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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89화 (89/307)
  • 제89화

    89화

    문외한이 보더라도 승리는 당연히 장미영의 것이었다.

    ‘힘도 사용했네.’

    여러 종족들 사이에서 약체로 취급되는 서큐버스라고 하더라도, 완력은 인간보다 강한 편이다.

    그렇기에 정확한 지점을 강한 힘으로 내려친 장미영이 좋은 소리를 냈음은 틀림없었다.

    “큼, 이쪽이 이겼수.”

    황구는 에르제를 짧게만 바라보고, 헛기침을 하며 장미영의 손을 들어 주었다.

    “꺄! 이겼어요!!”

    장미영이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정원형, 양태구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반대로 박장호의 표정은 아주 볼만하게 변했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마음이 있는 장미영에게 졌다는 사실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이다.

    “자, 잘했어요.”

    강보라가 억지로 토닥여 주었지만, 박장호는 말없이 뒤로 물러나서 고개를 푹 숙였다.

    “곤란하네요.”

    에르제는 그런 박장호에게 작게 말했다.

    “양보까지 해 드렸는데.”

    “……너…….”

    박장호가 에르제를 몰래 노려보았다. 부끄러움 밑에 감춰진 분노가 느껴졌다.

    그러나 에르제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저희가 말을 놓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나요?”

    까득.

    카메라가 있어서 더 이상 뭐라 하지는 못하고, 고개를 휙 돌려 버린다.

    ‘속 좁기는.’

    에르제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연적……. 뭐 좋다. 그렇게 오해하는 것까지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고 자기 멋대로 구는 것은 곤란했다.

    앞으로도 같이 촬영을 해야 하는 사이인데.

    하지만 자신은 나름대로 인간과 많이 섞여 살아 본 사람이다.

    카테이아 대륙이나 지구라는 곳이나 인간들의 습성과 본능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확인했다.

    ‘아예 매혹을 거는 방법도 있기는 한데.’

    박장호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해서 자신을 좋아하게 되어도 썩 기분이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인간들은 다른 곳에서도 똑같으니까.’

    개그맨, 그것도 연차가 꽤 된 개그맨이라더라. 거기에 서른 살 정도 되었다고 했으니.

    ‘그럼 후배들도 많을 테고…….’

    뉴스에서 간간이 보았던 개그맨 관련 사건들이 박장호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개그맨은 선후배의 군기가 세다고 들었는데, 박장호와 같은 인간이 과연 가만히 있었을까.

    지금도 방송 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천지 분간 못 하는 어린아이처럼 굴고 있는데.

    그렇기에 박장호와 깊이 엮이는 일 자체를 피하고 싶었다.

    저번에 김지원 때도 그러지 않았나.

    학폭을 저지른 것은 완전히 다른 그룹의 멤버였으나, 모카 엔터테인먼트라는 교집합 때문에 토트윈 전체가 학폭과 관련된 논란에 시달렸으니까.

    - 박장호가 서은우랑 친하다던데, 서은우도 후배 아이돌 만나면 갑질 하는 거 아님? 백펀데. 끼리끼리 논다잖아.

    대충 어떤 댓글들이 달릴지 눈에 선했다.

    ‘그렇다고 정신 지배를 할 수도 없고.’

    인간의 약한 정신 체계에 정신 지배를 감행했다가는 그대로 이지가 망가질 것이다.

    강한 멘탈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면 모를까, 고작 이 정도에 휘둘리는 박장호라면 더더욱.

    “쯧.”

    에르제는 구석에서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있는 박장호를 바라보았다.

    황구가 승리한 팀에게 하기 쉬운 작업을 말해 주는 걸 아주 아니꼽게 보는 모양이다.

    ‘어떻게 할까.’

    이럴 때는 신체적으로 고통을 줘서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만드는 게 최고인데.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기회가 금방 찾아왔다.

    황구가 에르제와 박장호, 둘만 따로 부른 것이다.

    “어차피 저짝 팀은 내가 없어도 괜찮을 것 같고. 우리 셋은 산으로 들어갈 거요. 강보라 씨에게는 힘든 일이라 저짝 도와주라고 하고.”

    “산이요? 왜요?”

    박장호가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황구가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턱짓으로 나무들이 쌓여 있는 곳을 가리켰다.

    “밤에 추워지기 전에 나무를 좀 해 놔야 하니까. 인원이 많아서 불을 좀 많이 지펴야지. 얼어 죽기 싫으면 해야 할 거요.”

