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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52화 (52/307)
  • 제52화

    52화

    [ (태현우가 보낸 톡 내용) ]

    [ (태현우 입에 티즐 고크드르늘이 들어가는 사진) ]

    에르제가 두 개의 사진을 올리고 ‘응징 완료’라는 글을 SNS에 업로드 하는 순간.

    운전대를 잡고 있는 이윤이 뒤에 타고 있는 멤버들에게 말했다.

    “숍 갔다가 바로 CF 촬영장으로 향할 거야. 가면 PD님 말씀 잘 듣고, 최대한 NG 안 나게 열심히 해. 촬영 길어지면 너희도 힘들고 스태프들도 힘드니까.”

    “네에.”

    “예이!”

    “그리고 미리 스크립트 나눠 준 것도 다 숙지했지?”

    청화의 CF 촬영을 한다고 신이 난 태현우와 안단테가 손을 번쩍 들면서 대답했다.

    “당근이에여!”

    “다른 멤버들이 찍을 제품까지 다 외웠습니다. 후후.”

    “그래 뭐, 치우랑 주혁이도 알아서 잘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고, 은우는?”

    “문제없어요.”

    에르제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대답했다.

    “연기 전문 아이돌이거든요.”

    “…….”

    왠지 저번 라이브 방송 때 요리인이라고 했던 게 떠올라 이윤은 찝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촬영 길어지면 큰일이니 다들 잘하자. 내일모레 바로 연말 시상식 참가해야 하잖아. 피곤해서 푸석푸석한 얼굴로 갈 수는 없으니까.”

    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흘렀는지 연말 시상식이 다가온 것이다.

    오랜 세월을 살면서 시간에 꽤 무감각해진 에르제에게 이런 기분은 아주 신선했다.

    ‘워낙 바빠서 그런가.’

    가만히 멍 때리고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흐르지만, 무언가에 열중하면 몇 시간이고 금세 훅 지나가 버리지 않는가.

    최근 며칠 동안의 짧은 휴가를 제외하면, 거의 쉬지도 못하고 일에 치여 사니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오늘은 화장품 CF 촬영에다 이틀 뒤에는 시상식 연속으로 3곳을 참석해야 하고, 그리고 또 컴백 준비를 하고…….’

    굵직굵직한 일들만 떠올렸는데도, 벌써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이 이번 시상식과 관련해서는 큰 연관성이 없다는 정도.

    이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2021년 하반기 데뷔가 아니라고 한다.

    2022년 상반기에 데뷔하는 이들과 같이 묶여서 상은 2022년 말이나 되어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하반기 활동이 다른 이들에 비해서 짧을 수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한 조건이라고 했다.

    ‘이왕 하는 거, 내년에는 제일 좋은 상 타면 좋겠네.’

    에르제는 12관왕 정도면 만족할 만하다고 생각하며, 덜컹거리는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 * *

    숍에서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메이크업’을 받은 토트윈 멤버들은 촬영장에 들어서면서 스태프들에게 살갑게 인사를 했다.

    음방 1위도 하고 음원 성적도 훌륭했지만, 아직은 신인 포지션이라 뒷소문 나지 않게 잘 관리해야 한다고 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르제도 고고한 자태로 인사를 했는데, 오늘 메이크업 때문인지 그 모습이 꽤나 잘 어울렸다.

    “벌써부터 촬영 콘셉트에 몰입하고 계신 거예요?”

    개중 무거운 것을 들고 가던 스태프가 하하, 웃으며 그렇게 말을 건넸다.

    “?”

    무슨 소린가 싶어서 쳐다보니, 대답도 듣지 않고 저 멀리 가 버린다.

    그 스태프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분주하네.’

    다들 무언가를 들어서 옮기기도 하고, 귀에 손을 대고 원격으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고…….

    예전에 ‘HaLLo’ 뮤직비디오를 찍으러 갔을 때와 비슷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다른 멤버들도 저번처럼 허둥지둥하지 않고 차분하게 PD의 지시를 기다리는 모습.

    다만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기다리고 있자, 촬영 세팅이 끝났는지 스태프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우선 윤치우 씨랑 안단테 씨, 두 분부터 촬영 진행할게요.”

    “네!”

    “옙―!!”

    둘이 큰 소리로 대답하고 헐레벌떡 세트장 쪽으로 뛰어갔다.

