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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87화 (87/307)
  • 제87화

    87화

    휴식 시간은 1시간이 주어졌을 뿐이지만,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기에 그리 부족한 시간은 아니었다.

    파르만은 에르제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고, 차를 우려서 내왔다.

    같은 세계의 사람을 만나 쿵쿵대던 가슴이, 차향 덕분에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스읍.”

    에르제는 코로 차향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파르만에게 어서 이야기를 해 보라는 듯 살짝 턱짓을 했다.

    드워프라면 뱀파이어처럼 오랜 삶을 영위하는 종족이지만, 어쨌거나 장로와 로드라는 지위 차이가 있었기에 그에게 굽힐 필요는 없었다.

    ‘우두머리는 장로들 중에서 번갈아 가면서 하니까.’

    동급은 아니다.

    그렇기에 파르만은 별다른 말 없이 차 한 모금을 마시고는, 지금까지의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시기는 대략 700년 전쯤, 내가 이 땅에 오게 된 것은 그때였네.”

    파르만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몸을 가리켰다.

    “어린아이의 몸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더 이상 자라지 않더군. 700년째 이 몸에 들어왔던 상태 그대로 지금까지 제자를 키우면서 살아왔네.”

    드워프의 천성이 어디 가지는 않은 듯, 파르만은 몇백 년의 시간을 대장장이로 제자를 키우면서 살아왔다고 했다.

    “다만 외관이 이렇기에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해서 아쉽긴 했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저 제자들이 성장해서 그들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을 보는 것도 꽤나 큰 재미가 있더군.”

    파르만은 어린아이의 몸을 하고서는 어울리지 않게 껄껄껄 웃어 댔다.

    그러다가 갑자기 예능 팀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런데 이번 제자 녀석은 썩 신통치가 않아. 실력을 올리라고 했더니 명성을 높이는 데에만 집착을 해서는 이렇게 하나도 쓰잘머리가 없는 예능에나 출연 신청을 하지 않았는가. 뭐……. 그 덕분에 자네를 만났으니까 잘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긴 하지만.”

    “…….”

    에르제는 가만히 그의 얘기를 듣다가 이내 손을 뻗어 제지시켰다.

    드워프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종족이었나?

    아니면 동향인을 만나서 말이 많아진 걸까.

    궁금한 부분이 따로 있는데, 자꾸 삼천포로 빠지는 듯해서 에르제는 아예 직접적으로 묻기로 결정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아! 언제든지, 편하게 물어보시게.”

    “그럼.”

    에르제는 자세를 고쳐 앉고, 양손으로 찻잔을 감쌌다.

    “일단 첫 번째, 이곳에 어떻게 오게 된 건지 알고 있나?”

    “끄응.”

    파르만은 첫 질문부터 고민에 빠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아픈 기억을 꺼내는 듯 얼굴을 찡그리다가 이내 한숨을 후우 하고 뱉어 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 미치광이 황제에 대해서.”

    “알고 있지. 모든 종족을 자기 발밑에 두겠다고 선언한 녀석이잖아.”

    “음. 그래, 그랬었지. 그럼 그게 가능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

    에르제는 그의 말에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였다.

    ‘조금 이상하긴 했어. 인간이 다른 종족을 지배하겠다는 허황된 꿈을 꾼 것은 이전에도 몇 번이나 있었지만, 성공한 것은 그때가 유일했으니까.’

    하지만 인간보다 신체적으로 뛰어난 종족은 널려 있다시피 많았고, 또한 인간의 지성이 높다고 해도 그렇다고 단연 1등도 아니었다.

    용이나 나가 그리고 마족들 중에서 마왕이라고 불리는 것들보다는 지성이 낮았으니까.

    ‘그렇다고 다른 능력이 특출 났던 것도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다른 종족들의 무릎을 꿇린 거지?

    에르제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자, 파르만이 푸흐흐,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그것까지는 몰랐나 보군.”

    파르만은 말을 이었다.

