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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88화 (88/307)

제88화

88화

다른 종족들이 지구에 왔다는 사실은 추후에 장진규를 만나서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원래는 뱀파리스와의 싸움에 개입하지 않고 일족들을 데리고 조용한 곳에서 살아갈 생각이었지만, 조금 전 파르만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자연 발생한 일족이 아닌 뱀파이어들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플랑과 같이 혼자 지내다가 봉변을 당할 일족들이 걱정되어서였다.

뱀파이어 냄새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늑대인간과, 마족 그 자체를 혐오하면서 피로 만든 술법을 쉽게 파훼하는 드래곤은 위협적이었다.

그 둘은 뱀파이어 개인이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해서 집단으로 뭉쳐서 대항해야만 한다.

게다가 또 하나의 변수로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 에이리스도 자신처럼 이곳으로 왔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뱀파리스의 로드이면서 뱀파이어들에게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있는 그녀는 계략과 교활함이 다른 종족을 압도할 수준이다.

실제로 그녀의 손에 많은 일족을 잃기도 했고 말이다.

‘지금처럼 위험이 산재해 있을 때는 훌륭한 방패막이들이 필요해.’

장진규를 비롯한 뱀파이어들.

뱀파이어라곤 하지만, 에르제는 그들을 같은 종족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자신이 이끌던 일족들은 수천 년의 역사를 함께한 끈끈한 관계였다.

다른 종족들을 경시하지 않으면서 그들 스스로의 품위를 절대 잃지 않는, 고결한 피의 종족.

‘그게 진정한 뱀파이어야.’

‘카니발’을 위해 인간을 대량학살하고, 아직도 그들을 하등 종족으로 취급하는…… 자신들의 안위만을 바라는 뱀파이어들은 절대 일족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지구에서 흔히 이런 걸 꼰대라고 하던데.’

그래도 에르제는 ‘아닌 건 아니야’라며 고개를 저었다.

‘설령 지금 뱀파이어 집단을 이끄는 것이 일족이라고 하더라도 용서할 수는 없지.’

죽이지는 않겠지만, 최소 죽기 직전까지 자신에게 맞든가 심하면 일족에서 내쫓을 생각이다.

‘그러려면 그들의 집단에 들어갈 필요가 있는데.’

하지만 자신이 뱀파이어 집단에 들어가면 소속사를 옮기라고 할 수도 있고, 제이가 하려던 것처럼 토트윈에서 탈퇴하라고 할 수도 있다.

분명 여러 가지 제약을 주고 자기들의 뜻대로 움직이려고 할 터.

‘…….’

에르제는 오늘 해야 할 일을 열심히 떠드는 황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채, 여배우로서의 기품을 유지하고 있는 장미영을 흘긋 바라보았다.

장진규와 만날 훌륭한 창구가 되어 줄 서큐버스.

‘퀸이 뱀파이어와의 주종 관계는 끊어 줬다고 했으니까.’

그들 뜻대로 휘둘릴 존재도 아니다.

‘거기다 내가 정신 쪽으로 강화시켜 주면, 더 이상 지배당할 일도 없을 테고.’

제이나 장진규나 고작해야 일개 뱀파이어일 뿐이다.

한 일족의 로드였던 자신과는 힘에서 비교할 여지도 없는 자들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언제라도 죽일 수 있지만 그냥 내버려 두고 있다는 뜻.

‘그런 녀석들이 내가 만들어 둔 정신 방어 체계를 뚫을 수는 없을 테고.’

혹여 뱀파이어의 수장이 자신과 비슷한 혹은 더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장미영이 지배를 당할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고작 서큐버스 하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겠지.’

최종적으로 이번 일까지 잘 끝내면, 자신은 아이돌 활동을 하면서 보이는 위협과 보이지 않는 위협 모두를 컨트롤할 체계를 갖추게 된다.

안병인, 윤소희, 장미영.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던 에르제는 피식 웃었다.

마치 과거 인간들 사이에 섞여 유희를 즐기고 있을 때, 장로들에게 귀찮은 일들을 떠넘기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이렇게 하시면 일족에게 큰 문제가 생길 겁니다!!’라고 자주 딴지를 걸던 장로들에게 막상 일을 떠넘기고 가니 그들의 태도가 돌변하지 않았던가.

‘거의 매일같이 자문을 구하려고 박쥐를 보내 왔지.’

