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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92화 (92/307)

제92화

92화

에르제는 커플 세트였던 D세트 말고 이번에는 E세트를 주문했다. 다른 이들은 1인분인 A세트를 시켰고.

‘E세트는 가족용 4인분이니까, D세트 2배는 나오겠지.’

“정말 E세트 맞으세요?”

“네.”

“……정말요?”

직원은 몇 번이나 확인을 하고 나갔고, 그러고 나서야 장진규와의 대화를 진행할 수 있었다.

“내 사람이라는 건 여기 있는 장미영 배우님을 말하는 건가요?”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진규가 장미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작품 몇 개 같이한 동료였는데,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아, 네. 네.”

장미영은 얼떨결에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르제는 피식 웃었다.

“이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들었는데, 그렇게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할 필요 없어요.”

“……그렇습니까?”

장진규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장미영을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하찮은 서큐버스가 입도 싸네.”

그의 말에 에르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에르제는 장진규 쪽으로 몸을 가까이 숙였다.

“분명 처음에 말했을 텐데요. 내 사람이라고.”

“…….”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에르제는 약하게 검은 기운을 피워 올렸다.

그곳에서 꿈벅, 하는 움직임과 함께 사람 얼굴만 한 눈알 하나가 장진규에게로 또르륵 굴러갔다.

“대리인이라는 뜻이에요. 장미영 씨가.”

“……아, 알았으니까.”

장진규가 몸을 뒤로 물리며 눈알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저번에 만났을 때 정신 지배를 당한 기억을 떠올린 듯,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뭐, 오늘은 좋은 이야기를 하러 왔으니까 여기까지만 할게요.”

에르제는 힘을 거두며 반쯤 들어 올렸던 엉덩이를 바닥에 다시 붙였다.

오늘은 아이돌로서 만든 자리가 아니었다.

협상도 아니었고, 대등한 관계에서의 외교도 아니었다.

그냥…… 대놓고 ‘감시자를 붙이겠다.’라는 뜻을 내포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자리라고 해야 할까.

그렇기에 일부러 더 강하게 기선 제압을 했고, 에르제는 이쯤이면 알아들었을 거라고 여기고 입을 열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대충 음식도 다 세팅이 되었고, 상 2개에 과할 정도로 가득 놓인 음식을 먹으며 대화가 진행되었다.

“저번에 나에게 그쪽 진영으로 들어오라고 했죠?”

“예.”

“명령을 수행하고 긴밀한 연락 체계를 위해서 고라니 엔터테인먼트에 들어오라고 말하기도 했고요.”

“그랬습니다.”

“흐음.”

에르제는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솔직히 제이를 이용해서 의탁할 곳을 없애고 고라니 엔터로 들어오게끔 일을 꾸민 건 상당히 열 받는 일이긴 한데, 그거야 서로 생각이 다른 거라고 여기고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습니다.”

“……??”

장진규는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에르제를 보았지만, 도토리묵에 잔뜩 정신이 팔려 있는 에르제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쪽 밑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어요. 귀찮게 할 게 뻔해서.”

“……그래서 장미영, 아니 서큐버스를 이 안으로 들여라…… 라는 뜻입니까?”

“네. 제 대리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잠시!”

장진규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렇다는 건 장미영이 온전히 우리 진영에 편입되는 것도 아니고, 그건 서은우 씨 본인도 마찬가지겠죠. 솔직히, 그냥 우리 쪽 정보만 빼 가겠다는 뜻 아닙니까?”

“맞는데요?”

에르제가 장진규를 보며 대답하자, 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뭐 하자는 겁니까, 이게?”

“어떻게든 나와 연결 고리를 만들고 싶은 것처럼 보였는데, 그게 아니었나요?”

에르제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턱을 괴었다.

뱀파이어 쪽은 이미 제이를 움직여서 자신을 어떻게든 포섭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그것도 ‘토트윈을 무너뜨린다’는 생각지도 못한 계획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세게 나가야 해.’

