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83화
벌컥-!
에르제가 닫은 문이 1초도 안 되어서 다시 열렸다.
“……어째서……!”
장미영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째서 저를 피하시나요, 퀸님……?”
“……아니, 아까부터 왜 자꾸 퀸님이라고…….”
지구에 와서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을 꼽으라면, 지금이 무조건 1위를 차지할 것 같았다.
매혹의 열화 버전인 매료로 자신의 정신을 조작하려 하길래 그냥 그보다 강력한 상위 매료로 막아 낸 것뿐인데.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어째서 자신이 퀸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딜 봐서 서큐버스라고…….’
애초에 서큐버스는 여성체가 아닌가. 자신을 ‘몽마’ 종족으로 착각을 했다면, 남성체인 인큐버스가 맞다.
하지만 장미영은 에르제를 순순히 놔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휙-!
에르제의 팔을 거칠게 잡아끈 장미영은 다시 에르제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두 손을 모으고 천천히 다가온다.
“퀸님……!!”
“잠시만.”
뒷걸음질치던 에르제가 소파에 걸려 그대로 앉았다.
장미영이 그런 그에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건, 어쩔 수 없나.’
퀸이 아니라고 해도 알아먹을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이미 눈이 반쯤 돌아가서는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지 않나. 지금을 위해서 촬영 내내 참고 있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에르제는 지척까지 다가온 장미영을 양손을 들어 그 자리에 멈춰 세우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난 뱀파이어 로드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서큐버스 퀸이 아니에요.”
“……?”
“조금 전에 상위 매료를 느껴서 오해하는 건 이해하는데, 애초에 보시다시피.”
에르제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는 남성체입니다. 애초에 서큐버스가 아니에요.”
“어째서…… 어째서 거짓말을 하시는 건가요?”
그러나 에르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장미영의 몸이 허물어졌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 내었다. 심지어 주먹으로 바닥까지 두들겼다.
파삭, 파삭.
“끄윽, 끅. 지쳤다고요. 퀸, 끅 퀸이 되기 위해서 정기를 과하게 얻는 일도……. 흐으윽, 단순히 정기가 많다고 맘에 들지도 않는 인간을…….”
“아니…….”
바닥에 구멍이라도 날까 싶어서 황급히 에르제가 장미영의 손을 잡아챘다.
그러고는 무릎을 굽히고 장미영과 눈을 맞췄다.
‘원래는 받들어지는 쪽인데, 이게 무슨 꼴인지.’
에르제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전신에서 검은 기운을 끌어올렸다.
뱀파이어 로드가 되기 위해 경쟁자를 꺾었던, 매혹의 힘이 담긴 그의 본질이었다.
사가가각-.
갉아먹는 소리와 함께 뭉게구름처럼 검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자, 장미영의 물기 섞인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이제 내 말을 믿겠어요?”
웬만하면 같이 촬영을 하게 될 동료에게 이런 식으로 주종 관계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는데, 상황이 이쯤 되면 어쩔 수가 없지 않은가.
애초에 계속해서 퀸이라고 오해를 받는 게 더 곤란한 상황이고 말이다.
에르제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힘을 거두었다.
‘표정을 보니 충분한 것 같네.’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주종 관계가 되는 걸 원하지는 않는데.’
지구에서는 그냥 어떠한 종족도 아래로 두지 않고 조용한 곳에서 일족들과 다시 살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서큐버스니 늑대인간이니 하는 것들과 다시 얽히지 않고 말이다.
그렇게 에르제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장미영은 감탄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르제는 당연히 장미영이 이제 자신의 말을 이해했을 것이라고 여겼으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에르제의 귀를 의심케 만들었다.
“역시 퀸님이세요!!”
“……뭐?”
저도 모르게 반말을 뱉어 낸 에르제를 장미영이 ‘와아!’ 하는 표정으로 손바닥을 짝 부딪쳤다.
“예전에 저를 위해서 뱀파이어를 잡아 주시더니, 이제는 로드까지 잡아먹으셨을 줄이야……!!”
