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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86화 (86/307)

제86화

86화

바야흐로 달력은 5월로 접어들었다.

3, 4월의 은근히 쌀쌀했던 날씨가 사라지고 봄의 포근함만이 남아 있는 계절이 된 것이다.

선선한 바람과 알맞은 온도에 맞춰 사람들의 옷도 상당히 얇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산속을 올라가고 있는 사람들은 죽을 듯한 표정으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5월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허억, 허억.”

“아으……!! 힘들어!!”

박장호와 정원형은 등에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채로 연신 앓는 소리를 냈다.

비교적 짐이 적은 강보라도 힘들어 보이는 것은 매한가지였으나, 카메라에 나올 본인의 모습을 의식해서인지 얼굴을 구기는 건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스태프들도 무거운 장비 때문에 다 죽어 가는 표정이었는데, 오직 두 ‘종족’은 완전히 멀쩡해 보였다.

“숲 냄새 좋네.”

“그러게요. 경치도 좋고, 운동하는 맛도 있네요.”

토트윈 멤버들 중에서 특히나 민주혁이 건강관리에 신경을 쓰는 편이었는데, 그가 가장 즐겨 하는 운동이 숙소 근처에 조성된 코스를 따라 뛰는 새벽 조깅이었다.

- 시간 나면 같이 뛸래? 개운하고 하루가 아주 상쾌해.

굳이 운동을 할 필요가 없던 에르제에게는 그리 공감되지 않는 이야기였으나, 오늘 강제적으로 등산을 해 보니 가끔씩은 새벽 조깅을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에르제는 자신과 절대 같은 감상이 아닐 듯해 보이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네크로맨서에 의해 좀비로 다시 태어난 몰골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짐을 더 들어 줘야 하나?”

“지금도 많은데요……?”

장미영이 푸스스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에르제의 등에는 2인분 이상의 짐이 들려 있었다.

스태프의 것은 아니었고 다른 출연진들의 짐이었는데, 박장호는 아직도 앙금이 남아 있는지 꿋꿋하게 “제가 들 겁니다. 손 떼세요.”라고 하더라.

그래서 그런가, 다른 사람보다 300년은 더 썩은 시체같이 변하기는 했지만.

‘그때 박장호한테 뭐라고 했을까.’

에르제는 다른 여성 출연진보다 더 많은 짐을 들고 씩씩하게 올라가는 장미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궁금하긴 한데.’

그걸 또 물어보기도 뭐해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다만, 오늘의 태도로 보아 그리 잘 얘기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에르제는 자신보다 보폭을 넓혀 걸어가는 장미영의 등을 보다가, 다시금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향했다.

길 자체가 경사가 좀 있고 나무가 많아서 차로 오기 힘든 곳이라 대략 스무 명이 넘는 인원들이 짐을 메고 올라가는 모습이 꽤 볼만했다.

“윽, 후욱, 으으.”

에르제는 무거운 카메라 장비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스태프의 등에 손을 얹고, 가장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카메라를 한 손으로 집어 들었다.

“……어.”

몸이 가벼워진 스태프가 놀란 눈을 했다.

“제가 들고 갈게요.”

이러다가 촬영이고 뭐고 올라가다가 쓰러지는 사람이 나올 것 같았다.

“가, 감사합니다.”

남자는 고개를 한 번 숙이며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오늘, 내일 최선을 다해서 서은우 씨 찍어 드릴게요.”

그러고는 씩 웃는다. 에르제도 따라서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주고는, 한 손으로 무거운 카메라를 든 채 이동했다.

그렇게 10분쯤 더 갔을까.

에르제는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나저나 오늘 플랑…… 그 녀석도 온다고 하지 않았나?’

할 일이 있다고 하더니,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장 대표도 오늘 플랑이 오지 않을 거라 말해 주진 않았는데.’

혹시나 할 일이라는 게 다른 뱀파이어나 뱀파리스와 관련되어 있는 건가?

만약 그랬다면, 자신에게 말을 해 줬을 텐데.

에르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냥 직무 유기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기감을 넓혀서 확인했으나, 박쥐로 변했거나나 그림자 속에 숨어서 경호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닌 듯했다.

‘……뭐 촬영하고 있으면 알아서 오겠지.’

녀석이 어디 가서 당할 뱀파이어도 아니고.

자신도 다른 뱀파이어를 압도하는 매혹의 힘이 아니고선, 무력으로 플랑을 제압하기란 딱히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플랑을 찍어 누를만한 다른 종족이 있는 것도 아닐테고.’

게다가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뭔 일이 일어나기야 하겠는가.

