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90화
셋은 어둑어둑해질 때쯤이 되어서야 산속을 내려왔다.
촬영 팀은 가지고 온 조명을 켜서 오두막이 있는 공터를 밝혀 놓았는데, 박장호와 에르제를 기다리면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어! 여기요, 여기!”
장미영이 에르제를 발견하고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박장호는 자신에게 하는 걸로 착각하고 마주 손을 흔들어 주려 했으나, 도끼질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팔을 들어 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윽.”
“거, 무리하지 마슈.”
황구는 그런 박장호를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보며 등을 두들겨 주었다.
“끄악……!!”
벌써 근육통이 온 건지 등을 두들기는 것에도 박장호가 발작을 일으킨다. 그 모습도 카메라에 아주 잘 담기는 중이었다.
‘인과응보다.’
에르제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장미영의 옆에 앉았다.
“뭐예요? 냄새가 좋네.”
“바비큐예요.”
“바비큐?”
바비큐…….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다. 실제로 사진으로 본 적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태 지구에 와서 먹은 것 중에서는 삼겹살이 최고였는데.’
살짝 피 맛이 나는 것이 에르제의 입맛에 아주 딱이었다.
다음 날에 “너, 속 괜찮아?”라고 물어보던 멤버들의 반응은 이해가 잘 가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그날 많이 먹어서 그렇게 물어본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냄새는 더 좋은데?’
바비큐라고 불리는 음식은 원래의 세계에서 본 ‘통구이’와 비슷한 형태였다.
통구이는 꼬챙이에 커다란 동물의 고기를 꿰어 장작 위에서 살살 돌려 가며 굽는 형식인데, 이곳에선 숯을 이용해 철판 위에 고기를 올려 굽는 중이었다.
그것도 통으로 굽는 것이 아니라 삼겹살처럼 꽤나 잘게 썰어 둔 형태로.
에르제는 불에 서서히 익어 가는 고기를 보며 배를 살살 문질렀다.
거의 매일 풀만 먹고 사는 아이돌에게 이렇게 육류를 섭취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에르제의 손에 들려 있는 젓가락이 춤을 췄다.
“푸흡.”
장미영이 그런 에르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바비큐, 좋아하시나 봐요?”
“처음 먹어 봐요.”
“……네?”
장미영이 놀란 눈을 하며 되물었으나, 에르제의 정신은 온통 바비큐에 가 있었다.
“다 구워졌어요~. 편하게 드시면 됩니다.”
그래도 신체적으로 힘든 일을 했다고 다른 예능처럼 복불복이니 뭐니 이상한 걸 시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달빛과 피의 가호가 그대에게 함께하기를.’
에르제는 짧게 PD에게 내적 감사를 보내 주며, 젓가락을 움직였다.
샥, 샥, 샥, 샥.
다른 사람들이 한 개 먹을 때, 에르제의 입속에서는 네 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심지어는 다 익지도 않은 것들도 에르제의 위장으로 떨어졌다.
“와…….”
장미영은 젓가락을 입술에 붙인 채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식신 들리셨네.”
“으음.”
맛있다.
삼겹살보다 조금 위, 에르제는 바비큐를 그 정도로 평가했다.
“바비큐, 최고.”
에르제는 먹는 모습을 찍고 있는 카메라에 따봉을 날렸다. 입에 가득 바비큐를 물고 말하는데도 발음이 정확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샥!
박장호가 익기만을 기다리던 갈빗대도 에르제의 차지가 되었다.
“저기요!!”
박장호가 당황해서 손을 뻗었으나, 에르제는 갈빗대를 입에 문 채 ‘?’ 하는 표정으로 바라볼 뿐.
“……아오.”
먹는 거 가지고 뭐라 하기에는 카메라가 많아서 박장호는 허망하게 뻗은 손을 다시 내렸다.
‘그냥 먹다 보니 손이 여기까지 왔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 모양이다.
“아이고, 소속사에서 고기 안 준다고 하더니…… 서은우 씨 보니까 진짜인가 보네.”
임 PD가 껄껄 웃으며, 와구와구 먹고 있는 에르제에게 말했다.
“사장님, 나빠요.”
에르제가 카메라를 보며 엄지를 아래로 내리고 우우, 하는 포즈를 취해 주었다.
“컥.”
