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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50화 (50/307)
  • 제50화

    50화

    에르제는 칼을 내려놓고 가만히 윤소희 실장을 응시했다.

    ‘마녀라고 단정 지을 만한 건 드러나 있지 않아.’

    하지만 뱀파이어의 촉은 예리했다.

    수많은 뱀파이어 사냥꾼들에게서 유혈 사태 없이 무사히 도망친 전적이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그리고 그 촉은 윤소희 실장이 마녀일지도 모른다고 외치고 있다.

    “무슨 뜻이냐고?”

    윤소희 실장이 도끼눈을 뜨며 핸드폰을 다시 한번 에르제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에르제는 손가락을 뻗어 핸드폰을 뒤로 밀어내고는 피식 웃었다.

    ‘일단 강하게 나가 보자.’

    여차하면 ‘저는 기억을 잃었잖아요.’라는 천연 방패를 세워 버리면 되니까.

    “윤소희 실……. 아니. 마녀 윤소희. 서로 간 보는 건 여기까지 하는 게 어때?”

    “……뭐?”

    윤소희 실장은 헛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핸드폰을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하지만 에르제는 그녀가 더 이야기하게 놔두지 않았다.

    “토트윈 세계관에서 내가 뱀파이어 콘셉트로 갑자기 변한 게 당신의 입김이 닿아서라고 하던데? 그리고 이 선크림도 너무 뜬금없는 선물이었고.”

    에르제는 코트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선크림을 꺼내어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렇다는 건 이미 내 정체가 뭔지 알고 있다는 소리 아니야?”

    “…….”

    윤소희 실장은 에르제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가만히 눈썹만 찡그리고 있었다.

    에르제의 마지막 결정타가 들어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당신, 서은우랑 의식도 같이했다면서?”

    “……!!”

    윤소희가 깜짝 놀란 얼굴로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쯧.”

    그러다가 방금 자신이 지은 표정이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고 가볍게 혀를 찼다.

    ‘진짜로 맞는 것 같은데.’

    에르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마녀가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서은우와 의식……. 그것과 관련이 있어.’

    하여 이어지는 에르제의 목소리에는 더욱 힘이 실렸다.

    “이제 와서 숨길 게 더 있나? 애초에 마녀와 뱀파이어는 서로 협력 관계 아니야? 이제는 속내를 그만 감췄으면 좋겠는데.”

    물론 에르제의 원래 세계에서의 관계였지만, 지금까지 윤소희의 행보를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을 듯했다.

    결국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윤소희 실장이 팔짱을 슬그머니 풀었다.

    “하아, 의식 이야기는 누구한테 들은 거지? 나는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데……. 게다가 갑자기 서은우의 기억이 돌아왔을 리도 없고 말이야.”

    “윤치우.”

    “……멍청한 새끼 하나 때문에 일이 다 꼬였네.”

    윤소희 실장은 거친 태도를 보이며, 거실로 저벅저벅 걸어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려던 에르제는 그렇게 혼자 부엌에 남겨졌다.

    “…….”

    “…….”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결국 윤소희 실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윤치우도 네 정체를 알아?”

    “흉가 탐험 갔을 때 말해 줬어.”

    “그걸 또 순순히 받아들였고?”

    “고스트랑 한 지붕에 있다 보니, 보는 눈이 달라졌나 보지 뭐.”

    “……뭔 소리야?”

    에르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는 자신이 대답할 차례가 아니라 당신이 대답할 차례라는 의미였다.

    이를 알아들은 윤소희 실장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편두통에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그냥 지금 머릿속에 있는 거, 다 잊어버리는 건 어때?”

    “그럴 수는 없어.”

    에르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뱀파이어는 드래곤 다음으로 기억력이 좋은 종족이거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지금까지 이어진 대화의 흐름을 떠올리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내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어.’