    가만히 앉아서 스마트폰을 보거나 태현우와 떠들다 보니,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서 먼저 촬영을 갔던 둘이 복귀했다.

    “끄으으읕.”

    “눈이 좀 아프네. 조명이 좀 강하니까 다들 조심해.”

    안단테와 윤치우가 금세 촬영을 마치고 돌아왔다.

    “거의 원 테이크로 끝내 버렸다구여.”

    “단테 연기, 자연스럽고 좋더라.”

    윤치우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안단테가 히히 하고 웃었다.

    “CF 찍는다고 해서 무튜브 보면서 연습했어여.”

    “오구, 그랬어요?”

    “아, 좀!”

    그렇게 윤치우와 태현우가 안단테를 우쭈쭈해 주는 동안, 촬영본을 확인하던 PD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음은 태현우 씨와 서은우 씨, 두 분 촬영 진행할게요.”

    에르제는 오늘 촬영 내용을 떠올리며, 세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청화에서 들어온 CF는 남성 화장품이었는데, 에르제가 맡게 된 것은 틴트와 미백 크림이었다.

    태현우도 제품은 같았지만 색깔이나 효과가 다른 모양이었다.

    태현우는 웜톤이고, 자신은 쿨톤이라는데 솔직히 무슨 소리인지 자세하게는 모르겠다.

    “크림부터 바를게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스태프가 다가와서 그들에게 제품을 발라 주기 시작했다.

    미백 크림을 발라 준 뒤, 그녀는 에르제의 입술에 틴트를 바르며 말했다.

    “벨벳 타입이고 파스텔 톤이라 남성분들한테도 한 듯 안 한 듯 잘 어울릴 거예요. 아! 혹시 CF 전에 저희 제품 써 보신 적 있으시려나?”

    “메이크업을 해 주시는 분들에게 일임해서 잘 모르겠네요.”

    “그렇구나. 하긴, 은우 씨는 뭐 안 발라도 입술 색도 붉고, 얼굴도 하얘서 뭘 발라도…….”

    그녀는 꼼꼼하게 에르제의 얼굴을 확인하며 쉴 새 없이 말했다.

    외모 칭찬과 이번 CF에서 찍는 제품과 라인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이었다.

    “베이스가 좋으니까 분위기가 확 사네요. 발색 좋네. 립스틱 바른 줄 알겠어.”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PD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감독님! 은우 씨는 준비 완료예요.”

    “오케이, 그럼 서은우 씨부터 갑시다.”

    에르제는 PD의 말에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

    ‘오늘은 잘 아는 거라서 쉽게 할 수 있겠어.’

    그들이 에르제에게 바라는 모습과, 토트윈 내 세계관이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껍데기가 아닌 에르제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도 괜찮다는 뜻.

    에르제는 천천히 다리를 꼬고, 허리를 살짝 굽혀 앉았다.

    그러고는 한 손에 잔을 집어 든 채 턱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좋습니다~. 의상도 딱 좋아요.”

    PD는 카메라에 얼굴을 박을 듯한 태세로 손을 오른쪽으로 뻗었다.

    “자, 이제 2번 카메라.”

    에르제는 그의 손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동공을 살짝 풀어 주고, 머리카락을 털었다.

    고혹적이면서도 지적인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면서 언뜻 드러나는 나른함까지.

    에르제는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혀로 입술을 느릿하게 핥았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에 팔을 얹었다.

    “대사 쳐 주시고.”

    PD가 요구했다.

    음성은 나중에 입힌다고 입 모양만 찍으면 된다더라.

    그럼에도 에르제는 뱀파이어 콘셉트에 몰입한 채 느긋하게 대사를 읊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것 같은 자연스러움, 키스를 부르는 입술.”

    에르제는 엄지로 아랫입술을 닦아 내듯 훔쳤다.

    “뛰어난 지속력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그렇게 몇 글자 더 대사를 치자, 가장 왼쪽에 있는 카메라가 줌 인 되면서 PD가 오케이 컷을 외쳤다.

    “좋은데?”

    PD는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채로 감탄했다.

    “요즘은 아이돌들에게 소속사에서 연기도 가르친다고 하더니, 다들 자연스럽고 아주 잘하네.”

    그는 다시 한번 촬영본을 확인하고는, 이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 묻은 연미복에다가 잔 들고 있는 모양새가 딱 뱀파이어스럽네. 연습 열심히 했나 봐요?”

    “아, 몸에 익어 있어서요.”

