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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53화 (53/307)

제53화

53화

“뭐야.”

일부러 멤버들의 눈을 피해 펼친 쪽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한 글자도 없는데…….’

이게 굳이 자신의 손가락을 찔러 가면서 전해 줄 만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에르제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그의 다친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쪽지가 에르제의 피를 빨아들이는 모양새였다.

“……!”

에르제가 당황해서 손가락을 떼어 냈으나, 이미 쪽지는 그의 피로 충분히 적셔진 상태.

츠츠츠―.

에르제의 피를 머금은 쪽지 위로 서서히 글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설마 마도구……?’

그리고 그 순간, 에르제는 쪽지가 무엇인지 파악했다.

쪽지는 미리 정해 둔 대상자의 피를 매개로 숨겨 둔 메시지를 전달하는 마도구와 같은 원리로 작동하고 있었다.

‘마녀들이 주로 사용하던 건데…….’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는 것도 잠시.

―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처음엔 의미 불명의 메시지를 전하던 쪽지 위의 글자가 점점 그림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이를 품 안에 숨겨서 유심히 보던 에르제는 그림이 완성되자마자 저도 모르게 쪽지를 그대로 구겨 버렸다.

‘세리나.’

그림은 차디찬 바닥 위에 쓰러져 있는 세리나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어떻게? 어디서……?’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지면서 에르제의 동공이 갈피를 못 찾고 마구 흔들렸다.

‘이들이 어떻게 세리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던 에르제는 곧 무언가를 깨닫고 손에 쥔 쪽지를 다시 확인했다.

혈기를 흘려보내어 파악해 보니 쪽지는 확실히 뱀파이어의 피로만 작동되게끔 설정되어 있었다.

‘그렇다는 건…… 내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

그제야 안병인이 굳이 촬영장까지 찾아와서 자신을 만나려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세리나의 그림이 진짜일 수도 있겠다는 사실도.

‘……어떤 개자식들이.’

지구에 온 이후 처음으로…… 겨우 찾아낸 일족이다.

그런데, 정체도 모를 쓰레기들이 세리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고?

꽉 쥔 주먹이 벌벌 떨렸다.

‘가야 해.’

분명 세리나가 조사한다고 갔던 청주 인근에서 벌어진 일이 틀림없었다.

에르제는 곧장 이윤을 찾았다.

“이윤, 지금 급하게 나가 봐야 해요.”

“어? 어딜?”

PD 쪽에 붙어서 열심히 촬영을 지켜보던 이윤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지금?”

“네.”

에르제는 빠르게 생각해 둔 변명을 말했다.

“저번에 처음으로 뵈었던 친척이 몸이 많이 안 좋다고 해서…….”

“지금 연락이 온 거야?”

이윤은 놀라서 에르제를 끌고 구석으로 갔다.

“어차피 은우 네 촬영도 끝났고, 아니, 아니지. 이건 촬영이 있어도 도리를 지키는 게 맞다. 내가 PD님께 잘 말씀드릴 테니까 빨리 가 봐. 이거 챙겨 가고.”

이윤은 혼란한 상황에서도 냉정을 유지하며 매니저로서 우선해야 할 행동을 취했다.

에르제는 이윤에게서 법인 카드를 받아 들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걸로 택시 타고 가. 비용은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급했는데, 이윤이 붙잡고 늘어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가 볼게요.”

에르제는 그렇게 말하고, 곧장 촬영장을 빠져나와 옥상으로 향했다.

‘이윤이 택시를 타고 가라고 하기는 했지만…….’

일단 택시를 타 본 적도 없고, 굳이 타야 할 필요도 없었다.

덜컹, 덜컹!

‘잠겨 있나.’

에르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혈기를 손에 두르고 힘을 꽉 주었다.

까드득, 하는 소리와 동시에 손잡이가 그대로 비틀리며 문이 열렸다.

‘……법인 카드는 수리비로 써야 되려나.’

에르제는 콧잔등을 찡그리고는, 이내 옥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고층 빌딩이라 그런지 딱 타기 좋은 바람이 불었다.

