이마에서 손을 떼어 내자, 장진규는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뒤로 날렸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고는 곧바로 무릎을 굽힌 채 언제든지 튀어 나갈 자세를 잡았다.
“…….”
“…….”
에르제와 장미영은 말없이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고, 때문에 장진규는 그제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설마…….”
“맞아요. 기억을 지웠어요. 내가 기억을 지우겠다고 한 그 부분까지 지우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에르제의 말에 장진규가 입술을 짓이겼다. 그러고는 어떻게든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끄응.”
하지만 에르제가 기억을 남겨 둔 부분까지만 생각이 나는지 앓는 소리만 냈다.
에르제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눈치를 보던 장진규가 슬그머니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물었다.
“일단……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는데, 기껏 정보를 말해 주고 기억을 지우는 건 무슨 의미인지 물어봐도 됩니까?”
장진규의 물음에 에르제가 장미영을 바라보았다.
“장미영은 눈치챈 것 같은데, 그쪽은 아직인가 보군요.”
실망했다, 라는 식의 말투에 장진규는 순간 발끈했지만, 그것도 적의 계략이라고 여기고 꾹 참았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머리 쓰는 걸 이렇게 못해서야……. 장미영을 맡길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작자가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뱀파이어 영입을 하고 있는지, 그들 진영의 인사 관리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제이가 계략에는 더 밝았어.’
에르제는 아육시에서 제이가 팠던 함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 도중에 위화감을 눈치채고 녹음을 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제이가 만든 함정에 빠졌을 것이다.
참가자를 자진 하차시켜 버릴 거라고는 에르제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하긴 탐지 전문이라면, 굳이 머리가 필요하지 않아도 되긴 해.’
그런 장진규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제이를 붙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찌 됐든.’
설명이 필요하면 할 수밖에.
에르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장진규에게 기억을 지운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국가 간 협상을 할 때, 가장 효과적인 카드가 뭔지 아시나요?”
“……?”
“인질입니다.”
에르제의 말에 ‘역시!’하는 눈빛을 장미영이 보내왔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아주, 손쉽게, 우위에 설 수 있거든요.”
“그…… 렇겠죠.”
“물론 인질의 가치에 따라서 협상의 결과가 달라지겠지만, 한번 떠올려 보세요.”
“무엇을……?”
“조금 전 말한 정보의 가치. 그 기억은 남겨 두었으니 정보의 중요도는 본인도 알고 있을 거예요.”
“끄응.”
장진규는 앓는 소릴 한 번 더 내더니 눈동자를 굴려서 기억을 더듬었다.
뻥 뚫려 버린 기억의 공백 언저리를 탐색하던 장진규는 낭패 섞인 표정을 지었다.
“중요…… 한 내용이었군요. 그것도 상당히…… 중요한.”
“네. 뱀파이어 진영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때에도 지침이 될 만한 내용이에요.”
“하아……. 그럼 그 대가로 원하는 것이 뭡니까?”
그래도 머리가 아예 빈 것은 아닌지, 이쪽의 요구 사항을 물어왔다.
“흠.”
에르제는 테이블 위로 양손을 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우선은 장미영에 대한 대우부터 개선해 볼까요?”
장미영이 자신을 퀸이라고 믿고 있는 상태이기는 하지만, 더욱 완벽하게 그녀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뱀파이어에 종속되어 있던 삶을 끝내 준 것은 퀸이지,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이대로 퀸으로 그녀를 이용해 먹기에는 뭐랄까,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다.
‘빚 아닌 빚을 지워 둘 필요가 있어.’
혹시나 자신이 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라도 자신의 편으로 계속 남을 수 있게 말이다.
‘그것도 내가 퀸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무용지물이 되겠지만.’
그것은 자신이 직접 말하지 않는 이상, 절대 들킬 일이 없는 일이기에 상관은 없었다.
“장미영을 이용했던 것을 사과하고, 내 대리인이 아닐지라도 대등한 관계로 대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싶은데요.”
