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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71화 (71/307)

제71화

71화

에르제는 늦은 밤이었으나, 급하게 나갈 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이윤에게는 허락을 받았고 멤버들에게도 나갔다 온다고 말을 해 두었으니 문제될 것은 없었다.

에르제는 그들이 코코아톡으로 보내 준 위치로 곧장 택시로 이동했다.

‘그러고 보니 이거를 다시 안 돌려줬네.’

에르제는 본인의 선견지명을 칭찬하며, 저번에 이윤이 줬던 법인카드로 요금을 계산한 뒤 내렸다.

에르제가 도착한 곳은 강남에 위치한 고급 식당이었는데, 그 안은 모두 룸으로 되어 있는 곳이었다.

‘비밀 얘기를 하기 알맞은 곳이네.’

에르제는 혹시나 다음에 제이나 장진규가 또 찾아온다면, 이곳에서 보자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밀 얘기를 하기 좋은 것은 둘째 치고, 일단 가게 안에 맴도는 음식 향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폭식한다.’

변변치 않은 포부를 내세우며 에르제는 예약되어 있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 왔어?”

“오셨습니까.”

에르제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두 사람이 그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슬쩍 고개만 돌려 손을 흔드는 윤소희 실장과,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하는 안병인.

참으로 안 어울리는 조합의 두 사람이 오늘 에르제를 불러낸 장본인들이었다.

“앞에 앉으시지요. 서은우 님.”

안병인은 에르제가 앉을 곳의 방석을 털어 주었다.

“서은우 말고, 에르제라고 불러 주세요.”

어차피 안병인과 윤소희, 모두 그가 뱀파이어인 것을 알고 있는 인간들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서은우라는 인간 이름보다는 에르제라고 불리는 편이 더 좋을 듯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안병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에르제는 자리에 앉으면서 윤소희에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부른 거예요?”

“성격이 급하네.”

윤소희는 피식 웃고는 책상 옆에 있는 벨을 눌렀다. 곧 식당 직원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여기 정식 B세트로 3개 주세요.”

윤소희가 빠르게 주문을 했으나, 에르제의 뛰어난 동체 시력을 무시한 행동이었다.

에르제가 곧바로 손을 들어 주문을 바꿨다.

“제 거는 D세트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직원은 갑자기 바뀐 주문에도 침착하게 기억을 하고는, 다시 방 밖으로 나갔다.

“뭐야?”

윤소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D세트는 커플 세튼데…… 그걸 혼자 다 먹으려고? 아니, 그 와중에 메뉴판은 또 언제 봤어?”

“어제와 오늘, 맛없는 풀만 먹은 건 오늘을 위해서가 아닐까 싶네요.”

에르제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고, 둘을 지켜보던 안병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두 분 사이가 아주 좋아 보입니다.”

그의 말에 에르제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원래 뱀파이어랑 마녀는 옛날부터 사이가 좋았어요.”

“뭐…….”

윤소희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그렇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본격적인 이야기는 식사가 나온 뒤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오늘 절 따로 보자고 한 이유가 뭐예요?”

에르제가 접시 2개를 동시에 해치우며 물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안병인이 입을 열었다.

“우선 감사 인사부터 드리는 게 맞겠지요. 저를 지옥에서 꺼내 주신 분이시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에르제 님이 아니었다면, 평생 가족을 잊고 살인귀로 살아갈 뻔했습니다.”

“……별거 아니에요.”

에르제는 입 안에 있는 고깃덩어리를 꿀꺽 삼켜 넘기곤 손을 휘휘 내저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에르제는 그렇게 말하고는 씩 웃었다.

“그래서 이번에 토트윈 광고주로 들어오신 건가요? 인터뷰도 그렇고요.”

“……예. 맞습니다. 주혁이와 에르제 님, 두 사람이나 토트윈에 소속되어 있으니까요. 제가 뭐라도 하는 게 도리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군요.”

에르제가 여전히 음식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대답하자, 안병인이 결연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게 해 주시고, 그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신 에르제 님께 어떤 보답을 할 수 있을지.”

그제야 에르제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보답이요?”

“……예. 그런 의미에서…… 제가 에르제 님의 권속이 되는 것으로…….”

“아, 그건 좀.”

에르제는 안병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바로 잘라 버렸다.

‘권속이라니.’

그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병인의 사회적 지위가 탐이 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친구 아버지를 권속으로 삼는 것은 좀 그러네요.”

“하지만…….”

에르제는 다시 한번 안병인의 말을 끊으며, 절대 안 된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거의 매일같이 보는 녀석과 껄끄럽기 싫어요. 지금이 딱 좋거든요.”

“…….”

에르제의 말에 안병인은 선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여러모로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윤소희가 씩 웃었다.

“거 보세요. 제 말이 맞았죠?”

“……후우.”

안병인은 휘청거리며 자리에 앉고는 심란한지 젓가락을 몇 번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제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

“흠.”

에르제는 팔꿈치를 책상에 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러니까…… 본인 마음이 불편하니까 은인의 마음이 대신 불편했으면 좋겠다?”

“아, 아닙니다!”

안병인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하자, 에르제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안병인 회장은 지금처럼 민주혁과 심리적 거리를 줄이도록 노력하세요. 본인이 여태 쌓아 왔던 업보들은 계속해서 마음 한구석에 남겨 두시어 불편해하시고요.”