‘솔직히 인간들 사이에 섞여 있으니 경호가 굳이 필요한 것도 아니야.’

특히나 뱀파리스 쪽은 김지태 이후로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안병인에게 지속적으로 보고를 받고 있었는데,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고 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제대로 된 통솔자가 없다면 멋대로 행동하는 뱀파리스의 특성상, 오히려 그것이 더 꺼림칙하긴 하지만…….

‘그건 에이리스가 특이했던 거니까.’

에이리스는, 모든 뱀파리스를 찍어 누를 정도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이곳에 오기 전의 세계에서 뱀파리스 로드로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에르제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아픈 기억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뭐 내가 지구로 보낸 일족들 말고는 다른 종족들이 이곳에 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다시 볼 일은 없겠지.’

그저 뱀파리스들의 힘이 많이 약해졌고, 그런 그들을 통솔할 수 있는 새로운 로드가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최악이라면 딱 그 정도로 상정하면 될 듯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덕분에 느려졌던 에르제의 발걸음이, 다시 원래의 속도로 돌아왔을 때.

“도착……!! 도착했어요!!”

가장 앞서서 걷던 작가가 양손을 번쩍 들며 뒤를 돌아보고 소리쳤다. 거의 감격에 겨운 목소리였다.

“흐어엉.”

작가가 그대로 주저앉아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 그녀의 뒤로 털이 풍성한,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국내 최고 대장장이 중 하나라는 명성에 걸맞게 불에 그을린 피부와 두꺼운 팔뚝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손님들 오셨구먼.”

그는 무심한 눈으로 사람들을 훑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가볍게 하고 오는 게 나을 거라고 했는데……. 고생들 많으셨수. ‘황구’라고 합니다.”

“풉.”

“어흠, 크흠.”

황구라는 이름을 듣고 스태프들과 출연진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헛기침을 해 댔다.

불을 가까이하는 직업 특성상, 갈색의 피부 톤에 얼굴에 털도 많이 나 있어서 황구라는 이름이 자연스레 개를 떠올리게 해서였다.

에르제보다 지구에 오래 살았던 장미영도 이를 이해했는지 같이 웃음을 터뜨렸고, 오직 에르제만이 감흥 없는 표정을 유지했다.

“죄, 죄송합니다.”

뒤늦게 PD가 그에게로 가서 사과를 했고, 황구는 되었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됐수. 워낙 익숙한 반응인지라. 따라오슈.”

황구는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며 먼저 걸어갔다.

작업장은 작가가 ‘도착했다’고 말한 곳의 근처였는데, 그곳은 산 위라고 하기에는 신기할 정도로 드넓은 공터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주변의 나무는 죄다 베어져 공간을 넓혀 놓았고, 공터 뒤쪽에는 꽤 커다란 오두막이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저곳이 대장간인가.’

마치 돌을 깎아서 만든 듯, 반구의 형태로 지어진 돌집이 대장간인 것 같았다.

“우와, 마치 이글루 같아요.”

장미영이 옆에서 감탄사를 내뱉었는데, 에르제는 대장간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왠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완전 기억 능력은 원하는 기억을 저장하고 꺼낼 수 있게 하는 것이기에, 이럴 때는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때문에 에르제는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을 뒤지는 수밖에 없었다.

‘왜 저 형태가 익숙할까.’

인간의 것은 아니다.

원래 살던 곳에서 인간들은 대장간을 저런 형식으로 짓지 않았다. 그들의 것은 건축물에 가까운 형태였으니까.

자신이 직접 대장일을 해 보았기에 확실한 기억이었다.

‘인간이 아니라면.’

자신들의 무구를 직접 제작해서 약탈을 자행하던 오크 쪽인가?

힘이 좋은 녀석들이라면, 저렇게 돌을 쌓아서 만들 것 같기도 했다.

‘……마족을 제외하고는 교류가 그리 많지 않아서 기억이 잘 나지 않네.’

뭐, 촬영하다 보면 기억이 나겠지.

지금 당장 떠올려야 하는 중요한 일은 아니었기에, 에르제는 황구를 따라서 오두막 안으로 향했다.

출연진 6명과 내부를 촬영한 스태프들, 마지막으로 PD와 작가만 들어오고 나머지 사람들은 오두막 밖에서 촬영 준비를 하기로 했다.

알바…… 라고 하기엔 선을 넘어서 거의 직업 극한 체험의 수준이 되기는 했지만.

‘자극적일수록 시청자들이 좋아한다고 했던가.’

장 대표가 산속 오지로 들어간다고 하니, 아이처럼 좋아하며 했던 말이었다.

