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78화
“서은우?”
장 대표가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이야?”
“앉아도 될까요?”
“어, 어어……. 그래.”
장 대표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그를 빈 의자에 앉도록 권했다.
에르제는 자리에 앉은 채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지간히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장 대표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있으니 장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어?”
그러더니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인다.
“혹시…… 회사를 나가겠다거나…….”
“?”
그 말에 에르제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건 아니고, 줄 게 있어서요.”
“줄 거? 뭐…… 탈퇴서 그런…… 거?”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에르제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지금 상황이 좀 심각하죠?”
“그렇…… 지. 좀 많이?”
“그럼 증거가 있어도 여전히 심각할까요?”
“?! 증거?”
장 대표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증거?!”
그에 반해, 에르제는 여전히 태연한 모습으로 스마트폰을 그에게 내밀 뿐이었다.
“그야 아육시 방영분이랑 김지원이 한 말들이 전부 개소리라는 것을 입증할 증거죠.”
“……그런 게 있다고? ……너한테?”
은근한 기대감이 실린 목소리에는 의심스럽다는 기색도 같이 섞여 있었다.
“수상해서 연습 때 전부 녹음을 해 두었거든요.”
에르제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김지원에게 처음 위화감을 느꼈을 때부터 에르제는 미리 준비를 해 두었다.
‘처음에는…… 물론 헛다리를 짚었지만.’
김지원 그리고 제이. 분명 둘 사이에 무언가 거래가 있었을 테고, 그렇다고 하면 분명 김지원의 트롤링일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LAK까지 데리고 와서 토트윈을 짓밟으려는 게 아닌가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트윈과 LAK의 앨범이 동시 발매되고, 음원 성적으로 탈탈 털리는 게 아니라면 모를까.
고작 예능 형식의 서바이벌에 나와서 대결 무대에서 진다? 그것도 참가자들 4명까지 포함시킨 상태에서?
‘그건 팬들이 방어하기에 너무 쉽지.’
김지원을 비롯한 나머지 참가자 4명이 못했다고 몰아가면, LAK와 토트윈을 직접 비교하는 게 힘들어지니 말이다.
아니, 솔직하게 LAK에게 무대에서 지면 뭐 어떤가?
잠깐의 타격은 있어도 그게 제이가 그렇게까지 공들일 만한 계략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번 일로 놈은 토트윈을 아예 망가뜨려서 자신이 뱀파이어 진영에 의지하도록 만드는 게 목적인 듯했으니까.
‘거기다 김지원의 묘하게 적극적인 자세와 토트윈 멤버들을 대하는 태도…….’
에르제의 위화감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고, 그런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변했다.
‘어째서 김지원은 토트윈에게 벌벌 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는가? 그리고 동료들을 같은 피해자인 척 감싸 주는 모습을 보이는가?’
나열하면 끝도 없을 그의 이상한 행동과, 지금까지 김지원이 방송에서 보여 줬던 모든 것들을 종합해 봤을 때.
에르제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TSN에서는 김지원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좋게 꾸미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됐을 때, 토트윈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오랜 시간, 인간들의 암투를 지켜봐 온 에르제였다. 개인과 개인, 평민과 귀족, 더 나아가 국가 대 국가까지.
그런 그에게 이 정도의 어설픈 계획은 눈에 뻔히 보였다.
에르제는 진즉에 편집으로 장난질을 칠 것이라는 걸 눈치챘고, 제이가 짜 놓은 판을 뒤집을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단순히 방어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역공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에르제는 녹음 파일을 재생해서 장 대표에게 넘겨주었다.
에르제 : 이번에 동양풍을 섞어서 퓨전 느낌으로 가면 어떨까요?
이호진 : 확실히 좋은 것 같은데요?
에르제 : 구미호와 그것에 홀린 사람의 노래로 감정선을 잡고…….
안단테 : 은우 형, 아뱅이네요.
토트윈이 이번 무대에 대한 아이디어를 대부분 냈고.
김지원 : 음……. 구미호와 그것에 홀린 사람, 그 방향으로 안무를 구성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민주혁 : 서사도 그렇고, 안무도 맞춰서 가야죠, 당연히.
방송에서 김지원이 퓨전부터 구미호 등의 의견을 내는 장면은 그저 다른 사람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는 게 그대로 녹음 파일에 담겨 있었다.
즉, TSN에서 인물들의 대사를 조작하여 방송에 내보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김지원은 무대 아이디어와 준비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에르제에게서 스마트폰을 받아 들고 총 21개의 녹음 파일을 들은 장 대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 개X끼들이.”
