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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80화 (80/307)
  • 제80화

    80화

    에르제는 일족의 참교육 후,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경호원으로 있던 플랑을 제외하고 두 명의 스태프가 더 보였다.

    “…….”

    아마도 플랑의 머리를 바닥에 꽂았을 때 났던 큰 소리 때문에 온 듯했다.

    “이게…… 도대체 뭐예요?”

    “어떻게 해야 바닥이…….”

    사람 머리만 하게 파인 돌바닥을 살피며, 스태프 둘은 꼿꼿하게 서 있는 플랑의 눈치를 보았다.

    에르제는 변명 한마디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플랑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어쩌겠나.

    자신이 만들어 놓은 흔적이고, 뇌도 근육으로 만들어진 플랑이 제대로 된 변명을 할 리도 없으니.

    때문에 에르제는 스태프들에게 다가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안녕하세요. 고생 많으시네요.”

    “아, 은우 씨.”

    “어떻게 된 일인지 혹시 아세요?”

    제발 이 괴상한 상황에 해답을 내려 달라는 듯한 눈망울이었다.

    ‘민주혁의 목을 물었을 때도 완벽하게 먹힌 변명이 있었지.’

    에르제는 플랑을 슬쩍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기 계신 경호원분이 제가 화장실 간다니까 같이 따라오셨는데, 그때 하필 바닥에 벌레가 지나가서…….”

    “어……. 벌레요?”

    “네. 무슨 벌레인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그걸 보고 놀라니까…… 그대로 달려와서 저 큰 주먹으로 때려 부수시더라고요.”

    다행히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닌지, 플랑은 그저 말없이 벽에 붙어서 정자세를 유지할 뿐 이렇다 할 토를 달지는 않았다.

    스태프들은 플랑의 몸집과 거대한 주먹의 크기를 보고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가능…… 할지도 모르겠네요.”

    “죄송해요.”

    에르제는 일단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괜히 제가 벌레를 보고 놀라 가지고.”

    “아, 아녜요! 저도 집에서 벌레 나오면 화장실로 도망가고 그러거든요.”

    말을 받은 스태프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마치 에르제에게서 의외의 흥미로운 면모를 발견했다는 듯이 말이다.

    괜히 멋쩍어진 에르제가 볼을 긁적이고 있을 때.

    다른 스태프 하나가 조심스럽게 에르제에게 플랑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근데 저분 이마에서 피가 나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기실에 구급 도구함이 있어서요.”

    “아……. 네. 근데 왜 손이 아니라 이마에서 피가…….”

    그러면서도 플랑을 계속 흘끗대는 게 뭔가 의심스러운 모양이다. 에르제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저희 쪽 분이니 저희가 치료하는 걸로 할게요. 그럼 고생하세요!”

    “아, 네네! 이따 무대, 파이팅 하세요!”

    성공적으로 스태프들을 따돌린 후, 에르제는 플랑과 같이 대기실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도중, 플랑이 이마의 피를 닦아 내며 에르제에게 피 묻은 손을 내밀었다.

    “로드, 피 아깝다.”

    “……됐어.”

    에르제는 그의 손을 밀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분명 저 피를 마셨다가는 뇌세포가 1억 개는 죽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요즘 머리 쓸 일투성이인데.’

    에르제는 아휴, 하고 한숨을 뱉었다가 이내 플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키가 어찌나 큰지 목이 아플 정도로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

    플랑이 무심한 눈으로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세리나가 자신을 보고 감격했던 것과는 다르게 참으로 무신경한 반응이었다.

    아마도 ‘늑대인간 하나 잡으러 왔는데, 운이 좋게도 로드였다.’ 정도로 머릿속에서 정리가 끝나지 않았을까.

    단순해서 정말 부럽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에르제는 궁금증 목록의 99%를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원하는 대답은 하나도 얻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다.

    에르제는 플랑이 충분히 대답할 수 있는 것들만 엄선해서 물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뱀파이어 상태인 거야?”

    세리나는 분명 인간의 아이로 태어났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피를 받아서 다시 뱀파이어가 되었고.

    그러나 오늘 플랑이 보여 준 미친 신체 능력은 인간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었다.

    만약 인간이었다면, 마지막 자신의 공격에 이마가 박살이 났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플랑은 에르제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을 꺼냈다.

