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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75화 (75/307)
  • 제75화

    75화

    처음 예상과는 다르게, 토트윈과 참가자 넷의 경연 준비는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가을비’는 7080 발라드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손도 대지 못할 정도의 곡은 아니었다.

    최근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들으며 예전 음유시인일 때의 감을 되찾고 있는 에르제는 덕분에 모두가 솔깃할 만한 제안을 꺼내 들 수 있었다.

    “아예 퓨전 국악 느낌으로 편곡을 해 버리죠.”

    “원곡에 사용된 악기 숫자가 많지 않아서…… 현대적인 느낌으로 해석하면…… 확실히 좋을 것 같은데요? 오히려 그쪽이 손쉽겠네요.”

    이호진이 먼저 동의를 했고, 안단테도 머릿속에서 자체 편곡을 해 보더니 곧바로 찬성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이호진과 안단테가 머리를 맞대고 편곡에 열을 올렸고.

    “끝났어요!”

    에르제의 의견이 꽤 괜찮았는지 아이디어가 샘솟은 둘의 편곡은 이틀 만에 마무리되었다.

    DOONG, DOONG, DOONG―.

    채채채챙, 챙!

    한국의 전통 악기와 더불어, 현대적인 사운드까지 잘 배합한 편곡이었다.

    기존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면서 아이돌 무대를 보는 것처럼 흥이 나는 무대였다.

    그러나 에르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곧장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일단 기저에 깔려 있는 감정선이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는 거니까…… ‘전통’이라는 점에 맞춰서 곡의 서사도 그런 방향으로 잡죠. 구미호와 그녀에게 홀린 사람의 노래로.”

    “오……?”

    “좋은데요?”

    모두 그럴듯하다면서 눈을 끔벅이며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안단테가 그에게 엄지를 세워 주었다.

    “은우 형 아뱅이네여.”

    “아뱅?”

    “아이디어 뱅크여.”

    “아.”

    에르제는 피식 웃었다.

    음유시인 생활만 해도 현재 살아 있는 전 세계의 가수들보다 연차가 높은 자신이다.

    차원적인 정서와 언어가 달라서 그렇지, 두 차원을 잘 조화시킬 수 있다면 이런 것쯤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에르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김지원이 그의 말을 되짚었다.

    “음……. 구미호와 그것에 홀린 사람, 그 방향성으로 안무를 구성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서사도 그러니 안무도 맞춰서 가야죠, 당연히.”

    민주혁이 그의 말에 대답하며 손바닥을 짝 쳤다.

    “일단 퓨전 국악 느낌으로 간다고 정했을 때 제가 생각해 둔 안무 베이스가 있는데, 거기에 새로운 콘셉트에 맞게 같이 바꿔 보는 게 좋겠네요.”

    “오케이.”

    처음에 느꼈던 막막했던 기분이 사라지니, 다들 의욕이 넘쳤다.

    “지금! 원, 투 앤 쓰리, 포.”

    “여기에서 곡의 에너지가 너무 세니까 시선을 허공으로 빼서 에너지를 좀 흘려보내죠.”

    TV에서 보인 모습과는 다르게, 김지원을 포함한 4명의 참가자들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 거기서 동선 겹치면 어떻게 해요! 집중 안 해요!?”

    “죄…… 죄송합니다.”

    물론 타고난 성격들은 어쩔 수 없는 것 같긴 하지만.

    “연습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실수할 수도 있죠. 같은 팀인데, 격려 위주로 열심히 해 봅시다.”

    생각보다 김지원이 중재를 잘해 주고 있기는 했다.

    ‘……확실히 이상하단 말이지.’

    때문에 보험을 들어 놓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 이 경연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게 뭘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은우야! 이거 안무 모니터링 하게 폰으로 좀 찍자!”

    윤치우가 거울 앞에서 에르제를 보고 소리쳤다. 그러자 에르제는 고개를 저었다.

    “내 거 지금 충전 중이라서 다른 사람 걸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

    윤치우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다음으로 가까이 있던 민주혁의 스마트 폰으로 대체했다.

    “제 건 이쪽 방향에 놓고 찍겠습니다.”

    김지원은 스스로 나서서 협조적으로 굴었고 말이다.

    ‘…….’

    그냥 정신 지배를 해 버릴까 싶은 욕구가 올라왔으나, 인간을 상대로 썼다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에르제는 꾹 참았다.

