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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63화 (63/307)
  • 제63화

    63화

    2월 18일, 저녁 11시 30분.

    세리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남은 30분을 기다리기 위해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일부러 침대 위가 아닌 딱딱한 바닥에 앉아서 무뎌진 정신을 더욱 채찍질했다.

    ‘이게 딱 좋아.’

    세리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성전을 코앞에 둔 성기사와 같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2월 19일 00시는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운 로드의 뮤직비디오 티저가 풀리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세리나는 양손을 가슴에 모으고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였다.

    “로드, 오늘도 무사히 분탕 종자들과 악계, 악개들을 쳐낼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그렇게 간단한 의식을 마치고 느릿하게 흐르는 시간을 바라보고 있자, 곧 00:00으로 시간이 바뀌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세리나는 무튜브 알림이 울리는 것보다 더 빠르게 뮤직비디오를 재생시켰다.

    “아……!”

    칼 같은 타이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잠깐 걸린 렉과 안타까운 인터넷망의 속도 때문에 벌써 조회수가 한참 올라가 있었다.

    ‘조회수 1이 나였으면 했는데.’

    누군가 그 영광을 차지한 줄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런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스킵 버튼도 뜨지 않는 최악의 광고 능선을 넘고, 곧 기다리던 티저가 재생되었다.

    사아아아악―.

    가볍게 불어온 바람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하얀색 커튼을 날렸다.

    자연스럽게 이동한 카메라를 따라 가니, 한 교실의 전경이 보였다.

    하지만 방과 후인지 아무도 없는 교실.

    ― 흐응, 흥, 흥.

    그 순간, 뒤에서 콧노래가 들리고 휙! 돌아간 화면에는 한 소년이 턱을 괸 채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다.

    태현우였다.

    턱을 괴지 않은 반대편 손은 검지를 세운 채 허공으로 뻗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창가에서 들어온 노란색 나비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따뜻한 햇살, 나비,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소년.

    그렇게 평화로워 보이는 방과 후의 일상은.

    쨍그랑!!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로 단번에 분위기가 돌변하였다.

    유리창을 깬 것은 야구공이었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태현우는 야구공의 주인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순간, 위아래로 화면이 확 뒤집히고 학교 옥상 풍경이 튀어나왔다.

    그곳에는 사탕을 담배 물듯이 물고 있는 안단테가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교복인 와이셔츠와 재킷을 반쯤 풀어헤친 채, 한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있는 모습.

    누군가의 손가락에 앉아 있던 노란 나비 한 마리가 그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고.

    안단테가 이 나비를 잡으려다가 품 안에 넣어 두었던 다른 사탕들이 후두둑 옥상 아래로 떨어졌다.

    카메라는 떨어지는 사탕을 따라 아래로 쭉 내려가고, 수풀에 사탕이 안전하게 착지했다.

    그리고 그 옆의 길을 따라 걸어가는 길쭉한 다리.

    민주혁은 뿔테 안경과 단정한 교복, 그리고 손에는 영어 사전을 들고 있었다.

    어느새 그에게 날아온 노란 나비가 민주혁의 어깨에 몰래 앉았고, 민주혁의 눈은 영어 사전을 보기 바빠 보인다.

    ― !!

    그러다가 학교 운동장을 걸어가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허둥지둥 기둥 뒤로 숨는다.

    흐릿한 실루엣 때문에 성별조차 판단이 불가능했다.

    곧 민주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바닥을 쭉 뻗어 카메라를 가렸다.

    ― …….

    잠깐의 암전이 끝나고 다시 밝아진 화면에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있는 윤치우가 보인다.

    학교 정문 앞, PC방으로 놀러 가는 학생들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쉰다.

    주머니에서 꺼낸 지갑에는 고작 2천 원이 들어 있다.

    하지만 윤치우는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며, 그보다 멀리 있는 꽃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태현우가 흥얼거리던 콧노래가 근처에서 들려오고.

    마치 멜로디 라인을 따라가듯 날아가던 나비의 날개가 멈춘 것은 한 소년의 앞이었다.

    지금까지의 학생들 모습과는 다르게, 홀로 교복 대신 야구복을 입고 있었는데.

    살짝 드러나는 송곳니와 탄탄한 몸, 그리고 홀릴 듯 빠져드는 외모가 아주 매력적이었다.

    ― 흥흥, 흥.

    서은우도 태현우가 흥얼거리던 멜로디를 따라 부르며, 배트를 어깨에 걸친 채 학교 쪽을 바라보다가 씩 웃는다.

    깨져 있는 창가에는 태현우가 짜증 섞인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서은우는 배트를 쥐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야구공을 하늘로 휙 던지고.

    다시 한번, 떨어지는 공에 배트를 휘둘렀다.

    ― 따아악.

    경쾌하게 하늘로 날아가는 야구공을 따라 카메라 화면이 이동하고.

    푸른 하늘, 낡은 축구 골대, 모래로 덮인 운동장. 어린 시절의 학교 풍경이 그대로 펼쳐진다.

