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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84화 (84/307)
  • 제84화

    84화

    현관에서 몇 발자국 더 들어와야 보이는 거실은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태리에서 공수해 온 검은색 수제 가죽 소파와, 벽에 걸려 있는 유명 화가의 그림들, 최신식 TV와 각종 전자 제품 등등.

    물질적인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지만, 처음 이 집을 방문한 사람이 보았다면 공허함을 가장 먼저 떠올릴 듯한 풍경이었다.

    이 집의 주인인 장미영은 최근 촬영 중인 드라마 촬영을 끝내고, 가죽 소파에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엎어졌다.

    친언니처럼 따랐던 서큐버스 퀸이 사라지고 난 뒤 집 안은 늘 공허함으로 가득했었는데, 그런 것도 며칠 전 예능에 나가고 난 뒤로는 안녕이었다.

    “헤헤.”

    장미영은 엎어진 채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헤벌쭉 웃었다.

    “살아 있었어.”

    서큐버스 퀸은 살아 있었다. 그것도 원래 그들이 주인으로 섬겼어야 하는 뱀파이어 로드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물론 겉모습도 서은우라는 남자 아이돌로 바뀌었고, 말투도 조금 바뀌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장미영에게는 더 이상 다른 서큐버스들과 경쟁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들의 구심점이 될 서큐버스 퀸이 더욱 강해져서 돌아왔고.

    새로운 서큐버스 퀸의 탄생을 위해 무리하게 인간들의 꿈에 침투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덕분에 배우 활동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

    장미영은 히죽 웃으며 엎어졌던 몸을 바로 누웠다. 그러자 그녀가 지금까지 찍어 왔던 작품의 포스터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작은 단역부터 주연을 맡았던 것까지, 천장에 붙어 있는 포스터와 홍보물들은 그녀가 지금까지 걸어온 배우로서의 필모그래피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장미영은 느릿하게 천장으로 손을 뻗고는 검지만 세웠다. 그러고는 아직 많이 비어 있는 천장의 공간을 따라 선을 그렸다.

    ‘이제 금방 다 채울 수 있겠어.’

    장미영은 천장의 오른쪽 아래 끝까지 다다르고 나서야 손을 아래로 떨구었다.

    다시 왼쪽 위로 돌아가니 그녀가 처음으로 단역을 맡았던 영화가 보였다.

    ‘장진규…….’

    그 빌어먹을 뱀파이어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임과 동시에 그녀가 서큐버스가 된 영화이기도 했다.

    장미영은 장진규의 곁에 몇 번 등장하는, 대사 한 줄짜리 단역이었는데 당시 동글동글한 얼굴에 귀여운 이미지였던 그녀에게 장진규가 흥미를 가졌던 것이다.

    - 계속 배우 할 생각입니까? 만약 그렇다고 하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처음에는 풍문으로만 듣던 이야기가 실제로 있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거절할 생각이었으나, 이어진 장진규의 말은 예상 밖이었다.

    - 오해는 하지 말고요. 그냥…… 뭐랄까, 배우로서의 매력이 극대화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

    그래서 그냥 뭔지 이야기나 한번 들어 보자는 심산이었다. 장진규가 그녀를 따로 부른 곳이 고급 레스토랑이었다는 점도 한몫했고 말이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딱히 나쁜 짓을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진규는 자신에게 서큐버스가 될 생각이 없는지 물었다. 손에는 ‘서큐버스의 혈청’이라는 기묘한 물건을 들고서.

    - 장미영 씨에게는 가능성이 보이기에 제안을 드리는 겁니다. 물론, 거절하면 기억을 지울 거고요.

    영화를 찍으러 갔더니 진짜 영화에서만 나오는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어쩌면 그녀가 홀린 듯이 “좋아요.”라고 승낙한 것은 그런 초자연적인 이야기였기에 더욱 마음이 동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서큐버스가 된 그녀는 장진규의 말대로 매력적인 배우로, 또 국민 여동생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단역을 맡았던 것도 딱 처음뿐.

    ‘이렇게까지 주목을 끄는 단역은 처음이다.’라는 호평과 함께 장진규가 SNS로 지원사격을 해 준 덕에 곧장 조연으로 다음 작품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렇게만 생각하면, 장진규가 그냥 좋은 일을 해 준 것처럼 보이지만.’