도대체 무슨 사고방식이야.
어떻게 하면 이게 그렇게 이해될 수가 있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장미영이 하는 말을 듣던 에르제는 그 순간, 문득 떠오른 기억에 움직임을 멈췄다.
‘잠…… 깐만!’
뱀파이어를 먹은 서큐버스 퀸?
단순히 퀸님, 퀸님 하니까 떠올리지 못했는데, 생각해 보니 자신은 서큐버스 퀸을 만났던 적이 있었다.
윤치우와 같이 던전에 갇혔을 때, 그때 던전주가 서큐버스 퀸이지 않았던가.
‘……분명 그 녀석이 뱀파이어를 먹고 힘을 흡수했다고 했는데…….’
그 말에 열이 뻗친 자신이 서큐버스 퀸의 힘까지 다시 회수해 갔고 말이다.
“아아.”
그제야 전반적인 상황이 이해가 간 에르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해받을 만…… 했구나.’
서큐버스들에게 퀸의 존재는 뱀파이어 로드와 같다.
종족을 통솔하고 힘의 원천이 되는 존재.
그렇기에 자신이 서큐버스 퀸을 죽이고 난 뒤 서큐버스 종족 내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났을 것이고, 그다음으론 서큐버스 퀸을 찾거나 혹은 새로운 서큐버스 퀸을 옹립하는 것으로 일이 진행되었을 터.
그런 와중에 서큐버스 퀸의 힘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 나타났으니, 장미영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내가 죽였다고 말을 해야 하나?’
그러면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을까?
하지만.
“돌아오신 거죠? 그렇죠? 저와 함께했던 수많은 추억을 잊지는 않으신 거죠!?”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팔에 얼굴을 묻고 다시금 펑펑 울기 시작한 장미영의 모습에 에르제는 입을 꾹 다물었다.
“…….”
추억이 많았구나.
‘내가 죽였는데’라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많이. 아주 많이.
눈을 꾹 감아 버린 에르제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잊…… 지 않았어.”
토닥토닥.
그러고는 엎어지다시피 한 장미영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흐윽, 끅. 끄으윽, 다행이에요.”
“그…… 래.”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에르제는 그냥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 * *
오열하던 장미영이 겨우 진정한 뒤, 에르제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 매니저는?”
“아, 다른 출연진들과 친목을 좀 쌓겠다고 말해 두었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슬쩍 시계를 바라본다.
“……그런데 슬슬 돌아가야 할 것 같기는 하네요.”
장미영이 울상을 지었다.
“나도 매니저 올 때 됐어. 그러니까 그만 돌아가도록 해.”
이윤은 에르제가 촬영하는 모습을 최대한 지켜보다가, 잠시 다른 곳에 예능 출연을 한 태현우 쪽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꽤 전에 그쪽이 끝났다는 이야기가 왔기에 에르제를 데리러 올 때까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요.”
하지만 칭얼대는 장미영을 밀어내지는 못했다.
그녀와 서큐버스 퀸과의 관계는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장미영에게 서큐버스 퀸은 인간 세계로 치면 친언니나 다름없었다.
죽이 잘 맞았던 둘은 던전 밖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다니기도 했고, 몽마 활동을 같이하기도 했단다.
대부분은 그녀가 서큐버스 퀸과의 추억을 줄줄이 읊어서 알게 된 정보였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맞장구를 치다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래서 에르제가 선택한 것은 부분 기억 상실이라는 효과적인 변명이었다.
서은우라는 뱀파이어 로드의 몸을 차지하면서 생긴, 작은 부작용이라고 해야 할까.
- 로드의 힘이 너무 강했기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이었어.
에르제는 그렇게 변명을 시작했는데, 되는 대로 주워 담았음에도 2500년의 연륜 덕분에 제법 그럴듯한 스토리가 완성되었다.
- 정말 힘겨운 싸움이었지. 하지만 서은우는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어. 내가 전투 불능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가까이 다가왔거든.
