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54화
에르제는 그녀 앞에 주저앉아 빠르게 상태를 살폈다.
‘피투성이야.’
세리나는 온통 피 칠갑을 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그녀의 피였다.
“……맡겨 달라면서.”
왜 이런 꼴을 하고 있어.
모든 게…… 내 탓이다.
일족들을 다른 차원으로 보냈을 때도, 지금 세리나가 이렇게 당한 것도…… 모두 다.
불행한 일 없이 자유롭게, 그냥 그렇게 살면서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싶을 뿐이었는데.
지금까지 일족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로드로서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생긴 일 같아서 마치 심장에 돌을 얹어 놓은 듯 숨쉬기가 힘들었다.
“…….”
하지만 언제까지고 자책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에르제는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씹어 삼키며, 손톱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그러고는 주먹을 쥐어 세리나의 입 위로 가져갔다.
파르르―.
분노와 미안함에 주먹을 쥔 손이 떨렸고, 새끼손가락을 따라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툭, 툭.
한 방울씩 세리나의 입 주변으로 떨어진 피는 마치 제 갈 길을 알고 있다는 듯 그녀의 입 안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세리나가 흘린 피는 다시 거둬들이지 못하기에 또다시 에르제 본인의 생명력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이번만큼은 정신을 잃으면 안 돼.’
아무리 자신의 생명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지금 세리나의 부상은 뱀파이어에게도 치명적일 정도.
최소 2시간은 지나야 운신이 가능해질 터였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던전의 한복판에 있었다.
‘정신 차려.’
에르제는 빠져나가는 생명력에 비례해 흐려지는 눈앞의 시야를 바로잡았다.
비틀대는 몸에 힘을 주며 계속해서 피를 떨어뜨렸다.
저번에 화장실에 쓰러져 있던 윤치우에게 생명력을 나눠 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몸이 지쳐 쓰러진 것과는 다르게, 세리나는 제3자에 의해서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니까.
주르륵―.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던 피가 손목까지 타고 내려와 길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윽.”
생명력이 다시 한번 훅 하고 빠져나가자,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반대편 손으로 바닥을 짚은 에르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일어나.”
더는 일족을 잃고 싶지 않다.
황제에 의해 하나, 하나 죽어 가던 일족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을에 놀러 갈 때마다 자신에게 꽃을 주었던 어린 소녀는 10개가 넘는 마법에 맞아 꽃잎처럼 쓰러졌고.
늘 따뜻한 차를 대접하며 주름진 웃음을 지어 주던 늙은 집사는 죽는 순간에도 다른 이들이 무사히 도망쳤음에 감사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그렇게 도망치고 도망쳐서.
수백, 수천의 일족들을 희생시켜서 자신의 손으로 살릴 수 있었던 것은 고작해야 서른 남짓.
그마저도 전혀 알지도 못하는 차원으로 보냈고, 이제야 그들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는데……. 그리고 그렇게 처음 찾아낸 일족인데.
“……일……어나.”
또다시 눈앞에서 일족의 죽음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세리나를 살리는 대가가 자신의 죽음으로 귀결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주르륵.
한층 색이 옅어진 피가 흘러내렸다.
한계까지 쥐어짜 낸 것을 마지막으로, 에르제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에르제의 볼에 차디찬 바닥이 닿았다.
“후욱…… 후…….”
용광로처럼 타오른 내부의 열을 발산하기 위해 에르제가 거친 숨을 뱉어 냈다.
이대로 정신줄을 놓아서는 안 된다.
“하악.”
에르제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새우처럼 몸을 말았다.
“끄으…….”
그나마 세리나의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고통을 완화시켜 주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시야가 반쯤 검은색으로 물들자, 에르제가 입술을 강하게 깨물며 눈을 부릅떴다.
‘견뎌.’
뱀파리스 같은 녀석들이 이런 절호의 기회를 그냥 놔둘 리가 없다.
그들은 그들 동족조차도 먹잇감으로 보는, 정신이 마모된 괴물이니까.