    그리고 그 위로.

    [ ‘그 시절의 너(Reminiscence)’ ]

    [ 2022/2/20 ]

    이라는 자막이 떠오르며 영상은 끝이 났다.

    ‘벌써 끝났어?!’

    세리나는 쏜살같이 흐른 1분을 안타까워하며, 곧바로 재생 버튼을 다시 눌렀다.

    잠깐의 1분 사이에 얼마나 많은 팬들이 스트리밍을 시작한 것인지, 조회수가 벌써 1.5천 회로 표기되고 있었다.

    세리나는 고개를 저으며,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티저 내용을 해석하고, 뭐가 어쩌고저쩌고는 이브들이 알아서 해 줄 터.

    그건 그때 가서 본격적으로 씹고 맛보고 즐기면 되고, 지금 당장은 따로 음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좋다…….”

    이번 컴백, 로드의 헤어에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은발.

    그것도 약간 보랏빛 계열이 섞인 훌륭한 은발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이브들도 그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 은우 은발 누가 제안한 거야? 진심 상 줘야 해. ㅠㅠㅠ 아니, 없으면 내가 만들게!! 제발 받아 줘. ㅠㅠ

    ― 분위기 어쩔 거야;;; 몽환미가 3배. 나 주거ㅓㅓㅓㅓ.

    ┖ 뱀파이어+늑대인간 재질인 듯?

    ┖ 이게 맞다. 섹시 몽환 고혹 다 가졌다;

    ― 세계관 때문에 흑발 고집하나 했는데, 은발이라니;; 진짜 감긴다.

    좋아요 수로 댓글 상위권에 차지한 글 대부분이 서은우가 은발로 변신한 것에 대한 내용일 정도.

    물론 그것 때문에 불만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 치우도 오렌지색으로 염색했는데, 서은우랑 언급 수 차이 나는 거 보면 좀 섭섭하네.

    ― 뭐임? 뮤비 티전데, 뮤비 이야기는 별로 안 보이냐. 뒤에 깔린 멜로디랑 영상이나 좀 보고 분석하자.

    ― 근데, 이왕 염색할 거면 다른 애들도 하지. 둘만 이미지 변신 하는 거임?

    물을 흐린다고 표현하기에는 애매한 수위의 댓글들이 중간중간에 보였으나, 그 여론은 금세 잠재워졌다.

    토트윈의 공식 계정에 숙소에 모여 찍은 단체 사진이 하나 올라왔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이브들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 Trick or Treat! 안녕, 이브! 토트윈이에요.

    내일 드디어 2집 컴백 앨범이 나온답니다!

    저희도 설레는 마음에 늦은 시간까지 자지 못하고 열심히 티저 모니터링 중이에요(머쓱한 표정의 이모티콘).

    벌써 3번째 돌려 보는 중인데, 저희 멤버 모두가 그 시절 그때의 분위기로 나온 듯해서 살짝 추억에 빠져 있는 중이에요. ㅎㅎ (여러분들은 어떠실까요!?)

    내일 자정에 공개되는 뮤직비디오도 많이 사랑해 주시고, 타이틀곡 말고 다른 곡들도 많이많이 기대해 주세요!!

    사랑합니다♡ ]

    꽤 장문으로 적힌 글 밑에는 각자의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잠옷을 입고 있는 단체 사진이 있었다.

    한 팬이 자신이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 거라며 선물로 보내 준 것이었는데, 이를 잊지 않고 이렇게 사진으로 찍어 올려 준 모양이었다.

    윤치우를 중심으로 해서 왼쪽에는 안단테와 민주혁, 오른쪽에는 태현우와 서은우가 나란히 서서 브이 자를 그린 자세.

    다들 학생 시절의 익살스러움을 담은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이 사진을 보는 이브들의 입가에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ㅠㅠ 이번 팬싸 무조건 간다.

    ┖ 저번에도 팬싸 컷 높은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감당이 가능할지……. 기다려, 누나가 돈 많이 벌어 올게……!!

    ― 치우랑 은우가 티가 많이 나서 영상에서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다른 애들도 헤어 컬러 조금씩 바꾼 듯??

    ┖ 이거 내가 아까부터 댓글로 올리고 있었는데, 계속 묻히는 중이었음. ㅠㅠ 주혁이는 샛노란색에서 금색에 가깝게 조금 어두워졌고, 단테도 민트색 가깝게 변한 듯!

    ┖ 아, 그러네. 전반적으로 톤이 어두워진 것 같기도? 치우도 오렌지색이기는 한데, 밝은 오렌지는 또 아니라서.

    ┖ 학교 컨셉이라 염색이 너무 밝으면 이질적이라서 조절 좀 한 듯.

    ┖ 오! 그럴듯한 추측.

    ― 근데 태현우랑 서은우랑 은발 겹치는 거 아님? 나는 좀 불편한데;; 이참에 태현우가 흑발로 가거나 아니면 백금발 쪽으로 가는 것도 괜찮을 듯.