    장미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말 그대로다.

    서큐버스가 되어 ‘매료’를 통해 인간들의 호감을 이끌어 내고, 이런 집에 살게 될 정도로 인기 배우로 성공한 것은 맞았으니까.

    하지만, 장진규는 중요한 이야기는 단 하나도 해 주지 않았다.

    서큐버스가 될 확률이 30%에 불과했다는 것과, 실패했을 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리스크는 쏙 빼고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그녀를 서큐버스로 만든 장진규의 직속 뱀파이어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제일 중요한 정보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라도 장미영이 거절할 수 있는 여지는 단 하나도 고지하지 않은 거다.

    ‘물론 퀸님이 그 개자식을 죽여 버렸으니까 이제는 괜찮지만.’

    직속 뱀파이어 둘은 자신이 데려간 던전에서 서큐버스 퀸의 손에 명을 달리했다.

    그날 이후로 서큐버스 퀸은 그녀에게 구세주가 되었다.

    강제 명령이라는 족쇄를 끊어 준 은인.

    ‘……물론 장진규가 아직 살아남아 있긴 한데, 그날 이후로 손을 뗀 것 같기도 하고.’

    장진규의 직속 뱀파이어가 서큐버스 퀸에게 먹힌 이후, 찜찜했는지 지금까지 그녀에게 접근하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냥 마주칠 때마다 어색한 선후배 사이를 연기하기만 할 뿐.

    ‘그냥 버리는 패, 자신의 손을 떠난 서큐버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으려나?’

    처음에는 그게 불안해서 밤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무려 뱀파이어 로드였다. 퀸님이 이번에 삼켜 버린 존재는…….

    더 이상 일개 뱀파이어인 장진규가 설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그럼 주종 관계가 이제 바뀌는 건가?’

    장미영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장진규에게 메시지로 욕을 보내면 뭐라고 답을 할까.

    즐거운 상상을 하던 장미영은 이내 시간을 확인하고 소파에 정자세로 앉았다.

    존경을 넘어 경외의 존재가 된 서큐버스 퀸, 서은우 님을 TV로 만날 시간이다. 그것도 그녀와 함께 나오는 예능이니 본 방송을 놓칠 수는 없다.

    “헤헤헤.”

    장미영은 또다시 히죽거리며 TV를 켰다.

    잠깐의 광고들이 지나간 후, 본격적으로 ‘알바 몬스터’의 1회 방송이 시작되었다.

    [ 토마토를 튀김으로 만드는 거 어떠세요? ]

    [ 튀김……? ]

    [ 좋아요! 무조건 좋습니다! ]

    열렬히 지지하는 자신의 모습이 뿌듯한 장면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서은우의 조리 과정에 장미영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이마를 타고 내려오는 땀을 팔을 들어 닦아 내고, 거품기를 든 채 카메라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그러고는 씩 한 번 웃어 주고는, 다시 거품기를 보울에 열심히 돌리는 모습.

    거의 어깨까지 소매를 걷어붙인 팔에는 잔근육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

    장미영은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춤 연습 때문일까, 아니면 아이돌로서 몸을 만들었기 때문일까.

    이미 화면이 전환되었음에도 마치 살아 있는 듯이 움직이던 잔근육과 힘줄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게 맞지……!!’

    장미영은 기쁜 마음에 앙증맞은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퀸님이 언제까지고 인간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일개 서큐버스인 자신이 이 정도로 성공했는데, 퀸님이라면 분명 다르지 않겠는가!!

    모습이 달라졌다고 서큐버스 퀸이 아닌 게 아니다.

    그냥 앞으로 아이돌로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할 것 같았다.

    “서은우는…… 신이야.”

    장미영은 드디어 세상 밖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 서큐버스 퀸의 위대함을 극찬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눌렀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는 게 좋겠니?”

    장미영은 어느새 자신의 무릎께로 와서 얼굴을 비비는 검은색 고양이를 안아 들고 물었다.

    냐옹-.

    “그럴까?”

    마치 고양이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장미영은 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음~ 음음…….”

    그리고 고민했다.

    너무 과하면 안 된다.

    ‘퀸님은 지금 남자 아이돌이야.’

    자칫하다가는 열애설 같은, 아이돌의 수명을 깎아 먹는 짓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냥, 적당히 관심 없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정도.’