“……서은우 님…….”
장미영이 옆에서 내 소매를 꾹 붙잡았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에르제는 그녀에게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 주고는, 다시 장진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서큐버스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이 몹시도 못마땅한 듯 보였으나, 결국에는 머리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그렇게 사과를 한 이후 장진규는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딱히 귀 기울여 들을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애초에 목적이 장미영의 신뢰감을 높이고, 장진규가 자신의 밑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해 두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이건 그냥 짚고 넘어가려고 한 것뿐이고, 진짜는 이겁니다.”
에르제는 그렇게 말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추가적인 물건을 꺼내 들었다.
전에 황구에게서 받았던 의식용 단검이었다.
‘라하임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찾지 않을 수는 없어.’
“이건…….”
장진규는 의식용 단검을 받아 들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의식용 단검입니다. 이것을 사용하려던 사람을 찾고 있고요.”
“……그렇다면?”
“네. 뱀파이어 진영 쪽에서 이것에 대한 정보를 찾아 준다면, 그쪽의 기억을 되살려 주겠습니다.”
“…….”
“만약 그쪽 수장이 나와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면, 언제든지 응할 의향이 있고요.”
처음에는 뱀파이어들을 이렇게 모아 놓았다면, 그쪽 수장이 라하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처음 제이와 장진규를 함께 만났을 때, 이들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라하임이라면 뱀파이어들을 이렇게 움직일 리가 없어.’
이런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아서 뱀파리스들에 대응하겠다는 어설픈 생각은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일족들 위주로 모았겠지.’
그리고 지금까지 발견한 라하임의 행적을 볼 때, 녀석은 자신을 이곳 지구로 불러내려던 모양이었다.
라하임을 지구로 보낸 자신이 죽기 전에 어떻게든 이곳으로 불러내어 살리겠다는 의도였겠지.
그러므로 이렇듯 한가하게 뱀파이어들이나 모아서 수장 노릇이나 하고 있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저쪽 수장을 만나는 조건으로 장진규의 기억을 되살려 줄 이유는 없어.’
기껏 인질로 잡은 정보로 교환하기에는 아까웠다.
‘오히려 저쪽에서 만나자고 나올 수도 있고.’
일단은 라하임의 소재를 추적할 수 있는 의식용 단검에 대한 정보가 더욱 시급했다.
“일단…… 위에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장진규는 에르제의 말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의식용 단검을 품에 넣었다.
“장미영 씨의 번호는 이미 교환한 상태이니 대리인인 장미영 씨를 통해서 연락을 취하는 것으로 하죠.”
“좋아요.”
결론은 명쾌하게 났다.
에르제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리고.”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장진규를 향해 경고를 날렸다.
“한 번 더 토트윈을 건드린다면 절대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말도 꼭 전달해 주세요.”
“……그것도 전하겠습니다.”
저쪽 입장에서는 건방지다고 여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개 뱀파이어가 그들 집단 전체를 상대하겠다는 뜻일 테니까.
하지만, 오늘부로 그들과 협력 관계를 맺은 참이다.
저쪽도 에르제가 이렇게 나온다면, 토트윈을 압박하는 방식은 피할 터.
당분간 그들이 토트윈 쪽으로 생각을 돌리지 못하게 발을 묶어 두는 것이라면, 지금의 경고 한 마디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그럼, 여기서 자리를 파할까요?”
“그러시죠.”
“네!”
에르제의 말에 장진규와 장미영이 동의했고, 오늘의 비밀 회담은 그것으로 일단락되었다.
* * *
며칠 뒤.
토트윈은 겹경사를 맞았다.
하나는 기대했던 대로 음악 방송 1위를 차지한 것이었다.
“이번 주 1위도 토트윈입니다!! 2주 연속, 1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이브님들, 사랑해여!!”
“팬 여러분들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혈기 넘치는 하루 보내시기를.”