근처에 CCTV가 없는 것을 확인한 에르제는 곧장 옥상 아래로 뛰어내렸다.

* * *

에르제는 연신 느껴지는 불길한 생각으로 날아가는 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청주라고 했지.’

박쥐로 변해서 퍼드덕거리는 것뿐이지만, 그 속도는 일반 차량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예전에 살던 세계에서도 나라와 나라 사이를 왔다 갔다 할 때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하물며 도시와 도시 사이의 거리는 1시간이면 충분했다.

‘일단 도착은 했는데…….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어.’

하지만 문제는 청주의 ‘어느 야산’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쪽지에 쓰여 있던 것을 종합해 봐도 딱히 소득이 없었다.

‘이럴 거면 지도 위에다 위치를 정확히 찍어 주던가!’

온갖 짜증을 담은 얼굴로 골목에 숨어서 세리나에게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역시나 답은 오지 않았다.

그나마 희망적인 부분은 세리나가 아직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는 것.

‘직계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바로 알 수밖에 없어.’

자신의 피를 매개로 새롭게 탄생한 뱀파이어이기에 세리나가 목숨을 잃으면 곧바로 자신에게도 경종이 울린다.

원래는 직계의 힘이 다른 종족들에게 흡수되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술법이지만, 이렇게 생존 여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했다.

‘어디 있는 거야, 세리나.’

다시 박쥐로 변해 날아오른 에르제는 일단 눈에 보이는 산을 모조리 뒤지고 다녔지만, 세리나는커녕 광신도 집단의 흔적도 찾지 못했다.

‘…….’

한참을 찾아다니던 에르제가 야트막한 언덕까지 조사해야 하나 고민하던 때.

서 있는 곳에서 공간이 미묘하게 일렁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에르제는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갔지만, 마치 아무것도 없다는 듯 그대로 손이 통과되었다.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결계?’

순간, 이전에 윤치우와 함께 갇혔던 던전이 떠올랐다.

‘이곳도 던전 형식인 건가?’

하지만 세리나에게서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던전이거나 결계가 있었다는 뜻은 아닐 터.

에르제는 주머니에 들어 있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건가.’

세리나가 이 안에 있다가 갇혔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눈앞의 일렁임이 결계보다는 던전에 가까울 거라는 점도 금세 알아차렸다.

‘저번에 던전에 갇혔을 때, 전자 기기들이 모조리 먹통이 됐었으니까.’

에르제는 벽처럼 보이는 곳을 더듬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공간을 왜곡한 던전은 기본적으로 벽이 튼튼한 편이 아니다.

애초에 찾지 못하게 해 놓는 것이 목적이니 굳이 단단하게 만들 필요까지는 없으니 말이다.

‘들어가는 입구만 찾으면 돼.’

이미 원래 세계에서 던전에 대해 많이 겪었던 에르제이기에 입구를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력이 집중되는 곳만…….’

일렁임에 손을 넣고 정신을 집중한 에르제에게 곧 전반적인 마력의 흐름이 잡혔다.

사라락―.

이리저리 꼬여 있는 마력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입구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던전으로 만든 이의 마력이 자신의 힘보다는 약했기에 일이 좀 수월했다.

정확한 길을 따라 입구에 도달하니, 곧 일렁임이 사라지며 원래의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크네.”

꽤 커다란 건물이었는데, 세리나가 말한 것과 생김새가 비슷했다.

지붕 쪽이 돔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도 들었던 그대로였다.

이를 확인하자마자, 에르제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세리나!”

그러고는 곧장 크게 소리쳐 세리나를 불렀다.

던전주가 지키고 있는 던전과는 다르게, 이곳은 밀폐형 던전.

눈에 띄지 말아야 하는 곳이기에 이곳의 경호 인력이라고 해 봤자 던전주급은 아닐 것이다.

그저 장소를 던전화 시켜서 외부와 차단만 해 놓았을 뿐. 그렇기에 비밀리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세리나!!”

