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55화
거짓말이 들통 났다.
이미 서은우는 자신이 뱀파리스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피도 충분히 짜냈고, 정신 지배를 하기 위한 ‘눈을 5초 이상 마주치고 있을 것’이라는 필요조건도 갖추어졌다.
‘끝났어.’
김지태가 입을 열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았다.
“알고 있었나?”
그러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알고 있었으면, 이런 멍청한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크, 크하하핫.”
김지태가 순간적으로 피를 머리로 끌어올리자, 그의 눈이 자색으로 변했다.
타락한 피의 색, 뱀파리스의 특징이 그대로 발현된 것이다.
하지만 서은우는 그럼에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담담히 자신과 눈을 마주친 채로 흑안을 번들거리기만 할 뿐.
정신 지배라는 술법을 아예 모르는 것이 틀림없었다.
“돌이키기에는 늦었다, 애송아.”
김지태는 승리를 확신하듯 말을 꾹꾹 눌러 뱉었다.
하지만.
“…….”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째서?”
묘한 정적이 흐른 뒤에 나온 김지태의 중얼거림에 서은우는 곧 웃음을 터뜨렸다.
“몇백 년도 살지 못한 것 같은데…… 나보고 애송이라고?”
“?”
“그때나 지금이나 너희들은 변한 게 없구나.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지나친 자기애만 넘쳐흐르는 쓰레기들.”
서은우의 흑안이 조금씩 새빨갛게 변해 갔다.
“정신 지배는 그렇게 조잡하게 하는 게 아니야.”
“어, 어어…… 어어?”
그리고 김지태의 의식이 역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뭐야. 뭐야, 이거. 뭔데? 통하지 않는 거야?
왜? 아니야. 말도 안 돼. 살려 줘.
그렇게 뒤죽박죽 섞인 생각들이 김지태의 마지막 자의식이었다.
* * *
툭―.
에르제는 싸늘하게 식은 김지태의 몸을 바닥에 그대로 내팽개쳤다. 놈은 몸의 피를 모두 빨려 미라와 같은 몰골로 생을 마감한 상태였다.
“맞잖아, 너.”
세리나를 저렇게 만든 건 이 녀석이 맞았다. 이 장소의 주인도 마찬가지로 김지태였고. 놈의 정신을 박박 긁어서 찾아낸 것이니 틀림없었다.
하지만 에르제는 그럼에도 왠지 석연찮은 기분이었다.
그의 처음 추측으로는 그들이 세리나의 존재를 추적하고 그대로 자신에게까지 도달했으리라고 판단했는데.
김지태의 머릿속을 뒤진 결과, 전혀 다른 곳에서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었던 것이다.
‘……날 어떻게 알아봤나 했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는 사실에 에르제는 세리나의 옆에 주저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티즐 고크드르늘…….”
놈들은 자신이 만든 요리를 보고 의심을 시작했던 거였다.
‘지구 사람이 아니다’부터 시작된 그들의 의심은 자신에 대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뱀파이어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따라서 자신들의 영역에 먼저 발을 들인 세리나로 시작해 자신을 찾아내서 둘의 관계를 밝혀냈던 것이다.
‘……앞으로는 일족들만 알 수 있는…….’
그렇게 생각하던 에르제는 주먹으로 바닥을 쿵 내리쳤다.
‘이미 알 놈들은 다 알았겠지.’
이제 와서 그쪽으로 수습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냥 애초에 자신이 좀 더 행동을 조심했어야 했다.
뱀파이어 말고도 그들에게 적대적인 종족이 지구에 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떠올렸어야 했다.
아이돌이라는 지위를 이용했으면, TV라는 매체를 통한다는 사실을 더욱 주의 깊게 생각했으면…… 처음부터 일족들만 아는 이야기를 꺼냈어야 했다.
‘……멍청하고 안일했어.’
에르제는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후.”
반성은 이쯤 하면 됐다. 지금은 엎질러진 물을 담으려 애쓰기보다는 아예 새로운 물컵을 찾고 물을 다시 붓는 작업이 필요하다.