    게다가 서은우와 무언가 의식을 했다는 것도 표정으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마녀이든 아니든, 그녀 또한 자신이 걸치고 있는 이면 세계에 발을 들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에르제가 깊이 생각하며 윤소희 실장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결국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윤소희 실장은 조금 탁해진 눈으로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 줄 수는 없지만, 오픈할 수 있는 것은 해 줄게.”

    그렇게 그녀는 30분 동안, 서은우와 있었던 일을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은우의 죽음을 막으려는 의도뿐이었어. 이미 멘탈이 부서질 대로 부서진 녀석이 택할 길은 하나밖에 없었거든.”

    대충 초반은 윤치우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흡사했다.

    정신적으로 벼랑 끝까지 몰린 서은우의 앞에 두 가지의 선택지밖에 없었다. 포기하거나 혹은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거나.

    그러나 서은우는 길을 선택하는 것 자체를 포기했다. 자신이 죽는 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서은우의 결심이 무르익기 직전, 평소 그와 가깝게 지냈던 윤소희가 그 사실을 알아챘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서은우에게 다른 길을 제시했다.

    “……그때는 그것밖에 없었어.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의식을 하는 게 최선이었거든.”

    그렇게 그녀가 내민 최후의 카드는 지금 그들이 이야기하는 ‘의식’이었다.

    하지만 에르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악마가 관련되어 있는 의식은 아니었다.

    “……얻게 된 경위는 말할 수 없지만, 은우와 내가 했던 의식은 뱀파이어를 불러오는 것이었어.”

    “뱀파이어를?”

    “평범한 뱀파이어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가수’인 뱀파이어를 불러오는…… 의식이야.”

    “…….”

    에르제의 머리가 순간 멍해졌다.

    ‘뱀파이어를?’

    한 종족을 특정해서 불러온다? 심지어 ‘가수’인 뱀파이어라고 했다.

    의식이라는 이름치고는, 그 내용이 꽤나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대충 아귀가 들어맞아.’

    윤소희 실장이 처음부터 자신을 뱀파이어라고 특정한 듯이 행동한 것도 말이다.

    그리고 일단 윤소희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음유시인이었다는 건…… 그것만큼은 절대 알 리가 없으니까.’

    윤치우에게조차 밝히지 않은 것이니 그 사실을 모르는 윤소희가 굳이 ‘가수’ 운운하며 거짓말을 섞을 이유는 없었다.

    그쪽으로 쓸데없이 자세하면, 되레 의심부터 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는 건…….’

    의심해 볼 구석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 의식을 만들어 낸 장본인, 그 누군가가 자신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 의식에 관해 말해 준…….”

    “몰라.”

    하지만 윤소희는 에르제가 물어볼 것을 미리 알았는지, 곧장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알아도 대답해 줄 수 없는 거지만, 진짜로 몰라. 그냥…… 몇 장의 종이로 지금까지 전해져 왔을 뿐이야.”

    “……그럼 그 의식에 관해 적혀 있는 종이는?”

    윤소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의식이 성공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뭔지 알아? 그 의식이 적혀 있는 종이가 부식돼서 사라지는 거야.”

    “……!!”

    그 사실을 들은 에르제의 눈이 커졌다.

    “잠깐만!”

    그러고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혹시 의식에 관한 내용도 기억에서 날아갔어?”

    “……?!”

    윤소희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에르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냥…….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흔한 일이야.”

    에르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윤소희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에르제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당신은 마녀야? 아직 그 대답은 못 들었는데.”

    윤소희는 몇 번 입맛을 다시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글쎄.”

    어느새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에르제가 있는 식탁까지 걸어온 상태였다.

    그녀는 에르제가 사 온 요리 재료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그쪽이 해 준 요리는 다음에 먹어 볼게. 이 이상 이곳에 있는 것도 좋지는 않아서.”

    “이대로 그냥 가려고?”

    “처음에 이야기했잖아. 모든 걸 다 알려 줄 수는 없다고.”