    “라하임이 도와줬다.”

    “……뭐? 누구?”

    “라하임. 로드, 기억력 안 좋나?”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라하임이라는 이름이 왜 여기서 갑자기 튀어나와.

    라하임이 지구에 왔다는 것은 높은 확률로 추정 중이었다. 하지만, 그게 플랑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는 아예 생각도 못 했다.

    에르제가 급하게 다시 물었다.

    “라하임을 어디서 만났는데? 아니, 지금 라하임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플랑은 잠깐 걸음을 멈춰서 이마를 찡그렸다.

    “음……. 라하임을 본 건 대략 300년 전이다. 그때 뱀파이어가 되게 도와줬다.”

    “……300년 전?”

    “그때는 조선인가 하는 나라였다. 대한민국 아니었다.”

    “그 이후에는?”

    “모르겠다. 일족들을 찾고 있다고 했는데, 그 이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럼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음.”

    플랑이 그렇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쉽네.”

    에르제가 이마를 짚자, 그가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그런 말을 했다. 자기 밑으로 들어올 생각 없냐고.”

    “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고?”

    “그래서 거절했다. 내가 섬기는 건 로드 하나다.”

    “……그래, 고맙다.”

    플랑의 한결같은 충성심에 감사 인사를 한 에르제는 곧 라하임에 관한 생각을 떠올렸다.

    ‘……세력이라도 모으고 있었던 건가.’

    하지만 라하임이 왜?

    녀석의 행보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충성심만으로 따지면 플랑에게도 절대 뒤지지 않는 녀석이 어째서 세력을 모으고 있었던 걸까.

    게다가 마녀 쪽에 자신을 불러낼 수 있는 방법을 전해 주기도 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내가 오기 전까지 일족들을 모아 두려고 한 건가?’

    그렇게 생각을 하니, 또 그 생각이 그럴듯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세리나는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넘어왔기 때문에 라하임이 찾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고, 플랑 같은 경우엔 자신이 라하임이었어도 포섭하는 것을 포기했을 것이다.

    아무리 자초지종을 설명해도 밑으로 들어올 리가 없다고 판단했을 터. 게다가 배신할 녀석도 아니니 자유롭게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라하임은 똑똑하니까 여기까지 생각했겠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 플랑을 만난 것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라하임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건 똑같네.’

    다만, 라하임에 관해서는 여전히 진전이 없었다.

    그래도 라하임이 지구에 있다는 것은 추측에 불과했는데, 플랑이 직접 만났다고 하니…… 그 정도 소득은 있다고 봐도 될 듯했다.

    ‘100퍼센트와 99.9퍼센트는 엄연히 다르니까.’

    대충 생각을 정리한 뒤, 에르제는 다른 의문을 플랑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는 날 어떻게 알아보고 온 거야?”

    늑대인간으로 오해했다고 해도, 어찌 되었든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는 뜻이 아닌가.

    플랑이 딱히 TV나 아이돌에 관심이 있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아니, 관심이 많았다면…… 은발이어도 내가 에르제라는 걸 TV로 보고 알아챘겠지.’

    에르제가 눈썹을 씰룩거리고 있자, 플랑이 자신의 주머니를 툭툭 쳤다.

    “스마트폰으로 봤다. 볼 생각 없었는데, 기사가 너무 많았다.”

    “아아.”

    “그래서 곧장 이곳 경호원으로 지원해서 쳐들어왔다. 늑대인간인 줄 알았다.”

    그냥 우연이었구나. 참으로 플랑다운 이유였다.

    ‘경호원으로 찾아낼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박수를 쳐 줘야겠지.’

    일단 아육시와 마찰이 있었던 덕분에 관심이 없던 일반인들에게까지 토트윈의 존재가 널리 알려진 게 큰 듯했다.

    우연이긴 해도, 일어날 확률이 높았던 우연이라고 할까.

    에르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대기실이나 팬사인회 하고 있을 때 공격하지는 않았네.”

    “아, 그거.”

    플랑이 걸어가다가 팔짱을 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을 때 하는 그의 버릇이었다.

    “인간들이 너무 많았다. 싸우면 인간들 다친다.”

    “아하하.”

    그의 대답에 에르제가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일족들을 다스렸을 때의 이념을 아직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기특함 때문이었다.

    에르제는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들겼다.