에르제는 김지태에게서 얻어 낸 정보를 종합해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내 요리를 보고 알아봤다는 건 놈들 중에서도 우리와 같은 이들이 있다는 뜻이겠지.’
자신이 이끌고 온 일족들에게서 자연 발생한 뱀파리스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뱀파리스로 변한 김지태와는 다르게, 아예 처음부터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온 뱀파리스들.
이들의 로드, 혹은 최소한 간부급에 그런 존재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티즐 고크드르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지태에게서 그들 종족에 대해 더 알아내기는 어려웠다.
비밀 조항을 지키는 술법이라도 걸려 있었는지 김지태에게서 간부급의 정보를 캐내려는 순간, 놈의 자의식이 그대로 붕괴되어 정보 자체가 삭제되어 버린 것이다.
‘……이래서는 하나도 해결된 게 없어.’
에르제는 김지태의 시체를 노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안병인에 대한 정보는 얻어 내서 다행인가.’
에르제는 자신을 이곳으로 오도록 유도한 안병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안병인도 뱀파리스 중 하나인가 생각했는데, 그는 아직 인간이었다.
다만 뱀파리스에 의해 강제적으로 정신을 지배당해 꼭두각시가 되어 있는 상태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마도 뱀파리스가 되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무조건 뱀파리스가 되었겠지.’
놈들은 어쭙잖은 꼭두각시를 만드는 걸 별로 선호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병인 쪽을 이대로 놔둘 생각은 없었다.
슬쩍 시간을 확인하니, 밤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2시간이면 충분해.’
에르제는 오늘 내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세리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숨소리가 고르게 들리고 맥박도 안정적이었다. 다만 아직까지 깨어나지 않아서 문제지.
그렇다고 이대로 이곳에 두고 갈 수도 없어서 결국 에르제는 세리나를 둘러업었다.
‘조금 높이 날아야겠어.’
조그만 박쥐는 상관없지만, 그 위에 사람을 얹고 있으면 밑에서 보일 테니까.
‘……오늘 하루를 넘기는 게 쉽지 않네.’
그래도 일단 급한 불을 꺼 놓은 뒤라서 마음은 편했다.
에르제는 가마니처럼 세리나를 어깨에 얹은 채 곧 박쥐로 변해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안병인의 거주지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권속급인 안병인의 정보는 김지태에게서 충분히 얻어 냈기 때문이다.
하여, 에르제는 겨우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든 안병인의 침실로 곧장 침입했다.
세리나를 업은 채 창문 열기가 어려워서 그냥 창문을 냅다 들이박아 깨 버렸는데, 그러기 전에 에르제는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끔 미리 술법을 걸어 두었기에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탁―.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에르제는 제일 푹신해 보이는 카펫 위에 세리나를 내려놓고는 토트윈 멤버 5명이 전부 누울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침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에르제는 싸늘한 눈으로 안병인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자기 의지가 아니라고 해도 어찌 되었든 자기 사람을 건드린 쪽의 인간이다.
좋은 감정이 생기려야 생길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잠들어 있는 게 행운인가.’
에르제는 답답하게 차오르는 숨을 훅 뱉어 내고 곧장 안병인의 이마에 손바닥을 얹었다.
사가가각―.
미리 손톱으로 그어 두었던 피가 안병인의 이마를 통해 스며들기 시작했다.
‘고통은 없을 거다.’
에르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안병인의 정신세계에 접속했다.
“…….”
하나씩, 하나씩.
에르제는 김지태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민감한 정보들을 피해 가며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에르제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정신 지배를 통해 생각을 읽어 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순수하게 탐색만 하고 있기에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직 인간인 안병인에게 손속에 사정을 두기 위한 에르제의 배려였다.
‘정보의 결과에 따라서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도 있고.’
그렇게 뱀파리스와 관련된 정보를 훑어가던 에르제는 최근부터 과거로 서서히 옮겨 갔다.
안병인이 받았던 지령들. 그리고 그가 무일푼에서 어떻게 굴지의 기업을 일으켰는지까지.