    “인간들은 하나의 종족으로 재단할 수가 없네. 평균적인 지성과 신체 능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늘 그 평균을 압도적으로 뛰어넘는 괴물들이 나오거든.”

    “아…….”

    “이제야 눈치챘나 보군. 그래, 자네도 오래 살았으니 알 테지. 흔히 용사라고 불리는 인간들이 대표적인 예니까.”

    파르만은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하지만 과연 정의감 넘치는 녀석들만 그렇게 타고날까. 이번에는 희대의 악마가 탄생했을 뿐인 게지.”

    에르제는 파르만의 눈빛을 읽으며, 그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했다.

    그들도 분명, 자신의 일족들처럼 짓밟혔으리라.

    역시나 파르만은 그 이야기를 꺼냈다.

    “아마도…… 여러 종족들 중에서 가장 먼저 공격을 당한 건 우리일 걸세. 모든 종족에게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미친 황제는 우리에게 가진 무구를 내놓으라고 요구했거든. 우리는 당연히 거절했고, 결과는 예상하는 대로일세.”

    “……그래서?”

    에르제는 천천히 입을 열어 물었다. 아직 그가 물었던 것에 대한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대답.

    “재촉하기는.”

    파르만은 차를 한 모금 홀짝 마시고는 테이블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그의 손은 괴로운 기억을 더듬는 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밀렸네. 놈의 지능은 예상을 아득히 상회했어. 우리의 전략을 모조리 간파했고, 10배가 넘는 전력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와해되었지.”

    그렇게 중심부까지 침략을 당한 드워프들은 인간들에 의해 하나둘씩 죽어 나갔다고 한다.

    “내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생존자 몇 중 하나였지. 눈앞에서…… 모두가 죽었어. 어린아이 하나 남겨 놓질 않더군.”

    파르만의 흰자가 붉게 변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싸웠네. 한참을 그렇게 싸우다 보니, 우리가 만든 무구가…… 내 몸에 박혀 있는 것이 보이더군.”

    전쟁 도중 빼앗긴 무구들은 그대로 인간들의 창과 방패가 되어 제 주인을 찌르고 베었던 것이다.

    “날이 잘 든다고 불평할 수도 없고. 푸흐흐.”

    어린아이의 행색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터뜨린 파르만은 천천히 에르제와 시선을 맞췄다.

    “그런데 그때, 여신의 목소리가 들리더군.”

    “……!!”

    에르제는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아니, 거의 반쯤은 일어섰다.

    “미친 황제 때문에 지구라는 세계와 차원이 연결되었다고…… 그곳으로 가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했지.”

    “그래서…… 신의 뜻을 받든 건가?”

    파르만이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당연히 다른 드워프들도 지구라는 곳에 온 줄 알았는데…… 단 한 명도 없더군.”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찻잔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700년…… 그 긴 시간을 드워프들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는데도, 단 한 명도 보질 못했어.”

    에르제는 침묵했다. 지금까지 몇 개월 만에 일족 둘을 찾은 자신이 그를 위로하는 것은 혹시 기만이 될까 싶어서였다.

    그래서 그냥 파르만이 말한 것을 되짚어 보기로 했다.

    ‘여신이라.’

    여신이라면 당연히 목소리가 여성의 목소리였기에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고 축복을 내린 신과는 다른 존재라는 뜻.

    ‘……하지만 신이야 여럿 존재하니까.’

    어쩌면 종족마다 다른 신이 붙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나는…….’

    에르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킨 파르만이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곳에 오게 된 경위는 대충 그렇다네. 또 궁금한 것이 있다 하지 않았나?”

    “맞아. 혹시 그러면 그쪽처럼 카테이아 대륙의 다른 종족들도 지구로 넘어온 걸 확인하지 못했나?”

    “흐음. 아니, 본 적 없네. 일단은.”

    파르만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는데, 그게 끝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직접 본 적이 없다 뿐이지, 700년이나 이 나라에 있다 보니 흔적 정도는 본 적이 있네.”

    “……그렇다면.”

    “다른 종족도 나처럼 신이 지구로 보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이야기일세.”

    “하.”

