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62화
아그작, 아그작.
에르제는 프로틴 바를 고기 대신 먹으며, 눈앞의 남자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장 대표였다.
총 5장의 A4 용지를 꼼꼼하게 확인한 장 대표는 흐뭇한 얼굴로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너한테 애들 가사 검사 받으라고 한 거 잘한 선택인 것 같다. 괜찮은데? 가사 유기성도 좋고, 학교 콘셉트에도 충실하게 나온 것 같네. 그리고 타깃 대상도 팬들이 본인이라고 느낄 수 있게끔 잘 잡았고.”
당연한 결과였다.
음유시인으로 활동할 때, 귀부인들이 좋아하던 은유적인 말들을 그대로 가사에 녹여 냈으니 말이다.
농담 삼아 던졌던 말장난에 ‘오호호호.’ 웃으며 자신의 팔뚝을 때리던 자작 부인이 떠올라서 에르제는 그만 피식 웃었다.
‘민주혁도 시상식 때 이후로 각성해서 잘 써 왔고.’
그의 각성과 더불어 에르제의 이세계 경험 덕분에 생각보다 컴백 앨범 타이틀곡을 준비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제이와의 사건 이후, 일주일 만에 한 곡의 가사를 뽑아내었으니까.
장 대표는 그간의 고충을 보여 주듯 까슬까슬한 턱수염을 매만졌다.
“좋아. 마음에 들어. 이거 한 곡은 단테가 만드는 걸로 할 거야. 저번에 들었지? 요즘 아이돌들은 다들 능력들이 좋아. 너희들도 다재다능하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하거든. 타이틀곡의 작곡, 작사 모두 너희가 했다는 걸 어필하면, 아육시 애들한테 팬들 수출 당하는 건 줄어들 거다.”
푸념인지 다짐인지 꽤나 길게 이야기하던 장 대표는 종이 한 장을 집어 들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현우는 글씨가 왜 이리 개발새발이냐. 어디 외국에서 살다 왔다니?”
“그게 그나마 알아볼 만하게 써 온 거예요.”
에르제가 프로틴 바를 반절 정도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 태현우의 악필은 상상 이상이었고, 아마 에르제가 찢은 종이만 해도 나무 몇 그루는 되지 않았을까?
그래도 주의 깊게 보면 무슨 글자인지 알아볼 수 있는 수준까지는 되었으니, 그 정도면 장족의 발전을 했다고 할 수 있었다.
“오케이. 타이틀은 정해졌으니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면 되겠구먼. 이제 연습하러 가 봐. 고생 많았다, 은우야.”
“장 대표도 고생하세요.”
“그……래.”
장 대표는 떨떠름하게 대답하고는 어서 나가 보라고 손짓했다.
* * *
그렇게 민주혁과 태현우라는 큰 산을 넘고, 장 대표의 최종 컨펌까지 통과한 이후.
본격적으로 컴백에 관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대중의 기억에서 토트윈의 존재가 희미해지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기사나 활동과 관련된 바이럴 마케팅을 이어 갔고.
내부적으로는 최대한 컴백 일자를 앞당기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프로듀서, 안무, 뮤직비디오 등등.
에르제를 포함한 5명의 토트윈 멤버들은 근 한 달간 거의 혼이 빠져나가는 경험을 했다.
“아……. 끝났다.”
안단테와 윤치우가 연습실 바닥에 대자로 널브러지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2월로 막 접어든 때.
드디어 타이틀곡의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장 대표가 예상했던 것보다 2주는 빠른 성과였다.
“안무 연습도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여?”
“아쉽기는 한데, 일단은 괜찮은 것 같네.”
안단테의 말에 민주혁이 똑바로 선 채 대답했다.
“그런데 내가 늘 말하지 않았나? 고작 이 정도로 엎어지고 쓰러질 거야? 팬들 앞에서도…….”
“아아악.”
안단테가 귀를 막으며 몸을 빙글 돌려 엎어졌다.
윤치우는 이미 눈을 감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모양이었고 말이다.