‘뱀파리스 측에서…… 도와줬구나.’
그들은 안병인이 세운 ‘청화’가 성장하기까지 그에 방해가 되는 인간들을 제거해 주었던 것이다.
몇 건의 의문사와 관련된 기사들은, 뱀파리스 세력의 영향력이 그쪽까지 미쳐 있어 사건을 교묘하게 은폐해 줬음을 알려 주었다.
‘생각보다 세력이 큰데.’
결국 단순하게 ‘다 때려 부수자’는 전략이 먹힐 상대는 아니란 뜻이었다.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무고한 인간들까지 피해를 보는 게 문제.
‘그것까지도 감당한다고 쳐도…… 그러면 일족들을 모아서 또 다른 세계로 떠나야만 할 수도 있어.’
평화롭게 지구에서 살아가려는 에르제의 계획이 무너진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토트윈 멤버들도 피해를 보겠지.’
문득 그들의 얼굴을 떠올린 에르제의 얼굴이 씁쓸하게 변했다.
‘그래도 몇몇 뱀파리스의 존재는 확인했어.’
그나마 김지태 때보다는 성과가 있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안병인의 과거를 더욱 깊이 캐 나가던 그때.
방금 머릿속에 떠올랐던 인물 하나와 관련된 장면이 뜬금없이 등장했다.
‘……뭐…….’
본인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와 관련이 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기억.
안병인의 기억 깊숙이 봉인되어 있던 것인데, 그곳에는 행복한 표정의 남녀가 있었다.
여자는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남자는 확실하게 젊은 시절의 안병인이었다.
그리고 청년 안병인은 ‘민주혁’이라는 글자를 보여 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민주혁이 왜…….’
안병인의 기억 속에서 튀어나오는 거지?
당황한 마음에 계속해서 기억을 읽어 내려가니 대략적인 흐름이 잡혔다.
뱀파리스가 안병인을 찾아오기 직전까지의 기억.
그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면서 뱀파리스의 손에 봉인된 기억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남녀였지만, 드디어 그들에게 사랑의 결실인 아이가 생긴 사실에 오롯이 행복해하고 있었다.
안병인은 작명소에서 아이의 이름을 받아 왔고, 민주혁의 어머니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든다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 내가 지켜 줄게.
안병인은 온갖 일을 하면서도 전혀 힘든 줄을 몰랐다. 아이와 아내의 행복한 일상을 지켜 주기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떻게 뱀파리스에게 선택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안병인을 납치했고.
아무런 소식도 없이 일주일이나 잠적했던 안병인이 멀쩡한 상태로 집에 돌아왔을 때.
별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며 안도의 눈물을 흘리는 민주혁의 어머니에게 안병인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 천박한 피……. 악취가 나는군.
얼굴을 일그러뜨린 안병인은 그 이후로 납치되기 전의 기억이 완벽하게 봉인된 채 뱀파리스의 꼭두각시가 되어 오로지 ‘청화’라는 기업을 키우기 위해 인생을 바쳐 왔다.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현 상황에 이른 것이다.
‘……민주혁은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던 거였나.’
에르제는 ‘청화’라는 이름을 듣고 순간 움찔하던 민주혁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진짜로 운이 좋은 거야.”
만약 안병인이 민주혁의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상황이 오로지 뱀파리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면.
사각, 사각, 사각.
그들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친절을 베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제대로 정신이 들면, 그 이후는 당신이 알아서 하도록 해.’
무려 30분에 걸쳐서 뱀파리스가 걸어 놓은 제약을 제거하고 봉인된 기억을 살려 놓은 에르제는 훨씬 편안한 표정으로 잠에 빠진 안병인을 내려다보았다.
탱탱하고 젊어 보이던 얼굴은 어느새 제 나이에 맞게 늙어 있었다.
‘당신이 일군 기업을 유지하며 과거를 버릴지, 아니면 이제라도 참회의 길을 걸어갈지.’
그것까지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민주혁이랑 화해했으면 좋겠네.’
에르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안병인의 이마에서 손을 떼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