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56화
세리나가 완전히 깨어난 것을 확인한 후, 에르제는 그녀의 집에 내려 주었다. 그러고는 지금까지의 일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난 직후, 세리나의 표정은 더없이 안 좋았다.
“죄송합니다.”
세리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이를 꽉 깨물었다.
“……그곳에 있던 게 뱀파리스였을 줄은……. 뱀파이어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로드도 제 추측 때문에.”
“아냐. 나도 몰랐어.”
에르제는 그녀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위로했다.
“그냥, 무사해서 다행이야.”
“……로드.”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야.”
에르제는 곱씹듯이 다행이라는 말을 뱉어 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병인에 관한 것까지 처리하고 오니, 시간이 거의 새벽 3시를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가시는 겁니까?”
“그래야지. 결계만 쳐 두고. 오늘 같은 일이 또 발생하면 안 되니까.”
그의 말에 세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에 강력한 결계를 치기 시작한 에르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괜히 저 때문에…… 지장이 생긴 건 아닙니까?”
“지장?”
에르제가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쳐다보니, 세리나가 울상을 지은 채 대답했다.
“로드의 본업 말입니다. 괜히 저 때문에…… 토트윈의 일정에 지장이 생긴 건 아닌가 싶어서…….”
“…….”
무슨 말을 하나 싶었더니, 토트윈에 관한 이야기였나 보다. 이 와중에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나.
“CF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일단 내 차례가 끝나서 온 거야. 그때 네 상황을 알았거든.”
“아……!”
세리나는 그나마 안심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이제 방어 결계는 충분하니 빨리 본업에 충실하러 가 보십시오, 로드.”
“??”
세리나는 뱀파이어다.
그러면 자신의 본업은 뱀파이어 로드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본업이 아이돌이 되어 버린 거지?
세리나의 말대로 이 정도면 방어 결계가 충분한 건 맞는데,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왜…… 내가 본업이…….”
“빨리요.”
하지만 반박할 틈도 없이, 기운을 차린 세리나가 에르제를 집 바깥으로 밀어 냈다.
엉겁결에 문밖으로 밀려난 에르제에게 세리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웃어 주었다.
“당분간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나 이동하게 되면, 바로 보고 드릴 테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래.”
어정쩡한 에르제의 대답에 세리나는 허리를 90도로 접었다.
“……저 같은 걸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구하러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세리나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며 호언장담을 하고는 손바닥을 강하게 짝 부딪쳤다.
“참! CF 건은 발설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컴백 일정에 맞춰서 풀려고 계획하고 있으시겠죠?”
“어……. 응.”
어떻게 된 건지 생각보다 이쪽 생각을 잘 꿰뚫어 보고 있다.
세리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로드도 앞으로 활동하실 때 조심하십시오. 로드가 알아냈다는 뱀파리스들은 제가 따로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래. 부탁할게.”
이번에 큰 사건이 있었음에도 에르제는 세리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은 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만이 짐을 짊어지는 건 세리나에게 더한 고통일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냥은 아니었다.
“너도 최대한 조심해.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손을 떼고 나한테 연락하고.”
“네. 저도 주의하겠습니다.”
세리나에게서 원하는 답을 들은 에르제는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어떻게 하다 보니, 다사다난한 하루가 지나고 난 뒤였다.
‘……거의 아침에 들어가게 생겼네.’
그래도 이제는 숙소에 급하게 돌아갈 필요가 없어서 마음이 놓였다.
이윤에게 위독한 친척을 보러 간다고 했으니 늦게 돌아간다고 해도 뭐라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달이 가렸네.”
에르제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구름에 가려진 달을 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
혹시 앞으로의 어두운 상황을 암시하는 걸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에르제는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가리고 택시를 잡아타서 숙소로 돌아갔다.
* * *
다행히 에르제는 숙소에서 아침을 맞았다.
그가 숙소에 돌아온 것은 새벽 4시가 넘어서였는데, 그래도 3시간은 눈을 붙일 시간이 있었다.
“으으.”
온몸이 찌뿌둥한 상태로 눈을 뜨자, 그를 가장 먼저 발견한 룸메이트가 반갑게 소리쳤다.
“은우!!”
태현우가 날듯이 달려와 그대로 에르제의 몸 위로 엎어졌다.
“어떻게 됐어? 괜찮으셔?”
이미 이윤이 멤버들에게도 말을 해 놓았는지, 대충 상황을 아는 듯한 뉘앙스였다.
에르제는 누운 채로 태현우를 밀어 내며 대답했다.
“응. 다행히 위급한 상황은 넘겼고, 많이 좋아지셨어.”
“으휴, 걱정했잖아.”
태현우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겨우 찾은 친척이라면서.”
그렇게 말하고는, 은근슬쩍 삐친 티를 냈다.
“그걸 윤이 형한테만 말해 주고. 섭섭하다, 섭섭해.”
“……그랬나?”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다.
이윤이 스폰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때 지어 낸 이야기였으니, 멤버들에게는 그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태현우가 알았으면, 나머지도 다 알았겠네.’
어쩌다 보니, 세리나는 천신만고 끝에 찾은 친척이 되어 있었다.
벌컥―!
곧 태현우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방문을 열고 윤치우와 안단테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혀어어엉!!”
누가 연기 파트너 아니랄까 봐 안단테도 태현우처럼 날아오길래 에르제는 침대에서 일어나 슬쩍 비켰다.
안단테의 몸이 침대 위를 굴렀다.
“악!”
덕분에 벽에 머리를 박은 안단테가 눈물을 글썽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일찍 온 거 보니까 상태가 괜찮아지셨나 보네.”
윤치우는 그렇게 말하며 에르제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나중에 진실을 들을 수 있을까?”