    박장호의 태도 때문인지 황구의 입에서도 그리 좋게 말이 나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 렇군요.”

    그제야 박장호가 정신을 조금 차렸는지, 카메라 쪽을 흘긋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시죠!”

    그러고는 열의 넘치는 척, 아자아자! 모드로 돌변했다.

    ‘너무 늦은 거 아니냐.’

    이미 그 전 모습이 다 찍혔을 텐데. 편집이야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만.

    에르제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자, 황구가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짝이랑 할 말도 있고.”

    “?”

    에르제는 그 말만 남기고 도끼를 인 채 밖으로 나가는 황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 * *

    황구, 에르제 그리고 박장호, 이렇게 세 사람은 고요한 산속으로 들어갔다. 물론 촬영을 위해서 촬영 팀 몇몇도 카메라를 들고 따라왔다.

    오늘, 내일 열심히 찍어 주겠다고 말했던 카메라맨도 포함돼 있었다.

    다행히 나무하는 곳이 그리 멀지는 않은지 촬영 팀이 지치기 전에 도착했는데, 해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어서 그런지 아까보다 기온이 쌀쌀해졌다.

    촬영 팀은 배낭에서 혹시 몰라서 가져온 패딩을 꺼내고 에르제와 박장호에게 내밀었는데, 이를 황구가 저지했다.

    “어차피 나무하다 보면 땀납니다. 움직이는 데도 불편하고.”

    “아아, 네.”

    머쓱한 얼굴로 다시 패딩을 회수해 가자, 박장호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나야 추위를 잘 못 느끼지만……. 인간들은 힘들 수도 있겠네.’

    뱀파이어는 열에 대한 내성이 있기에 낮은 온도에 크게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들이 추위를 느끼는 때는 오히려 몸에서 피가 대량으로 빠져나갔을 때뿐.

    ‘세리나를 살렸을 때처럼.’

    이런 상황에서는 딱히 불편할 게 없다.

    그때의 기억을 잠깐 떠올리고 있으니, 황구가 돌아다니며 나무 여기저기를 도끼로 한 번씩 찍었다.

    파삭! 카드득!

    햇빛도 많이 들지 않아 어두운 산속이라 괜히 소름이 돋는 소리였다.

    “…….”

    특히나 박장호는 겁이 많은지, 본인이 에르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잊고 뒤에 슬그머니 숨기까지 했다.

    “……앗.”

    에르제가 발을 쓱 옮겨서 옆으로 비켜서자, 박장호가 앓는 소리를 냈다.

    곧 황구가 나무들을 다시 한번 살피고는 박장호에게만 도끼를 내밀었다.

    “대충 찍어야 할 곳은 파 뒀으니까 절반까지만 패면 될 거요. 나머지는 내가 혼자 할 테니까. 괜히 나무 애먼 곳으로 쓰러뜨려서 다치지 말고.”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저만……?”

    박장호가 도끼를 받아 들고 에르제를 슬쩍 보자, 황구가 대신 대답했다.

    “나는 이짝이랑 조금 더 들어가서 할 거요. 여기 있는 건 그짝 할당량이니까 여기도 할당량 만들어 줘야지.”

    “아아.”

    의심이 사라진 박장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태프 2명이 에르제 쪽으로 붙었다.

    “저희가 따라갈게요.”

    그러나 황구가 곧장 앞을 막아섰다.

    “아니, 둘만 갈 거요.”

    “네? 하지만 촬영…….”

    “금방 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리슈.”

    일단 이곳의 주인은 황구다. 촬영 허가 없이 막무가내로 찍어 댈 수는 없었다.

    “금방 오신다고 했어요.”

    같이 따라온 여자 작가가 확인하듯 말했고, 황구가 씩 웃었다.

    “걱정 말고, 저 사람 사고 안 치게 감시하슈. 나무는 팬 쪽으로 쓰러지니까 눈 똑바로 뜨고들 계시고.”

    꿀꺽, 침을 삼키는 스태프들을 뒤로하고 황구는 박장호가 작업을 시작하길 잠시 기다렸다.

    곧 울상을 지으며 두꺼운 나무에 도끼질을 하는 박장호를 확인한 다음, 황구는 에르제를 끌고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는 도중 에르제가 입을 열었다.

    “박장호가 나무를 절반이나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도 5그루를?”

    황구가 옅게 패 둔 나무는 총 다섯 그루.