    윤소희는 에르제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표정은 전에 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이 이상 파고들면 네 목숨뿐만이 아니라 주변 모두가 위험해질 거야. 오늘 들은 내용으로 만족해.”

    “……뱀파이어를 상당히 무시하는 발언 같은데.”

    윤소희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에르제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주었다.

    “그러다가 진짜로 죽어.”

    그렇게 말한 그녀는 현관 쪽으로 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서은우가 다시 돌아올 몸은 살아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또 한숨을 푹 내쉰 윤소희는 겉옷을 입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 상태로 신발을 신던 그녀는 현관까지 나온 에르제에게 당부했다.

    “둘이 있을 때야 뱀파이어와 인간의 관계니까 반말해도 별 상관이 없지만, 다른 사람들 있을 때는 실장과 아이돌의 관계야. 무슨 뜻인지 알지?”

    “……그렇게 따지면 둘이 있을 땐, 그쪽이 나한테 예의를 갖춰야 하지 않나? 이래 보여도 2,500년을 넘게 살았는데.”

    그 말에 윤소희는 대답하지 못하고 싱긋 웃어 보였다.

    쿵―.

    문이 닫히고, 에르제는 그대로 신발장 앞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윤소희가 신발을 신느라 어지른 현관에 신발들이 방향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흠.”

    에르제는 신발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는 허리를 펴고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부식되고 기억을 잃는다라…….’

    그러고는 윤소희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에르제가 알고 있는 한, 그런 능력이 있으며 또 그런 일을 벌일 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애초에 내가 음유시인으로 살았던 것을 알고 있는 뱀파이어들이 그리 많지도 않고.’

    인간 세상에 나갈 때, 다른 뱀파이어들이 로드를 모시겠다며 난리를 치는 것을 막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뭐 개중에는 눈치챈 녀석들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의식까지 관련 있는 놈은 하나뿐이지.’

    게다가 녀석은 지금 자신에게 그 누구보다 든든한 원군이 되어 줄 터였다.

    에르제는 꼬불거리는 브로콜리를 보며 한 뱀파이어를 떠올렸다.

    ‘라하임.’

    녀석은 자신보다 먼저 이 지구에 와 있었다.

    * * *

    어떻게 하면, 자신이 에르제라는 것을 더 잘 알릴 수 있을까.

    윤소희 실장이 나가고 난 뒤, 에르제는 꽤 오랜 시간 그것을 고민했다.

    ‘라하임은 아직 내 소재를 모른다.’

    만약 라하임이 서은우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바로 자신을 찾아왔을 테니 말이다.

    ‘……아니겠지.’

    다만, 조금 걱정되는 것은 있었다.

    세리나는 지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유대감이 남아 있었을 테지만, 지금보다 훨씬 오래전에 이곳에 온 일족도 과연 그럴까?

    ‘만약…… 라하임이 지구로 온 1세대라면 날 찾아올까?’

    그것도 언젠가 올 자신을 위해서 뱀파이어가 되기 위해 카니발을 자행한 것이 라하임이라면?

    대량의 피를 공급받으며 성격이 깨진 유리조각처럼 변해 버렸을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차라리 라하임이라면 설득의 가능성이 높기라도 하지, 다른 일족들이 그랬다면 자신의 말이 씨나 먹힐까 걱정되기도 했다.

    ‘……정 안 되면 힘으로 찍어 누르면 되겠지.’

    뱀파이어 로드라는 자리는 혈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뱀파이어로서의 자격과 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니 말이다.

    ‘뭐가 됐든, 일단 얼굴을 직접 보긴 해야 해.’

    그래야 삐뚤어진 놈들을 말로 패든, 주먹으로 패든 할 것 아닌가.

    에르제는 이내 생각을 마치고는, 칼을 집어 들고 손 위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이번 휴가는 요리로 간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녀석들, 아직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녀석들,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하고 있는 녀석들.

    녀석들에게 ‘고향 요리’의 힘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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