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57화
“너의 그 중2병이 필요해.”
장 대표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회의실 중앙에 앉아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알지, 은우야? 저번에 내가 물어봤던 거.”
“……이거 치료해야 하는 거 아니었나요?”
“아냐, 아냐. 그건 컴백 끝나고 해.”
“그렇다면 한시름 놨어요.”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멤버들의 안색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그…… 대표님? 중2병이요?”
윤치우가 토트윈을 대표해서 총대를 멨다.
지금 장 대표가 하는 말은 토트윈의 2집 앨범을 중2병 감성으로 채우겠다는 것.
그것도 앨범의 타이틀을 ‘편지’로 해서 그들이 팬들에게 전하는 말처럼 보이게 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장 대표는 이미 결심을 확고하게 굳힌 상태인 듯 책상 위로 깍지를 낀 손을 올려놓았다.
“당연히 완전 중2병으로 갈 수는 없겠지. 가사에다가 난…… 가끔 눈물을…… 흘린다, 이런 걸 넣을 수는 없잖아.”
“그, 그렇죠?”
“그래. 내가 원하는 건 은우가 저번에 SNS에 올렸던 수준이야.”
“아아, SNS……. SNS요?”
윤치우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서 에르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그…… 그 달빛, 그거요?”
“어어. 너희들도 봤지? 무튜브에 영상으로 편집된 은우 노래 영상. 그거 대박 났잖아.”
대박이 나기는 했다. 며칠 전에 봤을 때, 조회수가 무려 20만이 넘어가고 있었으니까.
웬만한 대기업 무튜버들의 조회수만큼 나왔다는 거다.
그리고 그 영상에 달린 댓글이 꽤나 긍정적이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윤치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하지만……! 솔로 앨범도 아니고, 아이돌 앨범 전체를 그렇게 만들겠다고 하시는 건……!”
윤치우의 발언에 토트윈의 멤버들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들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차례 남자 아이돌을 말아먹었던, 장 대표의 ‘마이너스의 손’이 드디어 발휘되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장 대표는 진지한 얼굴로 이윤 쪽을 바라보았다.
“이게 먹히고 안 먹히고가 중요한 게 아니지. 그렇지, 윤아? 내년에 무슨 프로그램이 등장하는지 네가 말 좀 해 줘라.”
“아아…….”
이윤은 씁쓸한 얼굴로 토트윈 쪽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장 대표님도 그 부분에서 고민을 꽤 많이 하셨어. 그래서 은우만 따로 솔로 앨범을 내느냐 마느냐로 의논을 하기도 했고.”
이윤은 토트윈이 오해할까 싶어서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물론 한 멤버만 솔로 앨범을 내주면 너희들도 그렇고 팬들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서 그저 생각만 해 본 거고 그렇게 진행되지는 않았을 거야. 아깝더라도 폐기하는 방향으로 갔겠지. 하지만…….”
이윤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벽에 걸려 있는 달력으로 걸어가 2월까지 파라락 넘겼다.
“2월에 새로운 프로그램이 편성될 거라고 하더라.”
“?”
“어떤 프로그램이요?”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
“……?? 아이돌 육성……. 네?”
“그냥 프로그램 제목 그대로야. 여러 회사에서 아이돌을 차출 받거나 일반인들을 데리고 와서 아이돌로 키우는 거지. 그런데, 그걸 특정 회사에서 맡아서 하면 당연히 반발이 있겠지?”
이윤의 말이 이어지자, 멤버들의 표정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TSN에서는 예능 형식으로 꾸며서 프로그램을 진행할 거고, 최종 아이돌로 선정될 N명은 시청자들의 투표로 매 라운드마다 결정될 거라고 하더라.”
“이거…… 그 오디션 프로그램이랑 비슷한 방식이네요?”
“맞아. 하지만 활동하다가 망한 아이돌, 데뷔가 막막한 연습생, 이미 활동은 하고 있지만 인지도가 0인 아이돌 등등…… 꽤 많은 지원자들이 경력직으로 들어올 거고, 그만큼 경쟁이 빡셀 거야.”
“그럼…….”
윤치우가 이윤이 말하는 의미를 이해하고, 말끝을 흐렸다.