박장호는 사레가 들렸고, 주변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렇게 에르제에게 최고의 만찬 시간이 끝이 나고, 다른 출연자들이 휴식 시간을 취하고 있을 때.
에르제는 황구를 따라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장검을 만들 거요. 이미 대부분의 작업은 끝났고, 단련만 도와주면 됩니다.”
“흠.”
에르제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할 게 있다며 황구가 데리고 온 스태프는 열기 가득한 대장간 끝에서 카메라 세팅을 한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뭐 하시려고…….”
이번에는 황구 대신 에르제가 나섰다.
“단련을 할 거예요. 아까 낮에 보셨던 것처럼 망치로 금속을 두드리는 작업인데, 품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작업이에요.”
“아아……?”
고개를 끄덕이던 스태프가 이내 아이돌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구와 에르제는 급속도로 집중 상태에 빠져들었다.
황구는 에르제가 두들기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에르제는 오랜만에 손에 쥔 망치의 감촉을 느끼며 아래로 힘껏 내리쳤다.
카아아앙-!! 카아앙!!
새빨갛게 달궈진 금속이 겁나지도 않은지 에르제는 그동안 쌓아 왔던 경험을 여실히 드러냈다.
자세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고, 이내 대장간 안은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20분 정도 지났을까.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모습임에도 구경꾼들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출연진 몇몇이었는데, 캉캉거리는 소리 때문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에르제의 작업을 구경했다.
‘뭐야?’
‘아이돌이잖아. 황구, 저 사람은 왜 그냥 보고만 있어?’
‘몰라. 가르쳐 주는 건가?’
‘우리는 왜 안 가르쳐 주는데?’
그렇게 멀리 떨어진 채 속닥속닥했지만, 에르제와 황구의 집중력을 깨뜨리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워.’
에르제는 주변에 누가 있는지도 잊은 채 작업에 몰두해 있었다.
이 안의 모든 것들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덥다.’
유일한 잡념이었다.
그래서 에르제는 가장 겉에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옆에 던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해결될 리가 없었다.
‘헙.’
‘미친.’
에르제는 상의를 흰색 면티 하나만 빼고, 모조리 벗어 던졌다.
보고 있던 사람들이 입을 막은 채 소리를 죽였다.
마른 듯 보였으나 있을 근육은 다 있는 상체에다 망치를 위로 쭉 들어 올릴 때마다 팔 근육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땀 때문에 면티가 꽉 달라붙었지만, 움직이는 데에 제약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후읍.”
카아아앙-!!
바비큐 먹은 값을 토해 내듯이,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며 번쩍번쩍 빛이 났다.
어느덧 황구도 자신의 역할을 에르제의 옆에서 하기 시작했다.
1시간, 2시간…….
둘은 구경꾼들이 자러 간 뒤에도 그리고 새벽에 다시 일어난 뒤에도 작업을 쉬지 않았다.
* * *
“끝났어요.”
에르제는 카메라를 둔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스태프를 깨웠다.
거의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작업을 대략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다음 날 돌아가야 하는 입장이라서 최대한 해 두려고 한 탓에 그만 밤을 꼬박 새웠다.
뱀파이어인 에르제는 체력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었으나, 스태프는 아니었다.
망치 소리에 새벽 내내 깼다 자기를 반복하다가 겨우 30분 눈을 붙인 상태였다.
“으…… 음.”
스태프는 눈을 비비며 황구와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끝난…… 겁니까?”
“네. 잘 찍혔나요?”
에르제가 미소를 지으며 묻자, 스태프는 카메라가 아직 잘 돌아가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다행히 테이프가 나가지는 않았네요. 저는…… 조금만 더 자겠습니다.”
스태프는 끝났다는 말에 카메라를 챙겨 조금이라도 자기 위해 공터에 쳐진 텐트로 향했다.
대장간 안에 아무도 남지 않자, 황구가 입을 열었다.
“스승님이 왜 당신에게 그런 부탁을 하라고 했는지 알겠수.”
그리고 에르제도 마찬가지로 그 이유를 깨달았다.
스승이 드워프이고, 제자가 인간이기에 생기는 문제점이었다.
인간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인간의 기술이 필요했다.
드워프로 살아온 파르만은 알지 못하는 것들. 그것을 에르제에게서 찾아내려 한 것이다.