간단한 소감과 함께 토트윈은 이후에 참석한 뮤직 큐 외의 음악 방송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처음으로, 메이저인 3곳 음악 방송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 것.
때문에 장 대표는 평소보다 더 호들갑을 떨면서 이윤에게 전화를 했고, 이윤도 돌아가는 차 안에서 오랜만에 잔소리 없이 칭찬만 늘어놓았다.
“단테랑 치우, 둘 다 실력이 많이 늘어서 보기 좋다. 열심히 하더니 결국 성과를 내는구나. 팬들도 요즘 너희 둘에 대해서 좋은 말 많이 하더라.”
“앗, 그래여?!”
“언제까지 리더라는 이름에 숨어서 뒤처질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 그래. 계속 그 마음가짐 유지하고.”
이윤은 차 안에서도 책을 읽는 민주혁과, 쉬지 않고 떠드는 태현우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현우는 확실히 메인 보컬로서 역량을 보여 주고 있으니까 더 할 말은 없고, 주혁이도 마찬가지야. 난이도 높은 춤인데도, 그룹 퍼포먼스를 이끌어 가는 것도 놓치지 않으니 내가 덧붙일 말이 없다.”
그러나 둘은 감사 인사 대신 에르제를 물고 늘어졌다.
“그런데 오늘 은우 화음 틀렸어요!! 반의반음 틀렸어요! 절대음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오늘 안무도 조금 틀렸어. 그것 때문에 내 동선이 틀어져서 겨우 비집고 들어갔다고.”
“음…….”
태현우가 말한 반의반음은 팬들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 같지만, 춤은 조금 문제가 된다.
아마 민주혁이 세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이것도 거의 팬들이 눈치 못 챘을 것 같지만……. 이윤의 입장에서는 다른 문제를 고려해야 했다.
“은우, 혹시 오늘 집중력이 좀 떨어진 거야? 나도 몰랐으니까 팬들 사이에서 딱히 말이 나오진 않을 것 같기는 한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저번에 한 번, 먼 친척이 아팠던 일도 있고 해서 혹시나 또 그런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건 아니고…….”
에르제는 말끝을 흐리다가, 이내 차창에 머리를 콩 하고 박았다.
“왜, 무슨 일인데 그래?”
이윤은 괜히 불안한 눈빛으로 백미러 너머로 에르제를 흘긋 바라보았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에르제는 고개를 젓고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 에르제는 오늘 겹경사로 인해 엄청난 고민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지?’
오늘은 5월 19일.
그리고 5월 20일인 내일은 윤치우의 생일이었다.
에르제는 인간들에게 도대체 어떤 것을 선물로 줘야 하는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인간들 사이에 섞여 살았기 때문에 그들끼리 생일이 되면 필요한 것들을 선물로 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굉장히 오랜 시간을 사는 뱀파이어에게 1년 단위로 돌아오는 생일을 챙기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물려서 뱀파이어가 되는 이들도 있으니까 ‘태어났다’는 의미의 생일을 정하는 것도 애매하고.’
하지만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는 인간들의 세계였다.
다른 멤버들은 분명 선물을 주고받고 할 텐데, 자신만 윤치우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이상하지 않은가.
‘……정산도 받아서 돈도 있는데 말이야.’
1집 활동에 대한 정산금도 들어왔겠다, 선물을 주지 않을 이유가 더욱이 없었다.
“하아.”
에르제가 한숨을 쉬니, 괜히 주변에서 신경을 쓰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너, 혹시?”
그리고 그중 유일하게 태현우만이 에르제의 고민을 눈치챈 듯 가까이 붙었다.
에르제가 500년 만에 인정한 눈치 빠른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곧바로 핵심을 찌르며 작게 속삭였다.
“야, 은우야.”
“?”
“내일 딱히 스케줄 없어서 치우 형 생일 선물 사러 가려고 하거든.”
“……!!”
“같이 갈래?”
태현우의 속삭임에 에르제는 얼른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