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91화
[ 허억, 헉, 죽겠어요. ]
[ 그러니까 내가 등산 다니자고 할 때, 같이 가자니까. ]
- ㅋㅋㅋㅋ 원형 님은 평소 등산 자주 다니는 듯? 박장호 죽으려고 하는데?
┖ 그래도 개그맨 후배라고 챙겨 주시네. ㅋㅋ
- 근데 그 와중에 서은우 표정 하나 안 변하는 것 보소;;
┖ 아이돌이잖아
┖ 아이돌은 뭐 철인이냐? 뭔 뜻이야?
┖ 평소 춤 연습이랑 그런 거 때문에 체력으로는 웬만한 사람들 다 씹어 먹지 않나?
┖ 그럴듯.
- 근데 좀 짠하다; 은우가 체력이 좋다고 해도, 저렇게 짐까지 다 짊어지고 ㅠㅠ 다른 사람 짐까지 들고 있잖아.
┖ 막내니까 당연한 거. ^^
┖ 꼭 이딴 식으로 말하는 인간들 있을 줄 알았음.
┖ 근데 땀 한 방울도 안 나는 건 좀……. 신기하다기보다는 이상하네. 에베레스트 올라갈 때도 땀나지 않아?
┖ 에베레스트랑 저런 산이랑 같냐. ㅋㅋㅋㅋ
영상의 첫 시작은 높이 솟은 산의 전경과, 그 안을 뚫고 올라가는 사람들의 행렬이었다.
동네에 있을 법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문제는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험지에다 곳곳에 튀어나온 나뭇가지를 보고 몇몇 시청자들은 ‘제작진이 제정신이냐’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리얼리티에 대한 갈증이 심한 만큼, 1화와 2화를 보지 않았던 사람들도 생생한 현장의 모습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반응은 진짜 산속에 위치한 오두막과 대장간이 나왔을 때 더욱 격화되었다.
- 와, 저기 나도 한번 가 보고 싶다. 공터도 엄청 넓네. 직접 다 미신 건가?
- ㅋㅋㅋㅋ 황구. 이름이 어떻게 황구야? ㅋㅋㅋㅋ
┖ ㅈㄴ 잘 어울렼ㅋㅋㅋ
- 나는 은거 노인 상상했는데……. 생각보다 젊네; 근육도 나이에 비해 엄청나고…….
잠깐의 휴식 시간 이후, 본격적인 예능이 시작되고 나서는 실시간으로 시청자가 늘어나면서 반응은 더욱 뜨거워졌다.
[ 제가 할게요. ]
서은우를 밀치고 들어오는 박장호와.
[ 악!! ]
자신 있게 나선 박장호가 손을 부여잡았고, 그에 대비되게 깔끔하게 망치를 내리치는 장미영의 모습.
- ㅋㅋㅋㅋㅋ 아이고, 장호얔ㅋㅋㅋㅋㅋ
┖ ㅋㅋㅋㅋ 맨날 나대더니 내 저럴 줄 알았음.
그저 그 상황이 웃겨서 죽겠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토트윈의 열성 팬들과 실시간으로 영상을 보고 있던 세리나는 아니었다.
“저 새끼가.”
박장호의 행동은 명백히 로드를 무시하는 행위였다.
뒤로 밀려나고 당황한 표정을 보라! 분명 저 눈은 박장호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후우, 로드가 인간들에게 우호적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이야.”
세리나는 며칠 전 집에서 감명 깊게 보았던 사극 말투를 흉내 내며 공격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무튜브 실시간 댓글창에는 벌써 이브들이 활발하게 활동 중이었다.
“질 수 없지.”
세리나도 소매를 걷어붙였다.
- 박장호, 저 X끼 지금 뭐 하는 거임? 우리 서은우 님 민 거임? 진짜 서은우 님이 착해서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진작 싸움 났어. 이거.
┖ 헉, 귀하신 분이 이런 누추한 곳을 찾아오시다니. 요즘 은우 사진은 따로 올리시지 않나요? ㅠㅠ
┖ 이브들아!! 행동 대장님 오셨다!!!
그녀의 열렬한 추종자들이 따라붙었다.
‘로드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위협에 노출될 일 없도록 하라고 하셨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결계 안에서 안전하게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천년만년 아이돌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세리나는 예전 뱀파이어였을 때의 능력을 살리고 있었다.