놈들은 분명 자신이 세리나를 살리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거라고 예상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경고에서 끝날 리가 없는 그들에게는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테고.
‘그러니까…….’
정신줄을 놓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최대한 빠르게 회복하게끔 집중해야 한다.
들끓는 피를 가라앉히고, 숨을 고르고, 미친 듯이 떨리는 온몸을 진정시켜야 한다.
놈들이 나약해진 사냥감을 노리고 등장하기 전에.
“……끄윽.”
팔꿈치로 몸을 일으켜 세우던 에르제의 몸이 마치 실이 끓어진 인형처럼 툭 하고 앞으로 엎어졌다.
‘……하, 껍데기가 인간의 몸만 아니었어도……!’
그랬다면 세리나에게 이 정도 생명력을 나누어 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텐데.
몸 깊숙한 곳에 남아도는 본래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는 일조차 이토록 힘들 줄이야.
에르제가 입술을 짓이기며 열악한 현 상황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을 때였다.
저벅, 저벅―.
누군가의 느긋한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역시…… 나타난 건가.’
그리고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 도움이 필요한가? ]
에르제의 머릿속으로 윙윙 울리는 목소리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 * *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지만, 목소리는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아마 ‘도와줄까?’라는 질문에 에르제가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했다.
‘……넌 누구지?’
에르제는 최대한 정신을 침착하게 유지하며 역으로 질문했다.
[ 글쎄. ]
하지만 목소리는 대답을 회피했다.
[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가? ]
긴급한 상황에서도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렇게 물어왔다.
‘…….’
에르제는 말없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이 목소리는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다. 귀에 익은 것이 확실하다.
언제지? 언제였을까.
예전 세계에서는 아니다. 이곳에 넘어오고 나서 들었던 목소리.
― 축복을 내리겠다.
그리고 에르제는 이내 말을 걸어온 이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신?’
[ 이런. ]
목소리는 쿡쿡 웃었다.
[ 역시, 뱀파이어라 기억력이 좋은 건가? ]
그러고는 순순히 인정했다.
[ 맞다. 나는 너희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존재. 그리고 굳이 그대들의 말을 빌리자면, 이건 기적이라고 부르면 될 것 같군. ]
에르제는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서은우와 계약을 했던 악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신이라니?
저번에 축복도 그렇고, 여전히 자기 멋대로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왜 날 도와주려고 하는 거지? 그쪽은…… 우리를 싫어하잖아.’
[ 편견이다. 그런 말 못 들어 봤나? 신은 만물을 사랑한다는 말. ]
‘헛소리하지 마.’
에르제는 어이가 없어 그만 실소를 지었다.
만물을 사랑한다?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신은 편애의 끝을 보여 주던 존재였다.
그리고 신을 등진 마족은 끝없는 배척을 당했고 말이다.
저번처럼…… 자신에게 축복을 내리고 도움을 주려는 행동 자체가 이상한 것이었다.
[ 다 사정이 있어서 그렇긴 한데, 설명해 봐야 끝도 없겠지. 그보다 눈앞에 닥친 상황을 생각하는 게 어떤가? 도움이 필요하지 않나? ]
‘아무 조건도 없이 그냥 도움만 주겠다고? 덥석 물었다가 체할 것 같은데?’
[ 무상이네. 그냥 내 신성만 소모되는 것뿐이지. ]
“…….”
뭐지, 이 무담보 무이자로 대출을 해 주겠다는 불길한 뉘앙스는? 에르제는 입술을 깨물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어떻게 도와줄 생각인데?’
[ 수락한 걸로 이해해도 되나? ]
그 말에 에르제는 인상을 구겼다.
지금 오는 것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수밖에 없었다.
‘좋을 대로 생각해.’
[ 대답이 애매하기는 하지만, 뭐 상관없겠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으니. ]
의미 불명의 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딱 한 마디를 더 내뱉었다.
[ 축복을 내리겠다. ]
사아아아아―!
그 말과 함께 에르제의 몸에 금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 * *
김지태는 문 앞에 서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공동 안에 펼쳐져 있을 모습을 상상했다.