    ┖ 멤버들마다 무슨 머리 색깔을 알록달록 다르게 만들어야 하냐. ㅋㅋㅋ 인형놀이 작작해.

    ┖ ㄹㅇ ㅋㅋ 애들이 알아서 하게 둬라, 좀.

    ┖ 여기도 불편러 많네.

    일부러 조명을 조절해서 다른 멤버들의 머리 색깔도 바뀌었다는 것을 강조한 효과가 있었다.

    서은우랑 윤치우만 특별 대우해 주냐는 분위기가 누그러들었고, 각자 바뀐 머리 색깔이 마음에 드니 마음에 들지 않느니로 토론의 장이 열렸으니 말이다.

    서은우의 은발에 극도로 쏠려 있던 여론도 많이 분산되었다.

    그리고 다행히 대부분의 팬들은 토트윈의 변화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짧은 토론을 댓글에서 이어 가던 이브들은 이내 뮤직비디오 티저에 관한 떡밥과 이야기로 화제를 넘겼고.

    ― 내가 볼 때, 노란 나비가 분명 뭔가 있다.

    몇 분 전에 올라온 이 댓글에 300개가 넘는 대댓글이 달리면서 20일 자정에 풀릴 뮤직비디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결과를 낳았다.

    “흐아, 팬들 반응을 보니까 괜히 걱정되고 그래여.”

    안단테가 양팔로 자신의 몸을 안으며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영락없이 비에 맞아 나뭇잎 밑에 숨은 다람쥐 같았다.

    이제는 오렌지 드래곤이 되어 버린 윤치우가 그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왜? 작사 토트윈, 작곡 안단테로 나오고 나서 욕먹을까 봐 걱정돼?”

    끄덕끄덕.

    안단테가 고개를 끄덕이고, 윤치우가 나름 격려의 말을 덕지덕지 붙여 주었다.

    “작곡은 네가 오랫동안 준비했던 거잖아. 팬들도 분명 좋아할 거야. 오히려 우리 앨범 준비하는데 작곡까지 시켰다고 뭐라 하는 팬들도 있을걸?”

    뭐 그런 식으로 시작해서, 잘했다고 칭찬과 격려를 하는데 그게 그렇게 효과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안단테의 표정도 썩 나아지지 않았고 말이다.

    대략 이를 지켜보며 물을 5잔 정도 들이켠 에르제는 터덜터덜 걸어가 안단테의 어깨를 짚었다.

    “?”

    “?”

    윤치우와 안단테가 무슨 일인가 싶어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이럴 때는 네가 최고야, 보다는 다른 게 더 잘 먹히지.’

    본인의 실력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데, ‘너 잘해!’라고 해 봤자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예전에 뱀파이어 무투 대회 나가기 전에 대기실에서 잔뜩 움츠러들어 있던 한 제자가 떠올랐다.

    ‘스승인 내가 이긴다고 하는데, 감히 제자 놈이 토를 다냐.’라는 식으로 말을 했는데, 이번에도 그것과 큰 틀은 비슷했다.

    에르제는 피식 웃으며, 윤치우를 가리켰다.

    “안단테, 윤치우가 아이돌로서 뛰어나다고 생각해?”

    “어……? 어? 네. 당, 당연하져.”

    “그럼, 민주혁은? 태현우는?”

    “다, 다들 잘…… 하져.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

    말을 할수록 안단테와 다른 멤버를 비교하는 모양새가 되자, 윤치우가 말렸다.

    “은우야, 지금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이런 건 인간적으로 접근을…….”

    “잠자코 있어.”

    하지만 에르제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으며, 이번에는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안단테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럼 나는?”

    “은우…… 형도 노래랑 춤 모두 수준급이고…….”

    “그래?”

    대충 빌드업을 끝낸 에르제가 안단테와 눈을 맞췄다.

    “네가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두 네 곡을 좋다고 말했어. 마음에 든다고 만족해하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노래와 춤을 연습하고 있어.”

    “…….”

    “그런데 지금 넌 그런 우리들의 안목을 의심하는 거야?”

    “……!! 그런 건 아니에여!”

    안단테가 놀라서 소리쳤다가 이내 에르제가 하고 싶은 말을 깨닫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

    그러더니 곧 고개를 들었다.

    “그러네요. 킁……. 고마워여, 은우 형.”

    “별말씀을.”

    뭐, 서은우였으면 이런 이야기 못 했겠지만……. 서은우가 대신 감사 인사를 받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는 말자.

    에르제는 안단테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는 태현우가 뒹굴뒹굴하는 방으로 향했다.

    ‘에휴.’

    내 코가 석잔데, 누굴 위로하고 앉아 있냐. 지금 에르제는 그 어떤 것보다 끔찍한 일을 겪고 있었으니 말이다.

    ‘은색 털 진짜 싫어…….’

    에르제는 신경질적으로 은발을 헝클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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