평상시 온화한 장 대표의 입에서 곧바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어쩐지. 데뷔조에도 간신히 턱걸이를 한 놈이 그런 의견을 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저희가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믿고는 있었지만, 사람들은 방송을 믿으니까 그렇지.”
“아, 참고로 동영상도 있어요.”
에르제는 안무 연습을 하는 동영상도 틀어 주었다.
당시 윤치우가 에르제의 스마트폰으로 찍자고 했으나, 일부러 거절했던 그날이었다.
그때 에르제는 일부러 구석에 스마트폰을 숨겨 두고 그날 촬영 전체를 찍고 있었고, 덕분에 녹음 파일과 비슷한 장면들이 영상 기록으로도 남아 있었다.
음성이니까 조작 아니냐는 헛소리마저 원천 차단할 수 있는 완벽한 증거였다.
“후우, 후우우.”
장 대표는 안도와 분노의 한숨을 동시에 내뱉으며, 최소한의 냉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방송국에 가서 먼저 따져야 하나? 원본 내놓으라고?”
“글쎄요.”
에르제는 장 대표의 혼잣말에 대답해 주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예전에도 통신 기록을 가지고 조작하고 장난질한 경우가 꽤 있었지만…….’
대부분 증거를 직접 들이밀어도 원본은 끝까지 고수하더라.
이미 파기한 기록이다, 망가졌다……. 인간의 상상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하는 다양한 변명들이 있었다.
‘여기라고 다르지 않겠지.’
그래서 에르제는 다리를 꼬며 말했다.
“아마 온갖 이유를 대면서 기록이 없거나 공개하지 못한다고 할 것 같은데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장 대표는 자리에 털썩 앉으며, 에르제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렇게 상대방의 수를 미리 읽고 녹음까지 한 에르제에게 장 대표는 자신도 모르게 매달리고 있었다.
“혹시 무슨 좋은 생각 있어?”
그래서 날 당당하게 찾아온 거지? 장 대표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에 부응하듯 에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폰을 흔들었다.
“저쪽에서 먼저 시작한 일이에요. 그러니까 저희도 사정 봐줄 이유가 없죠.”
“아.”
장 대표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지?’라는 얼굴로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바로 친한 기자들을 불러서 뿌리는 게 어떨까요? 저번 방송은 죄다 조작된 내용뿐이고, 실체는 김지원이 조별 과제 버스충이라는 걸요.”
“……그런 말도 아냐?”
에르제는 USB를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멤버들한테는 먼저 녹음 파일에 대해 말했고, 이후에 안단테가 USB에 파일을 다 옮겨 줬어요. 이건 그 복사본이에요.”
“…….”
장 대표가 말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분노로 인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걸 공개하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이상적인 결론? 아니면 현실적으로 말씀드릴까요?”
“……둘 다.”
장 대표의 말에 에르제는 꼰 다리를 풀었다. 그러고는 장 대표 쪽으로 상체를 살짝 숙였다.
“이상적으로는, 그쪽에서 잘못을 전부 인정하고 사죄하는 거겠죠. 하지만, 아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예요.”
늘 그렇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언제나 책임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가 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 아마 적당한 선에서 꼬리를 자를 겁니다.”
다만 머리가 어디고 꼬리가 어디인지는 끝까지 지켜봐야겠지만 말이다.
‘만약 제이가 PD까지 좌지우지할 정도라면…… 아예 거기까지 잘라 버릴 수도 있어. 그리고 그럴 가능성이 제일 높고.’
이미 녹음 파일로 제이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놈에게 얼마나 타격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쉽게 꼬리를 잘라 내고, 아육시는 PD 교체 후에 그대로 이어지겠지.
‘……그래도 불길을 다른 데로 유도해야 하니까.’
에르제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은 이제 저쪽으로 옮겨붙을 거예요. 그것을 진화하는 건 저쪽에서 알아서 할 일이고요.”
“……그건 그렇지.”
“일단은 불을 옮겨붙이고 지켜봐요.”
“…….”
결심을 내린 듯, 장 대표의 끄덕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가 볼게요.”
“그래, 고맙다.”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회사에서 알아서 해 줄 터.
아마 녹음본이나 영상 같은 것을 올려 줄 만한 기자나 언론을 찾아서 뿌리지 않을까 싶다.
‘이게 공개가 되면.’
토트윈은 이제 방송국에서 적극 견제할 수준의 아이돌이 될 것이다. 본인들이 새로 런칭할 아육시 아이돌의 유력한 경쟁 상대라고 TSN 방송국 스스로가 인정한 꼴이 되었으니까.