    에르제는 그의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난 내 목숨값으로 일족들을 보냈는데.’

    이들은 신의 은총을 받아서 아무 대가도 없이 새로운 차원에 정착했다고 한다.

    눈앞의 드워프 하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족들도 그랬을 가능성이 높았다.

    - 편애한 적 없다.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떠올렸다. 파르만은 자신의 동족들을 700년 동안 단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 말이다.

    ‘……만약 일족들을 보낸 건 나뿐이고, 다른 종족들과 똑같이 나만 신에 의해 지구에 오게 된 거라면?’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정말 신은 편애 없이 은총을 내렸다고 여길 만했다. 목소리의 주체는 달랐지만.

    그리고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의문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면, 어째서 종족당 하나씩만 지구로 보낸 거지?’

    도대체 그럴 이유가 뭐가 있다고?

    단순히 미치광이 황제 때문에 지구와 차원이 연결되었다는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종족들을 살리기 위한 방편인가? 하나씩이라도 남기겠다고?’

    지구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노아의 방주라고 했던가.’

    종교에서 만들어 낸 사건인지, 진짜 있었던 일인지는 외부인이기에 알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친다면 언제든지 일족을 만들 수 있는 자신과 다르게 드워프는 한 쌍이 이곳으로 왔어야 하지 않나?’

    생각할 수록 계속해서 의문만 늘어 가는 기분이었다.

    신, 인간, 다른 종족, 지구 차원과 연결 그리고 미치광이 황제.

    모든 퍼즐 조각들이 모여서 하나의 그림을 그려 낼 듯하다가도, 이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변했다.

    ‘신이 보낸 종족들끼리 힘을 합쳐서 이곳의 인간들에게 복수하란 뜻은 아닐 텐데.’

    에르제는 복잡해진 생각에, 찻잔을 매만지며 물었다.

    “……그쪽은 계속 이렇게 살 생각이야?”

    “뭐, 그래야겠지. 동족들을 찾는 건 계속하겠지만, 굳이 인간 세상에 깊이 들어가고 싶지는 않아.”

    인간을 미워하는 단계까지 가지는 않은 듯했지만, 그들 사이에 섞여 살 마음은 없는 듯했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더 이상 자라지 못한다는 것도 그런 결정에 한몫했을 테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파르만도 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몸에 들어가는 형식으로 왔군.’

    자신이 보낸 일족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 완전한 인간이 된 것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신이 보낸 것과 내가 보낸 것. 그 차이겠지.’

    그래도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는 파르만과의 대화를 통해 이해했다.

    파르만은 드워프라는 종족을 더 늘려 나갈 방법을 찾지 못했기에 그 대신 제자를 받아들인 모양이지만, 자신과 같이 혼자서도 동족을 늘릴 수 있는 이들은 다를 것이다.

    근래에 만났던 뱀파리스를 포함해 늑대인간, 서큐버스, 드래곤 등등.

    어쩌면 이미 몇백, 몇천 년 전에 와서 그 수를 늘려 놓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 그렇다고 하면 지구가 아니라 카테이아 대륙이라고 여겨야 할 지경이겠는데.’

    어쩌면 그보다 더 복잡한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그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인간들 틈에 섞여 인간의 형상으로 살아가고 있을 테니까.

    ‘만약 그들을 만나게 된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을 찾지 못한 에르제는, 이내 플랑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만든 건 파르만이긴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니 먼저 공격한 건 플랑이라고 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회복될 때까지 돌봐준다고 하기도 했고.

    ‘……장진규를 다시 만나 봐야겠어.’

    그들도 이 사태를 알고 있는지, 다른 종족들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등등……. 물어볼 것들이 많았다.

    게다가 마침 장미영이라는 훌륭한 창구도 생긴 참이고.

    자신을 퀸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명령을 내릴 명분도 충분했다.

    “혹시나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날 찾아.”

    에르제는 TV나 무튜브에서 자신을 찾으면 된다고, 토트윈에 대한 홍보를 잊지 않은 채, 촬영 팀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다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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