로드인 에르제가 일족들 하나하나를 신경 쓰지는 못하기에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으실 테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자신의 예술적인 감각을 사진 보정에 써먹을 수 있고, 그것이 프로젝트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그녀의 추종자들은 그녀의 SNS를 비롯한 서은우 보정 사진들을 가져가는 훌륭한 이브들이었다.
원래였다면 알바 몬스터 3화를 보면서 건질 것 없나 확인하고 있었는데, 박장호의 행동은 도를 넘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 이건 아니지 않나요, 여러분? 그렇게 자신 있게 나섰으면 잘하기라도 하던지! 솔직히 서은우 님이 했으면 무조건 저 팀이 이겼을 거예요!
┖ 맞아요. ㅠ 진짜 짜증……. 하필 저런 애랑 같은 팀이 되어 가지고, 산속으로 나무나 하러 가고. ㅠㅠ
┖ 등산할 때도 다른 사람들 짐 맡아서 들고 가 주더니. ㅠㅠ 우리 은우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역시 로드의 진면목을 알아주는 사람들은 이브들밖에 없었다.
이렇게 한 사람을 위해 같이 기뻐해 주고 같이 화를 내 주는 사람들이 있을 줄이야.
‘……이 사람들도 우리 일족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세리나는 팬들의 댓글을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과거의 로드는 일족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주던 뱀파이어였다.
작은 마을에도 관심을 쏟아 주었고, 그냥 동네 꼬맹이였던 자신을 이렇게 시간이 지난 뒤에도…… 게다가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기억해 주었다. 이름까지.
“…….”
완전 기억 능력은 만능이 아니었다.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니까.
그러니까…… 에르제에게도, 로드에게도 아주 조그만 마을의 어린 꼬맹이 뱀파이어가 기억할 만한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뜻이었다.
‘저번에는 목숨도 살려 주셨지.’
위험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안위를 챙기기보다 일단 죽어 가는 자신을 살리고 보지 않았던가.
진심으로 충성을 하게 만들었던 뱀파이어로서의 행적처럼 ‘서은우’가 되어 아이돌을 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에르제는 팬들을 아꼈고, 늘 진심으로 대했다.
팬사인회에서의 모습만 봐도, 그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이브들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서은우를 위해서 이렇게 화를 내는 거겠지.’
영상으로는 단순히 밀치고 나댄 것뿐이지만, 그런 사소한 일에도 팬들은 그를 위해 가장 귀한 ‘시간’과 ‘감정’을 내어준다.
‘……마치 일족들처럼.’
예전에는 그저 내리사랑이었다면, 이곳에 와서는 아니었다.
서로 주고받는 관계.
그저 일족들의 품 안에서 로드의 사랑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과거와는 달라졌다.
인간으로서 겪어 온 세월이 합쳐졌기에 깨닫게 된 부분.
‘이게…… 이상적인 관계야.’
아무리 부모와 자식 사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주고받는 관계가 되어야만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더욱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세리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냥 지금은…… 에르제의 일족이 아니라, 이브이기에 행복했다.
‘그리고 나도 로드를 위해서 내 시간을 내줄 수 있으니까.’
어느덧 영상에서는 이브들이라면 ‘입틀막’을 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 캉! 캉! 캉! ]
[ 온도는? 괜찮습니까? ]
[ 지속적으로 조정하고 있수. 지금! ]
황구와 에르제가 협업을 하는 장면이었는데, 어느 순간 에르제가 윗옷을 벗어 버렸기 때문이다.
- ㅁㅊㅁㅊㅁㅊㅁㅊㅁㅊㅊㅊㅁㅊㅁㅊㄷ
┖ 와……. 불 때문에 붉은색으로 보이는데, 미쳐!
- 아이돌들 무대 의상이나 콘셉트 때문에 상탈 하는 건 봤어도…… 망치질하느라 상탈하는 건 첨 보네…….
┖ 그래서 그런가? 묘하게 빠져듦;;
- 토트윈이 누군지도 몰랐는데, 오늘부터 일단 팬 하기로 함. 그래서 저분 성함이 뭐라고요?
┖ 서은우. 예명 에르제, 달빛좌, 중2병 감성 탑재, 팬 서비스의 신. 어서 오세요, 선생님. 환영합니다.
- (눈알 튀어나오는 이모티콘)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댓글창이 한바탕 난리가 났다.
기존에는 고작 10퍼센트를 차지할까 말까 했던 실시간 댓글창이 지금은 이 세상에 온통 이브들밖에 없다는 듯이 많은 댓글로 가득했다.