    그렇게 일주일의 준비 기간 중 4일이 지났을 때.

    “끄으으읕!!”

    모든 준비가 끝났다.

    편곡에서부터 안무 그리고 무대에서 쓸 소품과 연출까지 말이다.

    “무대 위에 올릴 소품은 제작진 측에서 지원 가능하다고 했으니까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김지원의 말을 마지막으로, 이제는 경연을 위해 반복 연습을 통해 숙달하는 작업만 남았다.

    “3일이면 충분하죠?”

    에르제는 그렇게 물었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 시작합시다.”

    * * *

    드디어 경연 당일이 되었다.

    생방 방청을 하러 온 사람들이 스테이지에 꽉 찼고, 집에 있는 시청자들도 모두 TV 앞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 녹화 방송 분량이 나가지 않았음에도, 토트윈과 LAK가 붙는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번 회차의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의 초반 시청률은 높은 관심 덕분에 17%라는 굉장히 높은 수치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좀 지루하네.’

    그리고 에르제는 이미 2시간 전부터 와서 대기하느라 진이 빠져 있었다.

    중간에 잠깐 리허설을 한 것 빼고는 대부분의 포커스가 참가자들한테 맞춰져 있으니 토트윈은 딱히 할 게 없었던 것이다.

    ‘저쪽은 중간 인터뷰라도 하러 빠지는데…….’

    토트윈을 포함해 LAK 등 아이돌들도 각자의 대기실에서 아마 늘어져 있으리라고 추측됐다.

    “피곤하면 좀 자 둬. 목이 잠기지 않게만 하고.”

    윤치우가 에르제 옆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물을 내밀었다.

    “물 마실래?”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마시자, 윤치우가 피식 웃으며 작게 속삭였다.

    “그런데 뱀파이어들은 보통 이 시간에 잠들어 있지 않아?”

    순간 놀라서 사레 들릴 뻔했다.

    ‘……생각해 보니까 윤치우는 알고 있었지.’

    워낙 티를 내지 않고 있으니 순간순간 까먹고는 한다.

    에르제는 겨우 물을 삼켜 넘기고 대답했다.

    “뱀파이어마다 달라.”

    “그래? 너는 어떤데? 처음 은우의 몸에 들어왔을 때 힘들지 않았어?”

    “음……. 잠을 많이 못 자는 거 말고는 딱히?”

    에르제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자, 윤치우가 신기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많이 안 자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가 보네?”

    “우리라고 크게 다를 거 없어.”

    물론 인간보다야 잠과 피곤함에 내성이 있긴 하지만, 사실 뱀파이어도 똑같다.

    잠 못 자면 졸리고, 그 상태로 마차를 몰다가 나무에다 들이박은 뱀파이어도 많았으니 말이다.

    이내 윤치우가 주위의 다른 멤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른 멤버들한테는 계속 비밀로 할 거지?”

    “그래야지. 애초에 믿지도 않을 것 같은데?”

    “……하긴.”

    윤치우가 씁쓸하게 대답했다. 아마 윤치우도 던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을 거다.

    곧 윤치우가 에르제를 유심히 살폈다.

    “팬들이 알면 난리 나기는 하겠다. 서은우가 세계관 콘셉트가 아니라 진짜 뱀파이어인 거 알면 말이야.”

    “그러게. 오늘 확 밝혀 버릴까?”

    “구미호 역할이나 잘하세요.”

    윤치우가 쿡쿡 웃으며 대답했고, 에르제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더 주고받고 있자, 곧 스태프가 그들을 불러 모았다.

    “VCR 곧 끝나요! 뒤에서 대기하세요!”

    그 말에 졸고 있던 멤버들도 정신을 차리고 곧 백스테이지로 모였다.

    물론 토트윈뿐만이 아니라, 오늘 경연 상대인 LAK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준비 많이 했어요?”

    그리고 역시나, 이채선이 시비를 걸기 위해 슬슬 다가와 에르제에게 묻는다.

    “가을비 편곡하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쉽지 않았어요.”

    근데 그러고 지면 LAK 입장에서 좀 쪽팔리지 않을까 싶긴 하다.

    물론 카메라가 이쪽까지 따라붙어서 찍고 있는 터라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에르제는 하고 싶은 말을 조금 돌려서 표현했다.