‘밑천을 털린 기분이기는 한데.’
어차피 자신은 지구의 대장장이가 아니었다.
세계 최고의 아이돌이 될 몸이지.
아마 파르만은 황구에게 들은 이야기……. 아니, 아니다.
에르제는 슬쩍 대장간 뒤편을 바라보았다.
‘저기서 보고 있었으려나.’
인간들에게서 몸을 숨긴 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내게 털어 간 밑천으로 새로운 제자를 들일 때 써먹겠단 이야기겠지.’
그리고 아마 본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대장장이로서 빚을 졌다는 사실을.
‘나중에 도움이 필요할 때 한번 써먹을 수 있겠지.’
황구의 핸드폰 번호를 받아 갈 예정이었으니 연락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뭐, 그냥 플랑을 살려 준 목숨값으로 퉁쳐도 상관없고.’
황구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에르제에게 악수를 청했다.
“덕분에 머리가 좀 맑아진 기분이요. 스승 대신 감사 인사를 해도 괜찮겠수?”
“물론이에요.”
에르제가 대답하자, 황구가 창고 비슷한 곳으로 향하더니 아주 작은 단검 하나를 가지고 왔다.
“내가 만든 건 아니고 스승님이 만드신 건데, 의식용 단검이라 하더이다.”
“의식용?”
“뭐 그렇다고는 하는데, 날은 무지하게 잘 들어서.”
에르제는 황구에게서 단검을 받아 들었다.
손잡이와 덮개는 황금을 씌웠는지 금빛이었고, 어디서 구했는지 붉은색 보석이 손잡이 중앙에 박혀 있었다.
“아름답네요.”
“스승님이 미관도 신경 많이 썼수.”
그런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손잡이에 음각되어 있는 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
음각은 카테이아 대륙의 언어였는데, 그것을 읽은 에르제는 하마터면 단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라…… 하임.’
음각은 제 주인의 이름을 새겨 놓았는지, 라하임이라는 익숙한 이름이 박혀 있었다.
‘……파르만은 내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플랑으로 인해 자신이 찾아왔을 때부터 자신의 정체는 들킨 뒤였다.
뱀파이어 로드라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파르만이 이곳에 온 것은 700년 전.
플랑도 몇백 년 전에 라하임을 조선 시대 때 만났다고 했으니, 파르만과 라하임이 만나지 못했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아까 얘기했을 때는 다른 종족은 못 봤다고 해 놓고……. 영악한 드워프 같으니.’
아마 대장일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의식용 단검의 존재는 영영 감춰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럼…… 만약 그때 라하임을 만나서 녀석이 의식용 단검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거였다면?’
윤소희가 말했던 의식과 재가 되어 버린 의식 문서……. 그리고 이 단검까지.
‘녀석이 이곳으로 나를 불러내려고 한 건 확실한데.’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것인가.
그것도 몇백 년 전에 이런 의식용 단검까지 만들어서 자신을 불러낼 의식을 진행했을 녀석이 말이다.
‘……설마 영면이라도 들어 있는 건가.’
그래서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지금 시기에는 라하임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는 건가?
에르제는 단검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품에 집어넣었다.
‘이것도 장미영과 함께, 뱀파이어 쪽에 보내서 주인을 찾아달라고 부탁해 봐야겠어.’
만약 영면에 든 것도 아니면서 자신을 찾아오지 않고 있다면, 라하임을 낚는 미끼로 충분한 가치가 있을 터였다.
“고마워요.”
에르제는 황구에게 단검을 내어준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그대로 대장간 밖으로 나갔다.
아직 텐트 안에서 자고 있는 이들도 있는 듯했지만, 몇몇 출연진과 스태프 대부분은 일어나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아침 산속이라 좀 쌀쌀하네.’
에르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멍한 표정의 장미영에게로 걸어갔다.
장진규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장미영은 에르제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잠깐만요. 옷! 옷부터!”
“?”
그제야 에르제는 자신이 흰티 하나만 입고 있던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평소보다 춥더라.
에르제는 장미영이 아무거나 던지는 옷을 입고는 머쓱하게 웃었다.
“아하하.”
“웃지 마요! 방송에 나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고 며칠 뒤.
‘알바 몬스터’의 3화가 TV에 방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