자리에 철퍼덕 앉아 있던 태현우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넌 뭐 매일 장어구이라도 먹냐? 뭐 이렇게 멀쩡해?”
“평상시에 체력 훈련을 열심히 했으니까. 치우 형이랑 너희들이 너무 게으른 거야. 저번에 은우, 제이한테 스폰 제의 받은 걸로 오해했을 때 열심히 하겠다고 그러더니 다 빈말이었어? 한순간의 다짐이었던 거야?”
속사포처럼 쏟아붓는 민주혁에게 태현우가 엄지를 아래로 내렸다.
“지도 저번에 음방 끝내고 산소마스크부터 찾았으면서.”
“닥쳐.”
에르제는 벽 한쪽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은 채, 티격태격하는 태현우와 민주혁을 바라보았다.
전에는 태현우가 안단테를 괴롭히고…… 뭐 그런 그림이 익숙했는데, 이번 컴백 준비를 하면서는 민주혁과 태현우가 제일 많이 저러고 논다.
‘동갑이라 그런가.’
서은우도 저 둘과 동갑이기는 하지만, 속에 있는 것은 자신이니 따지고 보면 2,500살은 넘게 차이가 난다.
‘유치하기는.’
이것이 또래끼리 느끼는 감성인가.
쿡쿡 웃은 에르제는 곧 이번 안무에 대한 생각으로 넘어갔다.
아무래도 풋풋한 감성의 곡과는 다르게, 아크로바틱한 안무도 있어서인지 불안한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르제 본인이 맡은 것은 아니었으나, 민주혁의 백 덤블링과 같은 기술들은 다른 멤버들과의 동선도 중요했다.
‘민주혁이 앞으로 나갔다가 오른쪽으로 빠질 때, 내가 뒤로 비켜 줘야 하고……. 혹시 실패할 때를 대비해서…….’
그렇게 에르제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던 이윤이 연습실로 돌아왔다.
“연습 끝났지?”
“네에.”
“최종 점검을 방금 마친 참입니다.”
누워 있던 안단테와, 태현우의 어깨를 잡고 흔들고 있던 민주혁이 가장 먼저 대답했다.
멤버들은 이윤이 지금 타이밍에 찾아온 이유를 어렴풋이 눈치채고는 기대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희 컴백, 2월 20일로 결정됐다.”
“오예!!”
안단테가 나머지 손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쳤고, 멤버들도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다들 팬들 앞에서 무대를 선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곡은 이미 완성되어 실사 앨범과 포토 카드들은 이미 제작에 들어간 지 꽤 되었고.
오늘이 마지막 최종 점검이었으니, 일정이 언제 잡히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기는 했다.
이윤이 씩 웃으며 말했다.
“20일에 뮤직 큐 음방으로 컴백 무대가 잡혔으니까 팬들도 기대 많이 할 거야. 잘하자.”
“뮤직비디오가 먼저 풀리는 거죠?”
“응.”
이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윤치우의 질문에 대답했다.
“어차피 타임테이블로 다 공지될 것이긴 한데, 티저랑 오피셜 뮤비랑 다 무튜브 공식 계정에 업로드 될 거고. 3사 음악 방송에서 우리 타이틀곡도 다 틀어 주기로 이야기됐어.”
“오오.”
이전 타이틀곡이었던 ‘HaLLo’는 차트와 음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시작한 이후부터 방송국에서 뮤직비디오를 틀어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 없이 컴백과 동시에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니, 새삼 토트윈이 저번 데뷔 앨범에서 얼마나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지 멤버들은 더욱 크게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물론 그만큼 부담감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었고 말이다.
“으, 무서워여. 우리 진짜 잘해야 할 텐데. 내가 쓴 곡 괜찮을까여? 팬들이 좋아해 줄지 모르겠는데…….”
“넌 충분히 잘했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성적이 잘 안 나오면 그건 우리가 못한 탓이야.”
윤치우가 맏형이자 리더답게 안단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온화하게 말했다.
“작곡이랑 믹싱은 네가 연습생 때부터 혼자 준비했던 거고, 이번 앨범을 위해서 잠도 거의 못 잤잖아. 그리고 우리가 다 네가 만든 곡 좋다고 했고.”