    “잘했어. 앞으로도 그렇게 해.”

    “음.”

    플랑이 고개를 다시 한번 주억거리며 웃었다. ……아니, 그냥 볼 근육이 움직인 건가?

    에르제는 대기실 앞에 서서 그에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로드 찾았다. 그럼 다른 데 갈 생각 없다.”

    “뭐……. 우리 회사 아이돌이라도 하려고?”

    플랑이 고개를 저었다.

    “로드 있는 곳, 경호원으로 들어간다. 오늘 해 봤는데 꽤 재미있다.”

    “…….”

    소속사 부서에 전문 경호 팀이 따로 있었던가? 매번 업체에 연락해서 구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산통을 깨기도 미안해서 에르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는데, 만약 실패하면 세리나하고 같이 있는 쪽으로 하자.”

    “……세리나?”

    플랑은 누구였지, 하고 떠올리다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세리나? 그 꼬맹이?”

    “맞아. 저번에 세리나가 공격을 당했거든. 그래서 안전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서. 네가 있으면 든든하니까.”

    “음. 그래도 로드가 우선이다.”

    플랑의 계획이 잘 안 될 것 같긴 했지만, 에르제는 일단 그의 말에 동의를 표해 주었다.

    세리나의 경호야 그때 가서 다시 말하면 될 터.

    “일단 오늘은 마무리까지 잘 부탁할게.”

    에르제는 플랑의 등을 다시 한번 두들기고는, 그를 밖에 세워 두고 대기실 안으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만난 든든한 지원군 덕분에 에르제의 표정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 * *

    팬사인회를 무사히 마치고 그로부터 3일 뒤.

    에르제는 ‘알바 몬스터’ 시즌 2를 위해 촬영장을 찾았다.

    오늘부터 촬영에 착수해서 미리 총 3회분을 찍어 둔다고 하더라.

    에르제는 기어코 토트윈의 개인 경호 인력이 되어 따라온 플랑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로 장 대표를 설득했을 줄이야.’

    회사 내부에 경호 팀이 생긴 것은 아니었고, 그냥 매니저 하나 추가하듯 경호원 하나 추가한 정도이긴 했지만 말이다.

    도대체 무엇으로 장 대표를 꼬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곁에서 자신을 지켜 줄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것은 꽤나 큰 의미로 다가왔다.

    과거 로드로 일족들을 다스렸을 때,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경호대가 다시 돌아온 기분이 들기도 했고 말이다.

    에르제는 매서운 눈으로 주변을 경계하는 플랑을 구경했다.

    곧 그런 그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이야~. 서은우 씨, 오랜만?”

    이번 알바 몬스터를 기획하고 촬영하게 된 임재원 PD였다.

    “오.”

    에르제도 그를 알아보고 고고하게 인사를 건넸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임재원 PD는 과거 토트윈이 첫 예능을 했던 ‘히어로’라는 프로그램의 PD였다.

    “그때 이후로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내가 그때 우리 서은우 씨 팬이 되어서 말이야. 이번에 새로 예능을 기획하게 되었는데, 바로 서은우 씨 얼굴이 떠오르더라고.”

    “아이고, PD님.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옆에 있던 이윤이 바로 웃는 얼굴로 그의 말을 받았다.

    “저번에 보니까 잘하더라고. 좋게 볼 수밖에 없던데?”

    임 PD는 실실 웃으며 이윤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고정으로 써 보려고.”

    그러더니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조금 붉혔다.

    “뭐……. 내가 아직 TSN 소속이라 좀 그렇기는 한데. 저번 일이야 그…… 아육시 그쪽 PD 양반이 잘못한 거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그럼요, 그럼요.”

    이윤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손사래를 쳤고, 그제야 임 PD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면 오늘 첫 촬영이니까 서은우 씨는 저기 저쪽에 출연자들이랑 인사 나누고 있으라고. 나는 아직 준비할 게 좀 있어서.”

    임 PD는 모여 있는 사람들 쪽을 가리키고는 이내 자리를 떴다.

    ‘예능 첫 고정 출연이라.’

    예능이란 게 잘만 되면 몇 년이고 TV에 나올 수 있다고 하더라.

    ‘그럼 열심히 해야지.’

    그는 처음 보는 출연자들에게로 걸어가며, ‘일하는 로드’로서의 전의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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