그는 에르제가 유일하게 뱀파이어임을 알고 있는 멤버였기에 당연히 이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다만 에르제를 의심해서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닌 듯했고, 그냥 순수하게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걱정하는 투였다.
“……기회가 되면.”
에르제는 어깨를 으쓱하며 작게 속삭였다.
그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르겠다만, 윤치우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할 일은 없지 않을까.
아마 진실을 알게 되면, 겨우 유지되고 있는 관계가 손쉽게 끊어질지도 몰랐다.
“알았어.”
다행히 윤치우는 별 말 없이 수긍하며, 뒤에 서 있는 민주혁을 위해 옆으로 비켜섰다.
의외로 방 안에서 책이나 읽고 있을 것 같았는데, 굳이 이곳까지 행차하신 모양이다.
그래도 평상시의 성격은 어쩔 수 없는지, 에르제의 표정이 괜찮다는 것만 확인하고는 다시 휙 하고 사라져 버렸다.
“으휴, 저 부끄럼쟁이.”
태현우는 민주혁이 사라진 자리를 보고 낄낄댔다.
그 말에 피식 웃은 윤치우가 말했다.
“윤이 형한테는 내가 무사히 돌아왔다고 연락할게. 그리고 은우, 너는 윤이 형한테 고맙다는 말 꼭 하고.”
“?”
굳이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
물론 잔소리 없이 순순히 자신을 보내 준 점은 감사하지만, 윤치우의 말은 그 이상인 듯 들렸다.
에르제가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가만히 있자, 고통에서 회복한 안단테가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아, 어제 윤이 형 완전 멋있었어여.”
“멋있었다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기다리자, 안단테가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어제 형 갑자기 나가고 PD가 엄청 빡쳤거든여. 촬영하러 온 아이돌이 자기한테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고 하면서여. 건방지다고 난리도 아니었어여.”
“맞아. 다시 데려오라고 노발대발했지. 청화에서 CF 제의 넣어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신인 아이돌이 자기를 무시하는 거 아니냐면서.”
태현우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짜증 섞인 목소리를 뱉었다.
“맞아여. 우리가 옆에 있는데도 진짜 꼴불견이었음.”
얼굴을 찡그리며 대꾸한 안단테는 이내 침대에서 내려와 오른손을 절도 있게 옆으로 쫙 펼쳤다.
“근데 그때, 윤이 형이 나타나 가지고는 PD 앞을 딱! 하고 막았다니까여. ‘은우, 제가 보냈습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는데, 크으……!”
멋진 매니저 뽕을 치사량 이상으로 맞은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같이 중독된 것으로 보이는 녀석도 신이 났다.
“윤이 형, 완전 다른 사람처럼 보이더라. 맨날 잔소리만 하는 잔소리쟁이인 줄 알았는데, 할 땐 또 하더라고?”
뭐 대충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다.
아마 자신이 말도 없이 촬영장을 떠난 것 때문에 PD가 열이 받은 모양이고, 이윤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꽤 단호하게 대처했다는 소리인 듯하다.
평상시에 굽신굽신하는 모습만 보이다가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나서 주었다는 사실이 꽤 감동적이긴 했다.
‘……근데 그렇다고 해도.’
이 이야기를 도대체 언제까지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그렇다고 그만하라고 하면, 이 두 놈이 ‘매정한 놈!’이라고 하면서 태클을 걸까 봐 살짝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애매한 상황을 벗어나게 해 준 것은 화제의 주인공 이윤이었다.
“오냐. 잔소리쟁이 등장이다.”
언제 숙소로 들어왔는지, 이윤이 문밖에서 팔짱을 끼고 태현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엇!”
태현우는 순간 당황하다가 특유의 쾌활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우리 잘생기고 멋지고 강단 있는 윤이 형 등장이오!”
“하아.”
이윤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쟤네 어제부터 저러더라.”
이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크게 소리쳤다.
“은우 돌아왔다고 말하니까 대표님이 바로 컴백 회의 하자고 하시더라. 빨리 논의하고 컴백 앨범 가닥을 잡고 싶으신 거 같으니까 얼른 나갈 준비 해. 그리고 나간 김에 회사 연습실에서 연습도 좀 하고.”
이윤이 그렇게 말하며 멤버들을 닦달하기 시작하니 다시 전의 이미지로 돌아온 기분이다.
‘뭔가, 집에 돌아온 기분이네.’
괜히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어젯밤 느꼈던 불안감이 조금 누그러지는 기분.
에르제는 구레나룻을 만지작거리다가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움직였다.
곧 나갈 준비를 마친 멤버들이 밴에 올라타자, 이윤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들을 빠르게 훑었다.
“다 왔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으나, 이윤은 편한 복장의 멤버들을 확인하고는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백미러로 에르제를 흘끗흘끗 보던 이윤이 그에게 물었다.
“일은…… 잘 해결된 거지?”
“네.”
에르제는 멤버들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고, 이윤 역시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CF 촬영장에서 어떻게 했는지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 그것이 매니저로서의 본분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멤버들의 말에 따르면, 이윤은 PD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사과까지 받아 냈다고 하더라.
사정을 듣지도 않고 대뜸 화부터 내서 미안하다면서 PD가 사과했단다.
그래서 에르제는 뱀파이어 대 인간으로서 이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핏빛 구름이 하늘에 수놓아지는 날, 그 사이를 뚫고 나온 달빛이 그대를 감쌀 것이고, 흐드러지게 피어난 혈화는 무엇보다 아름다울지니. 이는 그대에게 전하는 나의 마음이리라.”
“……?”
“?”
“??”
이윤은 당황해서 핸들을 옆으로 꺾을 뻔했고.
“……서은우.”
민주혁은 진지한 얼굴로 에르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중학교 3학년으로 진학할 생각은 없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