하지만 건물 안에는 경호 목적의 마물도 없는지 자신의 목소리만 크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장소가 발각돼서 죄다 내뺐나?’

만약 그렇다면 세리나가 이 안에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일단 목숨이 끊어진 것은 확실히 아닌데……. 다만 어째서 뱀파이어들이 세리나를 그렇게 만든 건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세리나가 추측하기로는 지금 이곳의 주인은 뱀파이어 중 하나일 것이라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이야기는 들어주었을 텐데.’

세리나가 다짜고짜 먼저 공격할 아이도 아니고, 뱀파이어들도 아무 이유 없이 세리나를 공격할 종족이 아니다.

‘……뱀파이어가 아닐 가능성도 있겠어.’

물론 세리나의 생각과 안병인을 보았을 때는 뱀파이어일 확률이 매우 높아 보였지만, 만에 하나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을 수도 있었다.

에르제는 최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넓은 장소를 빠르게 뒤졌다.

‘제발, 무음 모드가 아니기를.’

에르제는 핸드폰으로 세리나에게 계속 전화를 걸면서 그녀를 찾았다.

그렇게 그가 1층을 다 뒤지고 2층으로 올라왔을 때.

큰 문이 있는 곳 안쪽에서 토트윈의 데뷔곡이 들려왔다. 세리나의 스마트폰 벨소리가 틀림없었다.

― HaLLo―!

“……!!”

에르제가 다급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몇십 명은 모일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공동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마법을 이용해서 건물 내의 공간을 잡아 늘여 놓은 듯한 곳이었다.

― 아직 나는, 이곳에.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벨소리 쪽으로 향하자, 곧 구석에 쓰러져 있는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세리나!!”

거리가 있었지만, 누군지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쪽지에 그려져 있던 그림과 똑같았으니까.

쿠웅―!

에르제가 앞뒤 잴 것 없이 세리나에게 뛰어가다가 갑자기 투명한 벽에 부딪혀 몸이 1m가량 밀려났다.

“윽.”

세리나에게 가는 길에 무언가를 설치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당한 일이라서 몸에 가해진 충격이 꽤 심했다.

가장 먼저 부딪힌 머리를 매만지던 에르제는 다시 한번 벽에 가까이 붙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투명한 결계에 의해 공간이 나누어진 모양이다.

“X새끼들이.”

거친 욕설을 뱉은 에르제는 마른세수를 하고 냉정을 되찾았다.

가지고 있는 힘으로 충분히 결계를 강제로 부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세리나를 치료할 혈기가 부족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내가 다급해지기를 노리는 거야.’

에르제는 입술을 짓이기며 벽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최대한 힘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이 엿 같은 벽을 허물어야 한다.

‘이중으로 이런 개 같은 짓거리를.’

그럼에도 열이 받는 건 지금 이 결계를 친 힘이 혈기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

‘왜 뱀파이어들이?’

동족애가 강한 녀석들이 어째서 세리나를 저렇게 만들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계를 하나씩 해제하던 에르제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혈기……는 맞는데.’

이렇게 탐닉적으로 피를 갈구하는 결계는 에르제가 알고 있는 뱀파이어의 힘이 아니었다. 마치 대상의 모든 생명력을 앗아 갈 듯한 힘이었다.

‘……아무리 카니발 때문에 흡혈 욕구가 강해졌다고 해도 이렇게 본성이 바뀌지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다잡던 에르제는 이내 그들 뱀파이어에서 스스로 벗어난 종족 하나를 떠올렸다.

인간들의 피를 죽을 때까지 빨며, 모든 다른 종족들을 천박한 피로 여기고 먹이로밖에 보지 않는 놈들.

그리고 뱀파이어인 그들을 누구보다 증오하며 멸족에 진심이었던 놈들.

‘……설마?’

안병인 그리고 이곳 비밀 집단을 이끌던 녀석도 뱀파이어가 아니었다.

‘뱀파리스?’

그들 종족의 이름을 떠올린 순간, 에르제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그러고는 결계를 거칠게 부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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