    에르제의 말에 PD가 껄껄 웃었다.

    “서은우 씨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고……. 이제 태현우 씨랑 민주혁 씨만 찍으면 되겠네.”

    PD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을 때, 스태프 하나가 그에게 빠르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그의 말을 듣고 난 PD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병인 회장님이?!”

    PD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촬영장으로 들어오는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고 회장님, 어쩐 일로……!”

    문이 열리고 청화 그룹의 회장인 안병인이 비서를 대동하고 들어왔다.

    * * *

    “반가워요.”

    그는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멤버들을 향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는데, 중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동안인 듯했다.

    피부의 주름도 그렇고, 일단 혈색부터 굉장히 좋았다.

    “앗! 안, 안녕하세여.”

    “안녕하십니까.”

    멤버들은 그의 손을 양손으로 공손히 맞잡으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아무래도 어른이기도 하고 광고주이기까지 하니 자동적으로 예의를 차리는 것이리라.

    “반갑습니다.”

    에르제 또한 멤버들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예의 귀족 인사법으로 인사를 했다.

    “하하하핫.”

    그 모습을 본 안병인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뱀파이어 복장을 하고 그렇게 인사하니 정말 잘 어울리네요.”

    안병인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정말 반가워요. 제가 개인적으로 토트윈 팬이라서 이번에 광고 모델로 강력하게 밀었답니다.”

    사근사근한 그의 말투에 멤버들은 모두 입 모양을 ‘오’로 만들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의 회장이 자신들의 팬이라고 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심지어 그 회장이 광고 모델로 자신들을 강력하게 밀었다고 하니 말이다.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윤치우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안병인이 되었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하, 별거 아닙니다. 흠…….”

    안병인은 멀리 민주혁이 촬영을 하고 있는 곳을 슬쩍 바라보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민주혁 씨에게는 따로 인사를 드리든가 해야겠네요. 제가 일정이 바빠서 여러분과 이야기를 오래 나누지 못해서 아쉽네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사진 한 장 같이 찍어도 되겠습니까?”

    “아……! 저희가 더 감사하죠!”

    윤치우의 대답에 다른 멤버들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사진만 찍고 넘어가도 상관없지만 안병인이 자신의 SNS 같은 곳에 찍은 사진을 올려 준다면, 안병인보다는 토트윈의 이름이 더욱 올라가게 된다.

    게다가 내가 대푠데 사진 좀 찍어 봐, 같은 고압적인 태도도 아니고 정중하게 부탁해 오고 있지 않은가.

    안병인은 멤버들 사이로 들어와서 에르제의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찰칵―!

    키가 제일 큰 윤치우가 핸드폰을 받아 사진을 찍은 뒤, 그것을 다시 안병인에게 돌려주려고 할 때였다.

    “윽……!”

    에르제는 순간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황급히 손을 들어 올렸다.

    “?”

    “은우야?”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를 쳐다보자, 안병인이 제일 먼저 에르제의 손을 붙잡았다.

    “이런.”

    그는 심각한 얼굴로 에르제의 손을 놓고 자신의 옷을 살폈다.

    “이거 어떡하죠? 제 비서가 실수로 옷핀을 떼지 않은 것 같은데.”

    안병인은 옷 끝에 매달려 있던 옷핀을 들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서은우 씨, 괜찮아요?”

    “괜찮아요.”

    잠깐 따갑기는 했지만, 손가락에 구멍이 뚫린 것도 아니니까.

    “이걸 어떻게 하나.”

    “정말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아.”

    안병인은 연신 미안한 감정을 내비치다가, 이내 그에게 다가온 비서가 “이제 가 보셔야 합니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에르제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사과의 의미로 선물 하나를 준비했습니다.”

    “?”

    선물을 준비했다고?

    마치 오늘 자신에게 사과를 하게 되리라고 미리 예측한 듯한 말에 에르제가 미간을 좁혔다.

    “주머니에 넣어 뒀어요.”

    안병인은 에르제의 겉옷 주머니를 툭툭 두들기고는 이내 비서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에르제는 그의 뒷모습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가 남긴 것을 확인했다.

    ‘쪽지?’

    정갈하게 접힌 네모난 쪽지였는데, 안병인이 이것을 자신에게 남긴 의도를 당최 모르겠다.

    ‘굳이 나에게만?’

    에르제는 찝찝한 얼굴로 천천히 쪽지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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