    이래 보여도 이 바닥에서 꽤나 구른 자신이다.

    대충 대중의 반응이나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적당히 기사화될 수 있을 정도로만.’

    장미영은 방송 중인 예능이 끝이 나고 2시간 뒤 자신의 SNS에다가 글 하나를 올렸다.

    굉장히 오래 고민한 것치고는 평범한 글이었으나,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았다.

    * * *

    벌컥-!!

    “서은우!! 은우야!!”

    태현우가 호들갑을 떨면서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청난 고민을 하고 있던 에르제에게는 불청객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후우.”

    일기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나 하고 심혈을 기울여 마지막 문장을 고심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순식간에 집중력이 깨져 버렸다.

    에르제는 일기를 덮으며, 후다닥 달려오는 태현우를 바라보았다.

    “이거 봤어?! 장미영 배우님이 너 언급한 거?”

    “서ㅋ…… 아니, 아니. 장미영이 나를?”

    에르제가 말을 얼른 주워 담으며 묻자, 태현우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장미영이라니! 국민 여동생! 대배우님께!”

    “……응. 미안.”

    태현우가 장미영의 열혈 팬이었구나. 에르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날 언급했다는 건 무슨 말이야?”

    “아!”

    태현우는 그제야 에르제에게 온 이유를 상기하고는, 장미영이 SNS에 올린 글을 보여 주었다.

    [ 여러분들도 ‘알바 몬스터’ 1화 보셨나요? 당연히 제 팬분들은 절 보기 위해서 봐주셨겠죠?? (눈웃음 이모티콘) ]

    그런 식으로 서두를 쓴 글이었는데…… 꽤나 장문의 글이었다.

    대충 이번 촬영이 재미있었고, 같이 촬영했던 출연진들에 대한 언급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즈음에 가서야, 자신의 이름이 나왔다.

    [ ……무엇보다, 저는 서은우 씨에게 많이 놀랐어요. 요리 지식도 엄청 많으시고, 촬영 내내 친절하고 배려심 넘치게 대해 주셔서 편하게 촬영에 임할 수 있었거든요. #강보라 팀장인 언니보다 더 의지한 건 비밀……!! 심지어 칼에 손을 베이기까지 하셨는데, 밴드 붙이면 된다고 촬영 끊지 말고 그냥 가자고 하셨어요. ㅠㅠ ……. ]

    ‘그건 그냥 자연스럽게 상처가 낫는 모습을 보여 줄 수가 없어서 밴드 붙인 건데.’

    초단 시간에 상처가 나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닌가.

    ‘……장미영도 서큐버스니까 그건 잘 알 테고.’

    그러니까 이건 그거다. 자신을 서큐버스 퀸으로 오해하고 있는, 장미영의 지원사격.

    자신의 팬들에게 서은우 혹은 토트윈이라는 아이돌에게 관심을 갖게 만들고, 호감을 느끼도록 만들려는 작업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도 연애 쪽으로는 생각하지 않게끔 잘 조절한 것 같은데.’

    “가서 잘했나 보네? 장미영 님이 이런 데서 언급까지 해 주고 말이야. 하긴, 아까 너랑 같이 나온 예능 보니까 재미있기는 하더라. 칼질 솜씨도 좋던데……. 잠깐만, 그런데 티즐 고크…… 뭐시기는 왜 그렇게 만든 거냐?”

    그건 의식의 흐름대로 말하는 태현우가 그쪽으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하게 입증되었다.

    녀석을 바라보고 있으니, 티즐 고크드르늘의 추억이 되살아났는지 체한 듯 가슴을 두들기고 있었다.

    ‘흐음.’

    에르제는 가만히 다리를 꼬았다.

    서큐버스 퀸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이렇게까지 직접적인 움직임을 보일 정도면, 충분히 좋은 패가 될 수 있었다.

    ‘그것도 배우라면…….’

    자신의 경고 때문인지, 제이와는 달리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장진규가 신경 쓰였는데.

    ‘그렇다면 장진규 쪽으로 엮을 수도 있겠어.’

    안병인이나 윤소희보다는 장미영 쪽이 훨씬 일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 듯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냥 미리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한 감시 정도의 수준이니까.

    에르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장미영의 계정을 찾아서 팔로우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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