게다가 지구와는 다르게 다른 종족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기에 박쥐가 더욱 눈에 띄면 안 되는 상황임에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마트폰이 연락을 취하기에는 굉장히 유용하기는 해.’

서로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고 번호만 교환하면, ‘전파’라는 것을 이용해 언제든지 원할 때 연락을 취할 수 있으니 말이다.

카테이아 대륙에서 전기나 전파는 마법으로 부리는 힘 중 하나였는데, 이곳에서는 ‘과학’이라는 학문 아래 다양한 전자 기기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어쩌면 원래 세계에 돌아가게 되면, 과학을 응용해서 마법을 새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피를 매개로 하는 나는 안 되겠지만.’

잠깐 아쉬움을 삼키던 에르제는 황구가 박수를 짝! 하고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생각에 깊이 빠져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황구 쪽으로 고개를 들고 있었던 덕분에, 카메라에 집중력 없는 아이돌로 낙인찍힐 일은 없어 보였다.

“자, 이제 제 일을 도와줄 조를 2개로 나누겠수. PD님께 들어 보니까 이미 A팀, B팀이 나누어져 있다고 하던데?”

“맞아요!”

“저랑 장미영 씨, 양태구 씨가 한 팀이고, 저기 강보라 씨랑 박장호, 서은우 씨가 같은 팀입니다.”

“으음.”

황구는 턱을 매만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좀 쉽고 편한 일이 하고 싶을 테고……. 그럼 이것으로 결정합시다.”

황구는 씩 웃으며, 나무 테이블 위에 늘어서 있던 단검 하나를 꺼내 왔다.

“나는 농기구를 만드는 쪽은 아니오. 부자들이나 수집가들에게 요런 단검이나 장검 같은 종류를 만들어 팔고 있수.”

“오…….”

번쩍거리는 예기에 출연진들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꽤나 돈이 되거든.”

끌끌 웃은 황구가 모루 위에 단검을 올렸다.

“근데 이건 망한 작품이라서 팔 만한 것이 못 돼.”

그러고는 냅다 망치를 들어서 단검 위로 내리쳤다.

까아아앙-!!

청명한 듯하면서도 조금 탁한 소리가 섞여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대장장이 직업을 몇백 년 전에 해 본 경험이 있는 에르제는 곧바로 알아챘다.

‘흠……. 단조……. 단련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네.’

단조 과정인 망치로 금속을 단련할 때 결정 입자를 제대로 작게 만들지 못해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설마 망치로 내려치게 해서 그때 나는 소리로…… 이긴 쪽을 결정하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여긴 망치 한번 제대로 쥐어 본 적 없는 사람들이다.

자칫하면 손목이 나갈 수도 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보고 있으니 역시나 그럴 생각인가 보다.

“팀에서 한 명씩, 망치로 이걸 내리쳐 나는 소리로 판단하겠수.”

황구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심사는 요놈이 할 거고. 위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거유. 그 정도로 다치러면, 오히려 실력이 있어야 하니까.”

“흠…… 재미있겠네요.”

“재미있을 거요.”

황구는 정원형의 말에 대답하며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황구라고 이름을 밝혔을 때 사람들이 웃었던 것이 마음의 앙금으로 남아 있었나.

아마 남자들이 나올 거라고 예상하고, 황구는 이런 함정을 판 모양이다.

‘물론 소리야 다르게 날 테니 승부는 낼 수 있긴 하겠지만…….’

저번 요리 연구가 아르바이트 때와 비슷하게 마이너스 점수에서 왔다 갔다 하게 생겼다.

남자면 잘못 내리치더라도 손목이 부러지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인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면 여긴 내가 나갈까?’

황구가 망치를 내리친 위치도 대충 파악해 뒀고, 어느 정도의 힘을 실어야 하는지도 파악했으니까.

“제가 할게요.”

에르제가 팀장인 강보라에게 그렇게 말하자, 박장호가 팔로 에르제를 밀어냈다.

“?”

뭐 하는 짓인가 쳐다보니, 박장호가 눈을 부라렸다.

“제가, 할 겁니다.”

“……손목 다칠 텐데요?”

“푸핫.”

박장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쪽이 하면 안 다치고?”

“네.”

“어이없네.”

박장호의 손이 에르제를 완전히 뒤로 밀어 버렸다. 에르제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예의는 태어나기 전에 두고 왔나.