지금처럼 날로 먹겠다는 뜻을 내보이며 밀어붙이면, 저쪽은 분명 ‘동맹’ 혹은 ‘정보 교환’이라는 형태로 이야기를 꺼내 올 것이다.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위치라면, 적어도 며칠 뒤에 다시 만나서 그렇게 하자고 하겠지.’

그리고 그때가 되면, ‘파르만’과 이야기했던 내용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오늘 장진규를 만나자고 했던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에르제는 대충 그들의 행동을 예상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제이를 움직여서 그런 일을 벌인 건 내가 필요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에르제가 아육시에서 있던 이야기를 꺼내자, 장진규가 숨을 삼켰다.

“……잠시, 잠시만요.”

그렇게 말한 장진규는 눈두덩이를 주무르다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제이님이…… 그랬다고요?”

“?”

에르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제이보다 장진규가 진영 내에서 상급자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의 반응을 보아 장진규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한 눈치였다. 방금 제이를 제이‘님’이라 부르기도 했고.

에르제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위에서는…… 그렇게 결정을 내렸던 건가.”

장진규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다, 이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장진규가 대답하며 검지를 위로 세웠다.

“대신, 일방적인 정보 제공은 불가능합니다. 대리인 장미영을 통해서 우호적인 동맹 관계를 맺었다, 정도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흐음.”

장진규는 뱀파이어 진영의 수장이 아니다. 분명 그 위로도 많은 이들이 있을 터.

오늘 자신과 만난다는 이야기도 미리 전했을 테고, 어느 정도 지침을 받아서 이곳에 왔을 것이다.

이쪽에서 장미영을 내세우는 것은 저쪽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동맹을 맺는다’라는 제안은 내부적으로 이미 상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장진규가 윗선에 물어보지도 않고 오늘 바로 단독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느라 에르제가 대답을 하지 않자, 장진규가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정보 교환의 형태를 띠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그쪽도 분명 필연적으로 뱀파리스 X끼……. 아, 죄송합니다. 뱀파리스들과 엮일 테고, 무슨 일이 있다면 서로……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역시, 이렇게 나올 것이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

에르제는 일부러 대답을 바로 하지 않고 잠깐 생각하는 척을 했다.

며칠 걸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바로 미끼를 물어 올 줄이야.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 저쪽은 초조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제이의 일은 장진규가 몰랐던 것 같은데.’

만약…… 그런 거라면 조금 전 장진규가 중얼거렸던 내용으로 보건대, 제이와 장진규를 처음 만났던 날 했던 말은 거짓일 것이다.

‘제이가 장진규보다 위야.’

“쯧.”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에르제는 혀를 찼다.

‘그걸 알았다면 제이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게 더 좋았을 뻔했군.’

하지만 이제는 장진규도, 자신이 그 사실을 눈치챘다는 것쯤은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이도 언제 자신에게 당할지 모르니 중요한 정보들은 봉인을 하거나 지워 둘 테고.

에르제는 아쉬움을 삼키며,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동맹과 정보 교환 모두 받아들일게요.”

“아……!”

장진규가 일단 다행이라는 듯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장미영에게 말했다.

“그럼 너는 오늘 나와 함께 가서 조금 더 이야기를…….”

“너?”

에르제는 그게 아니라는 듯이 장진규에게 말했다.

“내 대리인이라고 말을 했을 텐데요. 서큐버스라고 생각하지 말고, 저를 대한다고 생각해야죠.”

“……아! 그, 그럼 장미영 씨는…….”

“그리고.”

장진규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을 바꾸고 난 뒤, 에르제는 다시금 바로 그의 말을 끊었다.

계속해서 ‘내가 네 위야.’라는 뜻을 공고히 하기 위한, 로드로서 수없이 해 온 외교적 기술이었다.

“정보 교환은 지금 바로 하나 할 것이 있습니다.”

“앗, 혹시 뱀파리스와 관련된 겁니까?”

수기로 기록을 남길 수는 없기에 장진규는 귀를 쫑긋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뱀파이어들에게 뱀파리스의 동향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니 장미영에 관한 것은 뒤로 미룬 듯했다.