“맞아. 내년에 우리가 시상식에서 경쟁할 팀은 바로 아육시에서 뽑힐 아이돌 팀일 거야. 그리고 하필 시즌 1은 남자 아이돌을 만드는 게 목표고.”
장 대표가 이윤의 설명이 끝나자, 박수를 짝짝 하고 쳐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뭐, 벌써부터 너희들 기를 죽이거나 걱정시키려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야. 너희들은 이미 잘하고 있고, 성장도 빠르고, 이미 꽤 많은 팬덤이 확보된 상황이니까. 하지만 회사의 입장은 또 다르지.”
장 대표는 깍지 낀 손 위에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이 덥수룩한 그의 얼굴을 얹었다.
“어쨌든 모카 엔터에서는 너희들을 이 업계에서 1등으로 올려놔야 직성이 풀릴 것 같거든. 아육시에서 뽑힌 녀석들한테 밀리게 둘 수는 없다는 소리야. 물론 토트윈도 아직 신인 포지션이고, 이제 첫 컴백 활동을 하는 거라 무난하게 가도 상관은 없지만…… 내 욕심이긴 한데, 너희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보여 줬으면 좋겠다.”
“그게 중2병 감성이고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민주혁이 은근슬쩍 불만을 표하며 말을 이었다.
“은우는 몰라도, 저희까지 중2병 감성을 잘 살리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대신 너희들한테는 캐릭터가 있잖냐.”
장 대표는 씩 웃으며 이윤에게 무언가를 나누어 주라고 지시했다.
이윤이 각 멤버들의 앞에 놓아 둔 그 무언가는 각자의 판타지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과 만화였다.
“회사에서 내주는 숙제는 당분간 보류. 지금은 그것들을 읽고 그 뭐냐, 주인공뽕? 그거 채우는 데에 집중해. 그리고 삘이 올 때 가사 써 보고.”
“악마, 용, 엘프, 정령…….”
민주혁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멤버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마지막으로 에르제에게서 멈췄다.
“뱀파이어.”
민주혁은 이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장 대표 쪽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설마, 이번에도 저희 세계관 캐릭터에 맞춰서 곡이 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팬송이랑 너무 겹칠 것 같은데…….”
“당연히 아니지.”
장 대표가 오해할 만했다고 말하고,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냥 그 소년 만화 느낌 있잖아. 오글거리고 감성적이고 그런 거. 각자 캐릭터에 맞춰서 그것들을 준 거는 너희들이 조금 더 몰입하기 쉽도록 선별한 것뿐이야.”
장 대표는 에르제 쪽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앨범 콘셉트는 오글거림이기도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학생’ 콘셉트야.”
“학생……?”
“그래. 학생 때의 소년, 소녀들의 감성. 중2병도 어떻게 보면 비슷한 맥락이잖아. 사춘기, 풋풋함, 뭐든지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뭐 그런 것들.”
그제야 토트윈 멤버들은 장 대표가 이번 앨범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깨달았다.
중학생, 고등학생…… 그 분위기로 이번 앨범 콘셉트를 잡겠다는 뜻이었다.
그건 어떻게 보면 대부분의 아이돌이 소화하게 되는 통과의례이기도 한데, 여기에 장 대표는 ‘아육시’에 대한 말을 꺼내면서 했던 ‘토트윈만이 할 수 있는 것’인 중2병 콘셉트까지 추가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아이디어는 은우 덕분에 생각난 거지만 말이야.”
장 대표는 큭큭 웃으며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슬슬 흥미가 동하는 모습을 보이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에르제는 귀찮은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은 조금 전 이윤이 그의 앞에 올려 둔 만화책과 소설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괜찮아요.”
에르제는 앞에 놓인 것들을 밀어 내며,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오히려 여기에는 뱀파이어에 대해 틀린 게 더 많을 것 같거든요. 그리고 가사도 이미 다 써 두었어요.”
“……벌써?”
장 대표는 의자 등받이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은 아니라서요.”
이전에 장 대표가 컴백과 관련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에르제는 그때도 바로 가사를 넘겨줄 수 있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악보 뭉치가 가득 들어 있으니까.