품격과 예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에르제였기에 박장호의 이런 태도는 상당히 불쾌했다.

“아하하.”

강보라가 둘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을 느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저희 셋이 가위바위보 할까요?”

강보라가 주먹을 앞으로 뻗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에르제는 옆 팀에서 누가 나오는지를 확인했다.

‘장미영?’

저쪽도 재미를 위해 가위바위보로 결정한 모양인데, 장미영이 단번에 승리한 듯했다.

그녀의 표정을 본 에르제가 헛웃음을 흘렸다.

‘여배우 이미지를 위해서 힘을 아낄지 말지 고민하나.’

거기에 더 나아가서 아픈 연기는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는지도 고민하는 것 같았다.

장미영의 동체 시력이면 ‘일부러’ 이긴 걸 테고, 본인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자원한 모양.

‘그런데 이렇게 되면…….’

에르제는 손바닥을 붙이고 그 안을 노려보는 박장호를 바라보았다. 멤버들끼리 가위바위보를 할 때, 몇몇이 저러는 모습을 봤다.

‘박장호를 내보내는 게 이득이겠는데.’

박장호가 이것을 잘 해낼 가능성은 없었다. 운 좋게 정확한 지점을 맞춰도 충분한 힘 조절이 되지 않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에르제는 싱긋 웃으며 양보했다.

‘하고 싶은 사람에게 양보하는 이미지나 챙기자.’

그렇지 않아도 예전에 병원에 다친 사람을 데려다준 이후로는 훌륭한 인성의 이미지는 많이 보여 주지 못했는데, 이번에 조금 보여 줘야겠다.

그놈의 괴식 아이돌 타이틀을 좀 지워 내려면.

“제일 의욕 넘치시는 분이 해야죠. 양보하겠습니다.”

박장호가 자신을 밀치는 것부터 해서 자신이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양보하는 모습까지. 나중에 TV에 나오게 되면, 시청자들 반응이 어떨지 뻔했다.

‘그리고 장미영한테 지기까지 하면.’

박장호의 예의 없음을 제대로 꾸짖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그렇게 해요!”

강보라의 허락이 떨어지자, 박장호가 씩 웃었다.

녀석도 장미영이 나오는 것을 확인했는지 멋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줄 상상에 빠진 모양이다.

에르제는 슬슬 앞으로 나가려는 장미영의 소매를 붙잡았다.

“헛.”

화들짝 놀란 장미영이 자신을 바라보자, 에르제가 주변에 티 나지 않게 속삭였다.

어딜 쳐야 하는지, 힘은 얼마만큼 배분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이었다.

‘그럼 제가 이겨요?’

‘응. 그게 좋을 것 같아서.’

박장호가 지고 힘든 일을 맡게 되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겠지. 강보라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뱀파이어인 자신에게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장미영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후다닥 앞으로 나갔다.

“그럼 이쪽부터 먼저 하겠수.”

황구는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 주며, 박장호에게 망치를 쥐여 주었다.

그래도 손목이 다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는지, 안전 수칙에 관한 이야기였다.

“후후.”

박장호는 한 번 에르제를 스윽 쳐다보고는 있는 힘껏 망치를 단검에 내리쳤다.

깡!

아주 짧고 구린 소리가 났다.

“악……!!”

박장호가 망치를 떨구며 손을 부여잡았다. 전형적인 저림 증상이 그대로 온 듯했다.

그 모습을 앞에서 지켜보던 에르제가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

지금까지 개그맨으로 살아왔을 텐데, 벽에 못 박는 것 말고 언제 망치를 쥐어 봤겠는가.

그래도 황구의 조언은 따랐는지 손 부상을 당하는 사태만은 요행히 피한 모양이었다.

저린 오른손을 흔들며 박장호가 오만상을 썼다.

“음, 10점.”

황구가 또다시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고로 1000점 만점이요.”

“칫.”

박장호가 혀를 찼다. 그러고는 장미영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래도 장미영에게 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했다.

하지만 장미영이 망치를 들고 내리치는 순간.

카아아앙--!!

박장호의 표정이 변했다.

놀란 눈. 박장호뿐만이 아니라 다른 출연진도 같은 얼굴이었다.

심지어는 손이 저리지도 않는지 헤헤 하고 웃는다.

“…….”

황구는 멍하니 그 광경을 보다가 휙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뿌듯한 표정의 에르제에게 꽂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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