하지만 세리나는 한가하게 댓글이나 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곧장 스샷을 찍고 본인의 카메라로도 남기는 등 온갖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에르제를 위해서 그리고 일족, 아니 이브들을 위해서.
화르륵!!
불길이 내부를 감싸듯 피어오르고, 온전히 한 지점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남겨야 했다.
산을 오를 때에도 보여 주지 않았던 땀방울이 순식간에 열기로 인해 흐르는 도중에 말라 버린다.
‘45장.’
이 중에서 과연 몇 장이나 훌륭한 작품으로 탄생할까.
‘제발 45장 전부 건질 수 있기를.’
세리나는 방송 장면이 다음 날 아침으로 넘어가고 나서야, 컴퓨터에서 손을 떼고 빠르게 손바닥을 비볐다.
손 사이에서 마찰되는 열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일, 아니 오늘 끝낸다.’
로드를 위해서.
세리나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영상을 왼쪽 상단에 작게 띄워 둔 채, 곧장 사진 보정 작업에 착수했다.
* * *
알바 몬스터 3화의 방송과 실시간 반응을 모니터링한 다음 날.
에르제는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문제를 위해 새벽부터 숙소 밖으로 나왔다.
그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장진규에 관한 일이었다.
장소는 에르제가 예약했는데 저번에 안병인과 윤소희랑 셋이 만났던, 비밀 이야기를 하기 좋은 곳이었다.
‘장미영까지 있으니까.’
장진규와 둘이 만나는 거라면, 둘의 친분이 언제 생겼나 정도의 기삿거리에 불과하겠지만.
장미영까지 셋이서 만난다면, 사람이 늘어난 만큼 관심도도 더욱 높아질 테니 말이다.
드르륵-.
에르제는 도착하자마자 서은우로 예약된 방문을 망설임 없이 열고 들어가 앉았다.
“아! 오셨어요?”
장미영이 제일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장진규는 아직 안 온 듯했다.
에르제는 좌석을 고민하다가 장미영의 옆에 앉았다.
아무래도 이쪽이 같은 팀이니까 그게 맞는 것 같아서였다.
“퀸님, 퀸님.”
자리에 앉자마자 장미영이 바로 말을 걸어왔다.
“말씀해 주신 대로만 하면 되는 거지요?”
“응. 중요한 얘기는 내가 할 거니까 너는 대화에 적절히 끼어들면 돼.”
에르제는 그렇게 말하고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분 남았네.”
“설마 퀸님을 기다리게 하는 건 아니겠지요!”
“이따가 퀸님이라고 부르는 건 절대 안 돼. 알지? 로드도 마찬가지고.”
“알고 있어요!”
장미영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것 말고도 다른 주의 사항을 혹시 몰라서 한 번 더 읊어 주고 있으니까 이내 에르제와 만나기로 한 인물이 룸으로 들어왔다.
“하아아암.”
장진규는 길게 하품을 하면서 들어왔다. 에르제의 요청대로 제이를 끌고 오지는 않았다.
‘상급자도 아니고 하급자를 데려와서는 의미가 없으니까.’
장진규는 자리에 털썩 앉더니 하품을 또 하며 말했다.
“왜 새벽부터 보자고 하는 겁니까?”
“뱀파이어들에게는 좋은 시간일 텐데요?”
“이래 보여도 인간 세상에 꽤나 적응을 한 몸이라서.”
장진규는 양팔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굳이 새벽 6시 30분부터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서은우 씨가 주요 관심 대상이라서 나온 거지, 아니면 이런 식의 만남은 얄짤 없어요.”
장진규가 상체를 숙이며 말하자, 에르제가 스마트폰에 적어 둔 다음 일정을 보여 주었다.
“1시간 30분 뒤에 오전 춤 연습이 있어요.”
“……아하.”
“이래 보여도 인간 세상에서 꽤나 유명해진 아이돌이라서. 연습을 쉴 수가 없어요.”
에르제가 장진규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자, 장진규가 껄껄 웃었다.
장진규는 미리 준비되어 있던 컵을 인원수에 맞게 세팅하며 물을 따랐다.
그리고 물잔 하나를 에르제에게 쓱 밀었다.
“그래서 오늘 보자고 한 이유는?”
에르제가 장미영을 가리키며, 오늘 만남의 이유를 정면에서 꺼내 들었다.
“그쪽에 내 사람 하나를 심어 놓을까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