‘초대한 값을 이런 걸로 받아 갈 생각은 없었는데, 뭐…….’
이곳에 그런 말이 있더라.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픽 웃은 에르제는 문고리를 잡아서 돌렸다.
* * *
[ 김지원 그리고 TSN, 둘의 유착 관계는 언제부터? ]
[ 아육시 PD, 머리 숙여 사죄. 시청률을 위해서 그랬다. ]
…….
전날까지만 해도 토트윈과 모카 엔터테인먼트를 성토하던 기사들로 가득했는데, 이제는 완전히 타깃을 바꾼 기사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타깃은 당연히 김지원과 아육시의 PD였다.
화살은 방향을 틀어 그 둘에게로 날아갔다.
단순한 녹음 파일 한두 개였다면 어영부영 넘어갔을 수도 있었겠지만, 에르제가 녹음한 파일이 연습 시간 대부분을 녹음한 것이었다는 게 크게 한몫을 했다.
공개된 녹음 파일과 방송 대사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동영상으로 촬영된 부분까지도 같았다.
당연히 방송국 쪽에서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보관된 파일이 없다고 발을 뺐다.
그것도 아육시의 PD가 전부 은폐하기 위해 날렸다고 죄를 뒤집어씌워서 말이다.
당연히 PD의 프로그램 하차와 퇴사 수순이 이어졌고, 제이는 그렇게 꼬리를 자르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후우.”
최대한 빠르게 수습을 마친 제이는 근 며칠간 받았던 스트레스를 떠올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서은우…….”
그러고는 이번 계획을 제대로 망쳐 놓은 장본인을 떠올렸다.
“분명 그 새끼야.”
녹음 파일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그것도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모든 것이 전부 녹음되어 있는 파일이.
나머지 참가자 3명? 아니, 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알지 못했을 거다.
토트윈의 나머지 놈들도 마찬가지다.
연습 때 똑같이 참가했으면서 이런 짓을 할 놈은 서은우밖에 없다.
놈은 이미 모든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X발!”
제이의 손을 떠난 나무 의자가 그대로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물론 자신까지 엮이지는 않았지만, 그 새끼 때문에 토트윈의 입지가 더욱 굳건해졌다.
나름대로 치밀하게 준비한 계획을 서은우가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토트윈 불쌍하다.’, ‘올해 신인으로 분류되는 토트윈을 아육시에서 이렇게까지 견제할 정도인가?’ 등등.
게다가 제일 큰 문제는 토트윈에 대해 모르던 사람들까지 그들에 대해서 소상히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팬만 늘려 준 꼴.’
토트윈의 날개를 꺾으려 했는데, 오히려 더 높이 날도록 날개 하나를 더 붙여 준 꼴이 되어 버렸다.
곧 서은우에 대한 분노가 애먼 곳으로 향했다.
꾸우욱-.
제이는 발밑에 있는 인간의 등을 더욱 세게 발로 누르며 이를 갈았다.
“너 말이야…….”
“크흑, 컥.”
김지원이 입에서 피를 토했다.
“녹음되고 있는 것도 눈치 못 채고 도대체 뭘 한 거지? 내가 로드님께 죽을 만큼 털리는 게 그렇게 보고 싶었어? 그런 거지? 어?”
꾹, 꾹, 꾸욱.
제이가 발바닥에 힘을 줄 때마다, 김지원의 등은 바닥에 붙을 정도로 꺾였다.
“제, 제…… 발 저는…… 그저 시키…… 는.”
“그래, 그러니까 왜 시키는 것만 할까?”
제이가 김지원의 등에서 발을 떼며 무릎을 굽혔다. 그러고는 개구리처럼 널브러진 김지원의 머리를 잡아 올렸다.
“처음부터 하등 종족한테 일을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 다. 그냥 다 내 잘못이다.”
김지원은 일이 끝나면 고라니 엔터테인먼트에서 데뷔하는 줄 알고 있었겠지만, 처음부터 놈을 토사구팽 시킬 생각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데, 그대로 둘 수 없지 않은가.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제이는 입에서 줄줄 피를 흘리는 김지원의 입에 자신의 피를 강제로 집어넣었다.
죽을 확률 90%, 폐인이 될 확률 9%.
이 방식이면 살아남을 확률이 1%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네 형이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궁금하지?”
제이가 잡고 있던 머리를 놓자, 김지원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궁금하면 한번 살아남아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