그리고 에르제가 하려는 말은 장진규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이야기였다.

“여러 종족들…… 그러니까 드워프, 엘프, 뱀파리스, 늑대인간……. 어쩌면 드래곤까지 최소 하나씩 이곳 지구에 온 것 같아요.”

“……예?!”

장진규는 순간 기함하고 말았다. 겨우 고쳐 앉은 자세가 에르제의 말 하나로 흐트러졌다.

“그게 무슨…….”

“장진규, 당신을 비롯해서 그쪽 뱀파이어 진영의 뱀파이어들은 지구의 역사와 함께하며 새로 탄생한 거겠죠?”

“그…… 럴 겁니다.”

장진규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그는 아주 오래전 에르제가 이곳에 보낸 일족들이 ‘카니발’을 통해 다시 뱀파이어가 되고 그 이후에 새롭게 탄생한 존재일 테니까.

뱀파이어들, 그들 종족에 대한 역사는 알아도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란 뜻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야기는 해야지.’

오늘 장진규를 만나서 이 이야기를 굳이 꺼낸 이유가 있으니까 말이다.

장진규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 그럼…… 그 종족들도 우, 우리들처럼 지구에서 생겨났다는 뜻…… 입니까?”

“아뇨.”

에르제가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카테이아 대륙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지구와는 다른 행성, 혹은 다른 차원이라고 부르면 되겠죠.”

“허…….”

“나도 그 세계에서 온 뱀파이어고, 최근에 그 세계에서 넘어온 드워프 하나를 만났습니다. 은둔을 원했기에 이름은 밝히지 않겠지만, 그래도 다른 종족들이 모종의 이유로 지구에 전송되었다는 사실은 명확해졌죠.”

“잠시만요.”

장진규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여태 말없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장미영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 그럼 서큐버스도…….”

“그것까지는 모르겠네요. 장미영이 그것을 알고 있지도 않고요.”

“……그렇겠죠. 장미영 씨는 제가 서큐버스로 만든 거니까.”

장진규가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최근에 저희 쪽에서 부산 방면에 늑대인간들의 활동이 감지됐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만약 서은우 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 중 하나도 그…… 카테이아란 곳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아마도요.”

솔직히 그들이 꼭 한국에 있으리라는 법도 없었다. 외모로 종족을 구별 지을 수 있는 방법도 없었고.

‘……일부러 인간의 몸에 종족들을 집어넣은 듯하니.’

그렇다면 늑대인간의 시초는 외국에 있을 수도 있고,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장진규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이건…… 위에다 전달을…… 해야 할 내용이겠습니다.”

장진규가 언제 뱀파이어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지구에서 태어난 존재다.

새로운 차원이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결과.

‘적어도 거짓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다행이네.’

만약 그랬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을 해 줬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면 일단 위에 보고를 해 보겠다는 뜻일 수도 있고.’

하지만, 에르제는 애초에 일방적으로 정보만 제공하고 그들의 대답을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그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일단은 가까이에 있는 이놈들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해.’

뱀파리스는 안병인, 라하임은 윤소희 그리고 마지막으로 뱀파이어는 장미영.

그러나 장미영은 단독으로 이들 진영에 자신의 대리인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안병인이나 윤소희와는 조금 다른 입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확실하게 해 둬야지.’

이들이 아직도 자신에게 우호적인지, 정말로 동맹 관계를 맺을 생각인지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다른 차원…… 드래곤……. 하, 소설 속에나 나오는 것인 줄 알았는데.”

에르제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장진규에게 테이블을 돌아서 다가갔다.

“……?”

밥 먹다 말고 왜 자신의 옆으로 왔지? 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장진규를 에르제는 가볍게 손을 뻗어서 그의 이마를 붙잡았다.

“자, 잠시, 또 그, 그겁니까?”

“정신 지배는 아니고.”

비슷한 상황에 대한 트라우마라도 생겼는지 장진규는 버둥댔지만, 에르제의 악력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에르제는 싱긋 웃었다.

“방금 들은 얘기, 그거 기억 좀 다시 지워 두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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