그리고 몽마로 현현해 잠에 빠뜨리고 꿈에서 정신을 장악했다는, 다소 영웅담과도 같은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런 영웅담의 끝에 항상 존재하는 고난인 ‘서은우의 몸에 갇히고 말았다.’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했고 말이다.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였음에도 장미영은 깊은 감명을 받은 듯했으니, 꽤나 성공적인 스토리텔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대충 둘러대기는 했는데.’
한 가지 부작용이 있다면, 이제는 장미영이 완전히 자신을 서큐버스 퀸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
에르제는 곤란해졌다는 듯,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오해를 푸는 건 당장은 불가능해졌고, 차라리 그걸 이용하는 수밖에 없나.’
서큐버스 퀸과 장미영의 관계가 상당히 깊은 듯 했으니, 나중에 다른 종족과 관련된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에르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돌아가자.”
“……네에.”
장미영의 아쉬움 가득 담긴 목소리에 에르제가 말했다.
“어차피 또 촬영장에서 볼 텐데 뭐가 그렇게 아쉬워.”
“그냥, 오랜만에 뵈어서 그런가 봐요.”
에르제의 말에 장미영이 배시시 웃었다.
‘……일단 주의는 줘야겠지.’
자신보다 연예계에 오래 몸 담고 있던 서큐버스라 해도, 감정이 이성을 넘어서는 경우도 있으니까.
“오늘 일은 절대 티 내지 말고. 무슨 말인지 알지?”
“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시원시원한 대답에 에르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내내 잠겨 있었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
“?”
그리고 그곳에는 두 사람이 방문을 두고 대치 중인 묘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하나는 아까부터 어디로 갔는지 찾았던 플랑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거 봐! 이거 보라고!!”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플랑의 넓은 어깨 너머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박장호였다.
“왜! 미영 씨가 저놈 방에서 나오는 겁니까!”
“소란 떨지 마라. 남녀 사이를 방해하는 남자만큼 추한 것이 없다.”
“이익……!!”
플랑에게 가로막혀 오지는 못하고 그저 이만 갈고 있는 모습에 에르제의 정신이 멍해졌다.
‘오늘…… 무슨 날인가.’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아까 박장호한테 매료를 거는 것 같더니.’
에르제가 대충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 장미영이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퀸님이 나설 필요 없으셔요.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처리라는 말이 좀 무섭게 들리기는 하지만, 데뷔한 것으로 따지면 장미영이 자신보다 2년은 선배였다.
이런 일에 관해서는 자신보다 훨씬 원활하게 처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부탁할게.”
“걱정하지 마셔요.”
에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플랑의 등을 툭 쳤다.
“가자.”
그의 말에 플랑은 군말 없이 에르제의 뒤를 따랐다.
“윽……!!”
박장호는 옆을 스쳐 지나가는 에르제에게 한 마디 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플랑이 슬쩍 노려보니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곧 후다닥 뛰어서 장미영에게로 향했다.
그 둘과 거리가 좀 멀어졌다 싶을 때, 에르제가 낮게 한숨을 쉬며 플랑에게 말했다.
“남녀 사이니 뭐니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박장호가 오해하잖아.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던 거야?”
“로드가 안으로 끌려 들어갈 때부터였다.”
“……안 보였는데?”
플랑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천장에 숨어서 밀착 경호 중이었다.”
“……그렇구나.”
에르제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앞으로는 그냥 정상적으로 해. 암살자 같은 거 없으니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음.”
플랑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걷는 도중에 자신의 팔짱을 끼더니 진지한 얼굴로 조언했다.
“로드, 여자 울리는 거 아니다.”
“?”
잠깐만, 우는 소리를 들었으면 분명 장미영과 나눈 다른 대화도 들었을 텐데……. 어째서 박장호한테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말을 하고 있었던 거지?
‘설마.’
에르제가 걸음을 멈추자, 뒤를 따라 걷던 플랑도 같이 멈춰 섰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곧 플랑이 히죽 웃었다.
“아, 로드가 아니라 퀸님인가. 호칭을 실수했다.”
이 자식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에르제는 반쯤 죽이는 것과, 그냥 죽이는 것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