    대장일은 물론이고 목수 일까지 해 본 에르제는 박장호가 절대 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구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당연히 안 되지. 그냥 시간이나 끌려고 한 거요.”

    황구는 이쯤이면 됐나, 하는 자리에 서서 에르제에게 도끼를 내밀었다.

    “나무도 좀 하시나?”

    “어느 정도는?”

    에르제가 어깨를 으쓱하자, 황구가 심호흡을 하고는 본론을 꺼냈다.

    “아까 스승한테 가는 거 봤수.”

    “……!”

    “그리고 며칠 전에 온…… 그 경호원을 사칭하는 양반도 봤고.”

    플랑 이야기인가.

    갑작스럽게 흐르는 대화의 흐름에 에르제가 입을 다물고 있자, 황구가 말했다.

    “스승이 나이를 먹지 않는 것도,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수. 뭐, 귀신인지 뭐시긴지는 모르겠지만……. 그 경호원 양반이랑 스승이랑 싸우는 모습을 봤는데, 아주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니까. 아까 왔을 때 봤수? 원래 그렇게 넓은 공터가 아니었다면 믿을 수 있겠수?”

    “…….”

    에르제는 미간을 좁혔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죠?”

    “뭐, 아까 스승을 찾아가는 걸 보고 대충 눈치를 챘단 말이요. 경호원 양반이랑 아는 사이구나 하고. 그러고 꽤 오래 시간이 지나서 돌아왔잖수.”

    황구가 에르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쪽도 혹시 인간이 아닌 거요? 스승이랑은? 대장일 이야기를 하다 온 거요?”

    황구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산속이어도 전파가 터지는 건지 ‘스승님’이라고 저장된 이에게 온 메시지가 화면에 떠 있었다.

    [ 서은우라는 사람한테, 대장일을 같이하자고 하거라. 배우는 것이 있을 것이다. ]

    내용을 읽은 에르제가 헛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눈치챈 거지?’

    자신이 대장일을 꽤 오래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궁중 요리사로 활동을 했던 것처럼 인간 세계 최고의 대장장이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실력이 그리 미천하지도 않았다.

    어지간한 대회에 나가면 충분히 우승할 수 있었을 정도?

    ‘드워프라서 알아본 건가?’

    그들은 ‘불의 마음’을 읽는다고 들었는데, 그게 뜬소문인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다.

    대장장이와는 거리가 한참은 먼 서은우의 몸을 보고도 그것을 알아차리는 걸 보니 말이다.

    ‘……그리고 인외의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말이겠지.’

    파르만은 황구가 메시지를 자신에게 보여 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즉 파르만과 자신에 대한 정체는 숨기되, 오늘 이야기의 대가로 대장일을 도와주는 게 어떠냐는 제안.

    ‘그래서 플랑을 자신이 돌보겠다고 한 거였어?’

    인질 아닌 인질이었다.

    ‘장로쯤 되니 무력이나 머리나 둘 다 잘 쓰는군.’

    그렇지 않아도 힘을 쓰는 거나, 간단한 대장일로는 촬영 내용이 좀 부실하겠다고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이에 더해 오랜만에 실력을 보여 준다면…….

    ‘괴식 아이돌 타이틀을 바꿀 수도 있어.’

    뭐든지 다 잘하는 아이돌. 그런 거 괜찮지 않은가.

    에르제는 대답을 기다리는 황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실력이 좋은 건 아니라서 당신이 배울 게 있나 싶기는 한데……. 그쪽 스승이 그렇게 이야기했다면야.”

    “오.”

    시원스런 대답에 황구가 웃었다.

    “아까 그 여자 배우분한테 귓속말한 것도, 그쪽이 조언을 해 준 것이 맞았구먼. 자, 그럼 바로 이동…….”

    “잠깐.”

    마음이 급한 듯한 황구를 막아서며, 에르제는 눈에 혈기를 집중해 멀리 떨어진 박장호를 발견했다.

    한세월이 지나도 나무 하나 못 찍어 넘길 듯한 박장호의 모습에 에르제는 도끼를 옆에 내려놓으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못하게, 녀석의 몸에 고통을 덕지덕지 붙여 줄 생각이었다.

    “바람 좀 쐬고 가죠. 시원하네요.”

    그의 말에 황구도 엉거주춤 앉으며 턱에 난 부슬부슬한 수염을 긁적거렸다.

    “그, 그러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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