조금 냉정한 말이었으나, 에르제의 가치관에서는 절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자아가 없을 때 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지금까지 안병인이 해 온 모든 짓들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용서를 구하고 싶다면, 본인 자신부터 먼저 용서하세요.”

그렇게 속죄를 하며 살아가다 보면, 또 언젠가 본인이 본인을, 그리고 남이 본인을 용서하게 되는 거다.

‘……물론 나도 못 한 일이지만.’

에르제는 아직까지도 본인을 용서하지 못한 ‘그 일’을 떠올리며, 시린 가슴을 손으로 꾹 눌렀다.

‘살아있을까.’

그렇게 괜히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힘들어하고 있으니, 윤소희가 손바닥을 짝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 두 분 이야기는 대충 마무리된 것 같고. 그러면 제 방식대로 하는 걸로? 회장님도 동의하셨으니 그렇게 합니다?”

안병인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지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윤소희는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우선, 여기 널 부른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지? 일단 첫 번째는 회장님의 감사 인사야. 뭐 그건 방금 끝났고……. 두 번째는 내가 오늘 낮에 보냈던 문자 기억해?”

“문자……? 아, 도대체 뭘 한 거냐고 했던.”

“응. 맞아. 그때 안 회장님께서 갑자기 연락을 하셨거든.”

“?”

에르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이자, 윤소희가 지금까지 안병인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이런 상황이었다.

윤소희는 지속적으로 청화에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압박의 주체가 안병인인 줄 알았는데, 사실 그건 청화 소속의 다른 뱀파리스였고 놈은 뱀파리스 진영 내에서도 꽤나 높은 서열의 인물로 추측되었다.

그들은 서은우가 뱀파이어임을 이미 알고 있었고, 윤소희가 그를 의식을 통해서 불러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서은우를 지키기 위해 윤소희는 뱀파리스들과 거래를 해서 다른 뱀파이어의 소재를 찾거나 연구 물품을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뜬금없이 안병인이 비밀리에 동맹 제안을 해 왔다.

……는 것이 윤소희가 장황하게 말한 이야기의 핵심이었다.

“당연히 나는 안 회장님이 협박범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 갑자기 동맹 제안이 오고, 네 이야기가 나오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서 너한테 연락을 한 거였지.”

“으으으음.”

꽤나 복잡한 이야기에 에르제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일단 무슨 이야기인지는 대충 이해했다.

‘……윤소희가 마녀라는 것도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게 됐고.’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크게 두 가지 있었다.

‘분명 김지태는 티즐 고크드르늘 때문에 내 정체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면…… 그때 같이 연루되어 있던 안병인도 같았겠지.’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이미 자신의 정체가 진즉에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다른 이들도 아닌, 뱀파리스들한테 말이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몇 명 없었던 것일 수도 있었겠네.’

김지태나 안병인, 세력 말단을 움직일 때는 ‘티즐 고크드르늘’과 같은 그럴듯한 정보를 쥐여 주고 움직이게 만든다는 뜻이 된다.

‘생각보다 치밀해.’

순간 ‘누가’ 생각날 정도의 치밀함.

‘근데…… 그럴 리는 없으니까.’

에르제는 오늘만 벌써 두 번이나 떠오른 이의 얼굴을 지워 내며, 이내 다음으로 의심스러운 부분을 떠올렸다.

‘……티즐 고크드르늘은 그렇다고 쳐도, 안병인은 어떻게 내가 본인의 기억을 살려 줬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지?’

다만 이것만큼은 그럴듯한 추측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에르제는 직접적으로 안병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에 안병인은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

“김지태가 에르제 님께 죽임을 당한 이후, 새로운 지령이 내려왔었습니다. 에르제 님이 저를 찾아올 가능성도 있다면서 감지되지 않는 기록 장치를 설치해 두라고요.”

“아아.”

어쩐지 방 안에 감시 카메라나 그런 것들이 안 보인다고 했다.

‘안병인을 버림패로 사용하면서…… 내가 안병인에게 손을 대면 그 영상 기록으로 날 협박하려고 한 거군.’

조금…… 짜증이 나는데.

에르제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안병인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물론 기록 장치는 다른 것으로 바꿔 두었습니다. 문제될 것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래도 대비를 아예 안 할 수는 없겠죠.”

“맞습니다.”

안병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늘 에르제 님을 이곳으로 모신 거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 드리는 겁니다.”

“그렇군요. 대충 궁금한 것들은 해소되었네요.”

에르제의 대답에, 가만히 듣고 있던 윤소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을 이어서 하자면, 내가 뱀파리스와 거래를 하고 있던 건 어디까지나 널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 때문이었어. 하지만, 이번에 김지태와 여기 안 회장님을 이용해서 너를 뱀파리스로 만들려고 했단 말이지.”

에르제가 세리나를 구했던 때를 떠올리며 수긍하자, 윤소희가 얼굴을 구기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는 저쪽에서 먼저 약속을 깬 거야.”

“원래 뱀파리스들은 믿으면 안 돼요.”

“……알아.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거든. 솔직히 네가 김지태를 죽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그들 세력 전체를 상대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거든.”

윤소희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러고는 꽤나 오래 뜸을 들이다가 고민을 마쳤는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래서 말인데.”

말을 잠시 멈춘 윤소희는 또렷한 눈으로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회사에는 내가 잘 말해 줄 테니 지금 하고 있는 토트윈, 그러니까 아이돌…… 그만하고 숨어 지내는 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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