그렇게 말한 윤치우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멤버들 쪽을 보고 말했다.
“잘하자, 우리. 단테한테 부끄럽지 않게.”
“당연하지.”
그 말에 태현우가 씩 웃으며 대답했고, 민주혁도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훈훈하니 보기 좋네.’
그 모습을 에르제가 동네 아이들을 바라보듯이 흐뭇하게 보고 있자, 이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윤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 참, 그리고 너희들 컴백 일정에 맞춰서 저번에 청화에서 찍었던 CF도 나갈 거야. 그쪽에서도 그때쯤 편집이 끝날 것 같다고 해서 시기상 딱 맞을 것 같아.”
“아.”
“맞네. CF도 찍었지.”
다들 앨범 준비를 한다고 CF에 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이윤이 더 좋은 소식이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희들이 CF 때 잘했는지 이후 협찬 같은 부분도 청화 쪽에서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하더라. 숍이랑 메이크업 그리고 의상 같은 부분들, 지원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라고 안병인 회장님한테 따로 연락이 왔다고 하더라고. 어때? 좋지?”
“진짜요?”
“기업 후원이에요?”
“응.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멤버들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고, 이윤은 그런 그들을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에르제는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 * *
안무와 노래 연습을 마치고, 에르제는 방 안으로 복귀해 침대에 걸터앉았다.
태현우는 거실에서 안단테와 떠든다고 나가 있었기에 혼자 생각하기에 좋은 타이밍이었다.
‘후원이라…….’
에르제는 기억이 살아난 안병인이 처음으로 취한 행동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되겠지.’
뱀파리스 쪽에서 내려온 지령이라고 볼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김지태가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티가 너무 나니 말이다.
그들도 안병인의 존재가 자신에게 노출되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파악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딱 그 정도의 버림패였겠지.’
저쪽에서는 실패할 가능성도 고려했을 거다.
‘그것도 아니면, 김지태의 실패를 안병인으로 만회하려고 했을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아무런 사회적 지위도 없는 김지태보다 안병인을 건드리는 게 일이 더 커졌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뱀파리스 쪽 세력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모르니 안병인에게 해를 가한 게 자신이라고 언제든지 언플을 할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토트윈까지 최악의 상황에 빠졌으리라.
‘……오히려 민주혁의 아버지였던 게 나한테도 행운이었나.’
에르제는 헛웃음을 지었다가 이내 뒤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안병인 쪽은 다시 정신 지배를 걸지 못하게 방어기제를 걸어 두었으니 그럴 일은 또 없을 거고…….’
그렇다면 나머지의 일은 이제 자신의 영역 밖이다.
안병인과 민주혁, 두 사람의 관계 말이다.
대충 상황을 보니 안병인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려고 하는 것 같은데, 민주혁이 그 사과를 받아 줄지는 미지수.
‘마음 같아서는 둘 다 훌훌 털어 내고 사이가 좋아지면 좋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민주혁의 증오심이 꽤나 커 보였다.
‘……하긴, 어렸을 때 버려졌으니.’
그 충격이 가히 컸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올바르게 자란 민주혁이 대견스럽게 여겨졌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렸을 적 모습으로도 자기 자식을 알아볼 수 있는 건가.’
민주혁의 어렸을 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꽤 다른데도 안병인은 민주혁을 알아본 듯했으니 말이다.
진짜 토트윈의 팬이라서 CF와 후원을 해 준다는 건 헛소리일 테고, 이번 청화의 움직임은 확실히 민주혁 때문이 맞았다.
‘……그렇다면.’
에르제는 문득 든 생각에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일부러 화면을 켜지 않아서, 검은색 바탕에 서은우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서은우를 버렸다던 부모도 TV에 나오는 모습을 보고 알아봤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에르제는 곧 화면에 비친 서은우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넌 왜 의식까지 해 가면서 날 불러냈을까.’
어쩌다가 떠오른 이 두 개의 생각은…… 서로 연관이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