소속 아이돌이 산에 구른다고 좋아하는 대표라니, 악마가 따로 없다.

“잠깐 모여주세요!”

어느 정도 사람들이 도착하자, PD가 크게 소리쳤다.

곧 오늘 해야 할 일과 저번처럼 A팀, B팀으로 팀원을 뽑는 과정이 진행되었고, 이번에 에르제는 장미영과 떨어져 팀장 강보라, 박장호와 함께 A팀이 되었다.

팀이 확정되고 박장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는데, 그 모습이 흡사 연적을 보는 듯해서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러면, 잠깐 휴식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PD는 일단 초반 촬영 분량은 산에 오르는 모습과 팀을 짜는 것으로 대충 나왔다고 생각했는지 휴식 시간을 제안했다.

충분히 좋은 판단이었다.

에르제와 장미영을 제외하고 다들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오두막 안에서 쉬어도 되고, 궁금한 사람들은 주변을 좀 둘러봐도 괜찮수.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황구는 그렇게 말하고는 대장간 쪽으로 향했고, 에르제만 유일하게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앉아서 쉬고 싶은 모양이었다.

에르제는 밖으로 나와 주변을 조금 거닐며 대장간을 관찰했는데, 여전히 저걸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5분가량 태양을 피해 그늘 쪽을 돌아다니던 중, 그의 눈에 일반적이지 않은 흔적이 발견됐다.

‘……전투의 흔적인데……?’

이곳에서 싸울 일이 있을까? 심지어 산속 짐승과 사투를 벌인 흔적도 아니었다.

흙은 깊게 파여있었고, 검상으로 보이는 흔적도 있었다.

‘그렇게 오래된 흔적도 아니야. 어제 아니면…….’

기껏해야 며칠?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던 에르제의 코로, 아주 미세하지만 익숙한 혈향이 맡아졌다.

대번에 에르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뱀파이어의 피.’

그리고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녀석의 얼굴이 순간 떠올랐다.

‘플랑.’

에르제가 송곳니를 강하게 깨물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찾아야 해.’

주변에 자신을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에르제는 눈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자 지금 맡은 혈향이 길게 선을 그린 채 오두막 뒤편의 숲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무에 가려지기는 했으나, 대충 가늠했을 때 1km 정도 떨어진 지점이었다.

‘휴식 시간은 1시간이니까 충분해.’

에르제는 곧장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전속력으로 ‘혈로(血路)’를 밟았다.

후우우욱-!

주변 나무가 마치 빨려들 듯이 가까워졌다가 멀찍이 뒤로 물러났다.

1km를 5분도 채 되지 않아 주파한 에르제는 그곳에 뿌려진 피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가까워진 만큼 명확하게 피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게 되었다.

그의 눈앞에는 조금 전에 보았던 오두막과 비슷한 통나무집이 서 있었다.

“플랑……!”

이건 분명 플랑의 피였다.

할 일이 있다더니, 도대체 녀석의 피가 이곳에 왜 있는 건지!!

우직-.

에르제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통나무 문을 잡아떼었다. 그의 손에 뜯겨 날아간 문이 근처 나무의 옆구리에 박혔다.

“플랑!!”

어떤 X끼가 또 자신의 일족을 건드렸단 말인가!

에르제는 온몸에서 검은색 기운을 줄줄이 뿜어내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침대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플랑을 발견했다.

“너!”

에르제가 화난 목소리로 가까이 다가가려던 때.

뒤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고개를 휙 돌리자, 정말로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사극에서나 보았던 품 넓은 도포를 입고 있었다.

“남의 집 문을 저렇게 부숴 놓으면 어떡하나?”

“…….”

아직까지는 놈이 플랑을 저렇게 만든 장본인인지, 아니면 산속에 굴러다니던 플랑을 간호해 준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때문에 에르제는 멈춰 서서 놈을 관찰했다.

그리고 플랑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정체를 간파했다.

“……드워프?”

“으음, 그렇게 티가 나는가?”

어린아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있지도 않은 수염을 쓰다듬는 흉내를 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저쪽 뱀파이어만 날 찾아왔을 때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이거 참, 로드라는 작자를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어린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동향인을 이곳에서 만날 줄이야. 반갑네. 장로 ‘파르만’일세. 자네가 그 유명한 ‘에르제’였군. 흑색의 매혹의 힘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

차분하게 말하는 파르만과 다르게, 에르제의 눈동자는 세차게 흔들렸다.

“어떻게…… 어떻게, 지구에 카테이아 대륙의 드워프가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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