‘처참하겠군.’
자신의 손으로 죽기 직전까지 만들어 둔 뱀파이어와, 그것을 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을 또 다른 뱀파이어.
생명력은 등가교환이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 아이돌 녀석이 그만큼의 생명력을 부담해야 한다는 뜻.
‘생명력을 주지 않으면 죽을 정도로 만들어 두었으니 그대로 방치하지는 못했겠지. 게다가 생명력을 받는다고 곧장 깨어나는 것도 아니고.’
결국 이 안에는 다 죽어 가는 것과 살아나는 중인…… 시체나 다름없는 두 뱀파이어밖에 없다는 뜻이다.
‘뭐, 그래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으니.’
오히려 죽음보다 둘에게는 행운일 터.
인간의 피를 강제로 과다 주입해서 자신과 같은 우아한 뱀파리스로 다시 태어날 테니까.
‘로드도 참 자비로우시다니깐.’
김지태는 어깨를 으쓱하고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한쪽 벽면에 마치 영면을 취하듯 잠들어 있는 세리나를 발견했다.
‘일단 하나는 저기 있고.’
……남은 하나는 어디에 있지?
세리나의 상태를 보니, 서은우라는 녀석이 회복을 시켜 준 것은 분명한데.
고통스럽게 바닥에서 뒹굴고 있어야 할 놈이 보이지 않았다.
그를 찾기 위해 고개를 휙휙 돌리는 김지태의 뒤에서 귀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고 있는 게 누굴까?”
“……!”
놀라서 고개를 뒤로 돌렸지만, 김지태는 그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컥……!!”
곧장 목이 잡힌 채, 고개가 천장 쪽으로 꺾여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지태는 자신의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이가 서은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세리나를 저렇게 만든 게 너야?”
놈이 친절하게 자신과 눈을 맞춰 주었기 때문이다.
“커, 커컥.”
김지태가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글썽이자.
“아, 지금 대답하기가 어렵겠구나?”
서은우가 눈웃음을 지으며 손에 쥔 힘을 조금 풀어 주었다.
“크흐…… 흐윽. 뭐……야, 너.”
“음.”
짜아아악―!!
서은우가 휘두른 손에 김지태의 얼굴이 왼쪽으로 돌아갔다.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 착한 아이지.”
서늘하기 그지없는 말투에 김지태는 발끝부터 급속도로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다.
“네가 저렇게 만들었어?”
“나…… 나, 나 아니야……! 내가 한 짓, 아니야……!!”
극도로 공포감에 찬 목소리.
“그래?”
“지, 진짜야!!”
김지태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사실 당황했던 정신은 이미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일부러 서은우를 방심시키기 위해 겉으로 연기를 하면서 시간을 끌려는 것이다.
‘……목을 조른 손에 힘을 뺀 건 네 최대의 실수다.’
덕분에 뱀파리스로서의 힘을 운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으니까.
힘의 차이는 있는 듯했지만, 역시 녀석은 아직 애송이였다.
‘피를……. 피를 더 쥐어짜 내야 해.’
다만 아직 시간이 모자랐다.
김지태는 양손으로 서은우의 손을 붙잡으며 말을 더듬었다.
“내, 내가 알아. 저렇게, 저렇게 만든 놈이 누, 누군지……!”
짜아악―!!
다시 한번 김지태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벌겋게 볼이 부풀어 올랐다.
서은우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협상이라도 하려고? 안다고 말할 게 아니라 바로 누군지 말을 했어야지.”
“……그, 그렇지! 미안해……!!”
김지태는 황급히 말을 장황하게 꾸며 냈다.
“우, 우리 팀은 뱀파이어들을…… 잡는, 그런…… 단체인데 내가 속, 속한 팀 말고 다른 팀에서 그렇……게 만든 거야. 진짜야. 나는, 나는 그냥 뒤처리만 하라고 위에서 명령, 을 해 가지고……!”
“그래?”
서은우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김지태의 멱을 잡은 상태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김지태와 서은우의 얼굴이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그 단체 이름이 혹시 뱀파리스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