다만, 더 내놓으라고 할까 봐 말을 하지 않았을 뿐.
‘하지만 지금은 가사를 먼저 전달하는 게 낫겠어.’
아무래도 여유가 좀 필요할 듯싶었다.
곧 음원이 나오고 녹음을 하면서 앨범 제작에 시간을 쏟게 되면, 데뷔하기 직전처럼 정신없이 바빠질 게 뻔했다.
그리고 앨범 발매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팬사인회, 쇼케이스, 공연과 무대 준비로 바쁠 테고.
‘그렇게 되면, 안병인이나 뱀파리스 놈들의 움직임에 대처하기 어려워져.’
그렇기에 다른 멤버들이 가사를 쓸 때까지 잠깐의 시간을 벌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물밑에서 최대한 미리 준비를 끝마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세상 일이 뜻대로는 돌아가지 않는 법.
장 대표는 에르제에게서 받아 든 가사지를 읽은 뒤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멤버들 쪽을 보며 말했다.
“너희들 가사 쓰는 족족 은우한테 검사해 달라고 해라. 내가 볼 때, 은우가 이쪽으로 완전 특화되어 있는 것 같으니까.”
“염X.”
에르제는 최근에 인터넷에서 배운, 꽤 흥미롭게 느낀 욕설을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엉?”
장 대표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에르제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이미 양손으로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 * *
“자! 검사해라!”
태현우는 어깨를 펴며 당당하게 에르제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에르제는 반쯤 혼이 나간 사람처럼, 기계적으로 종이를 받아 들고 가사를 읽어 내려갔다.
부우욱―!
그러고는 특별한 말도 없이 곧장 종이를 찢어 버렸다.
“야!”
“너.”
에르제는 진지한 얼굴로, 발끈하는 태현우를 바라보았다. 괜히 흠칫해서 뒤로 물러나는 태현우에게 에르제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글씨 좀 알아보게 쓰라고!!”
결국 폭발한 에르제를 피해 태현우는 황급히 방문을 열고 도망갔다.
“응당 너의 피로 죄를 씻으리라!!”
에르제가 곧장 쫓아 나갔으나 곧 결연한 표정의 민주혁에게 제지당했다.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이번에야말로!!”
“놔라!!”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이번에야말로오오오!!”
“!!”
에르제가 용기백배한 민주혁의 외침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러나 민주혁은 의지가 넘치는 목소리와 달리,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자신이 쓴 가사 때문에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는 얼굴. 에르제는 벌써 10번도 넘게 저 표정을 본 상태였다.
“흐음.”
어차피 태현우 녀석은 윤치우의 강력한 비호 아래 몸을 숨기고 있을 터.
어떻게 보면, 에르제의 조급함에 박차를 가하는 것은 민주혁의 ‘재능 이하 수준의 오글거림’이었다.
‘얘가 제일 문제인데…….’
태현우의 것은 애초에 읽기가 힘드니 판단이 어렵고, 윤치우와 안단테는 생각보다 중2병 감성에 금세 적응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혁만큼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가사 주변에 ‘크으으윽.’ 같은 꾹꾹 눌러 쓴 민주혁의 고통스러운 감정이 적혀 있었다.
“차라리 이 ‘크으으윽’을 가사로 쓰는 게 더 낫겠다.”
“제발…….”
이쯤이면 제발 통과 좀 시켜 줘, 라는 눈빛으로 민주혁이 에르제를 바라보았지만, 이번 앨범의 성패에 꽤나 진심인 에르제로서는 어림도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모자라. 부족하다고.”
에르제는 민주혁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네 자신을 내려놓는 것부터 훈련하는 게 좋겠다.”
“……훈련?”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는데, 안타깝게 됐어.”
에르제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민주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대표하고 이윤한테는 이미 허락을 받았으니까 문제될 것은 없겠지.”
“뭔데? 뭐냐고…….”
에르제와 엮일 때마다, 일이 정상적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불안함이 가득 찬 얼굴로, 민주혁은 에르제가 내민 것을 받아 들었다.
“이번에 골든테이프 시상식에서 네가 해야 할 거야.”
에르제는 민주혁에게 엄지척을 해 주었다. 그러자 민주혁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