    “선곡 운이 없긴 했는데, 뭐 어쩔 수 없죠. 일단 최선을 다하긴 했으니 희박한 승률에 기대 보는 수밖에요.”

    “…….”

    까득, 이채선이 웃는 낯으로 이를 깨물었다.

    눈치는 태어날 때 같이 안 태어났나 싶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저희도 굉장히 난항을 겪었거든요. 아무래도 선배님들 곡에 손을 대야 하다 보니까…….”

    카메라 앞이라고 욕은 못 하고 일일이 자기들도 쉽지 않았다는 것을 어필하는 꼴을 보니 말이다.

    “그랬구나. 힘들었겠네요.”

    에르제가 그런 그를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우쭈주하고 있으니, 곧 이채선의 이마에 점점 힘줄이 돋기 시작했다.

    결국 얼굴이 시뻘게진 이채선의 이성이 막 끊어지려 할 때쯤.

    MC의 목소리가 무대 쪽에서 들려왔다.

    “자, 이번 무대는 여러분들이 기다리던 빅 매치입니다! 승패를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한 두 팀의 대결이 예상되는데요!!”

    “아아아악!! LAK!! LAK!!”

    “토트윈이!! 이긴다!!”

    그 말과 동시에 양측 팬들 사이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온다.

    “우리 쪽 목소리가 좀 더 큰 것 같은데요?”

    이채선이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했다. 그 모습에 에르제는 혀를 찼다.

    놈의 정신연령이 심히 궁금해지는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곧 MC가 LAK 팀을 먼저 무대로 불러냈다.

    “선공 팀 나와 주세요!”

    곧 심사위원과 참가자들 간의 짧은 멘트가 끝나고, 그들이 대형을 잡자 곧 무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토트윈과 4명의 참가자들은 그 모습을 백스테이지에서 지켜보았다.

    리허설 때 한 번 보기는 했는데, 확실히 본 무대라서 그런지 리허설 때와 다르기는 했다. 뭔가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위이이이잉―!!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그들이 이번 무대의 콘셉트로 잡은 것이 드러났다.

    그들의 무대는 범죄를 저지르고 결국 마지막에 경찰들에게 쫓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무대 위 조명은 핀 포인트로 쏘아 대며 빙글빙글 돌아갔는데, 마치 헬기에서 쏘는 빛 같았고.

    사이렌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멀어졌다 하는데, 마치 그들을 쫓는 경찰차 소리를 연상시켰다.

    ― 이 순간을 즐겨.

    멈추지 않아.

    RIGHT NOW

    심장 소리가 커져.

    원곡에는 없던 사이렌 소리가 추가되면서 가사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보였다.

    “괜찮은데?”

    “잘하기는 하네.”

    그리고 다른 이들도 에르제와 생각이 비슷한지 전반적으로 평이 좋았다.

    ‘확실히 잘해.’

    무대를 넓게 쓰는 것도 그렇고, 긴박한 상황에 맞게 비트가 드롭 되는 순간에 크럼프 안무를 넣은 것도 잘 어울렸다.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노련미가 돋보이는 무대 연출이라고 해야 할까?

    분명 다른 팀이었다면, 지켜보는 것만으로 압도되어 후공을 하는 게 부담되었을 터.

    하지만 토트윈은 되레 긴장한 기색조차 없었다.

    “……근데 질 것 같지가 않은데?”

    “그러게. 예상하기 뻔한 거긴 했어.”

    그들의 무대가 예상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면, 우리 무대가 너무 예상 밖인 걸 수도 있고.’

    에르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에는 후공 차례입니다! 앞선 무대가 상당히 강렬했는데요, 그 부담감을 과연 이겨 낼 수 있을지!!”

    MC의 말과 동시에 다 같이 무대로 나왔다.

    음악 방송을 할 때랑은 확실히 시야가 달랐다.

    심사위원들 자리가 꽤나 가깝고 크게 보였고, 세트장인 만큼 방청객의 숫자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LAK의 무대 때와 마찬가지로, 참가자들 위주로 간단한 멘트를 주고받은 뒤.

    일주일간 준비한 그들의 무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파파파팟―.

    모든 조명들이 꺼지고.

    -WOOOOOOOO―!!

    3옥타브를 넘는 고음으로, 에르제의 여우 울음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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