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49화
“…….”
답장이 1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혹시나 윤소희 실장이 마녀가 아니라면, 멤버들이 그렇게 부르길래 그랬다고 변명하려 했는데 말이다.
‘바쁘다는 게 핑계가 아니었나.’
그게 아니라면, 마녀라는 말에 당황해서 답장을 머뭇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으.”
가만히 숙소에 앉아서 답장만 기다리고 있으려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에르제는 양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휴가니까 뭐라도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낫지 싶어서였다.
“생각을 오래 했더니…… 배가 고프네.”
잠시 고민하던 에르제는 숙소 근처에 있는 마트로 가서 장을 보기로 결정했다.
저번에 뮤직비디오를 찍었을 때, 윤소희 실장이 줬던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른 그는 무장을 하고 숙소를 나섰다.
* * *
지금까지 낮에 스케줄이 있을 때마다 선크림을 바르곤 했는데, 확실히 성능이 훌륭했다.
무슨 +++등급이라는데, 햇빛을 차단해 주는 효과가 실로 대단했다.
갈증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햇빛에는 취약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회사로 찾아왔던 세리나의 피부가 벌겋게 익어 있던 것을 떠올리면, 자신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을 이어 나가다 보니, 다시금 윤소희 실장이 자신에게 선크림을 주었던 의도가 의심스러워졌다.
아이돌에게 필요한 물건이 한두 가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굳이 선크림을?
‘왜 하필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줬을까.’
‘아이돌’에게가 아니라 ‘뱀파이어’에게 필요한 것을 말이다.
그렇게 깊은 생각에 빠져서 마트 안을 돌아다니던 에르제에게 꼬리가 붙었다.
처음에는 한 명, 두 명 정도였던 꼬리는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에르제가 고개를 뒤로 돌렸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핸드폰으로 찍고 있었다.
“패, 팬이에요!!”
“저도요!!”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하고 멀리서 얼굴이 빨개진 채 소녀 2명이 외쳤다.
‘어떻게 알았지?’
에르제는 잠시 당황했다.
캡 모자에 마스크, 거기에다 선글라스까지.
올 블랙으로 태양뿐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끔 완전 무장을 했는데……. 어떻게 알아봤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물론.
― 서은우 평상시 음방 갈 때나 숙소에서 나올 때 의상 알려 드림.
에르제의 평소 복장이 과해서 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소문이 쫙 퍼져 있다는 사실은 그만 모르는 이야기였다.
‘곤란한데.’
에르제는 점점 더 늘어나는 사람들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잡아뗀다.’
에르제는 카트를 놓고 어깨 높이까지 손을 들어 올렸다.
“저는 서은우가 아닙니다.”
“…….”
“…….”
잠깐 사람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지만, 곧 아까의 두 소녀 중 하나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알아요!”
“?”
안다고? 서은우가 아니라는 걸 알아?
그럼 자신을 지금 누구랑 착각하고 있는 거지?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지만, 에르제는 티를 내지 않고 말했다.
“저는 토트윈 멤버 중 그 누구도 아니고 아이돌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편하게 장을 봐 주세요.”
“네에―!”
사람들은 에르제의 대답에 재미있어하며 크게 대답했다.
이쯤 했으면 알아들었겠지, 라고 생각한 에르제는 대충 계산대로 향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멀리서 지켜보는 팬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는 법.
한 아주머니가 에르제에게 다가와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종이를 내밀었다.
“아이고, 청년. 요기 사인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우리 딸이 팬이라네.”
“?”
에르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주머니를 바라보자, 아주머니는 핸드폰을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딸이 지금 대학 때문에 다른 곳에 있어서 그래. 요기 집 앞 마트에 연예인 온 거 같다고 사진 찍어서 보내 주니까 아주 성화여, 성화.”
“아…….”
에르제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은 지금까지 지켜 온 콘셉트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게…… 저는 연예인이 아닌데요.”
“그려?”
아주머니가 이상하다는 듯이 자신의 핸드폰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토트윈인가 머시긴가 거기 서은우라고 하는디? 사인해 주는 게 어려우면, 사진은 어떤가? 고것도 어려워?”
“그게…….”
하지만 아주머니의 말에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한 명이 먼저 사인과 사진을 받으려고 시도하니,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저, 저도요!”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 주시면…….”
심지어는 마트에서 알바를 하고 있던 직원까지 합세했다.
그제야 에르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에게 진즉에 정체를 들켰던 것이다.
‘……그게 아니면,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일 이유가 없겠지.’
아무래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제대로 된 대처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에르제는 윤치우가 따로 정리해서 주었던 ‘아이돌 행동 강령’ 14조 3항을 떠올렸다.
― 혹시나 외부에 어쩔 수 없이 나오게 된다면, 사람들이 알아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니라고 잡아떼서 그 말을 믿어 주면 좋겠지만, 대부분 그런 허접한 방식이 통할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팬 서비스를 발휘해 좋은 이미지를 쌓는 편이 여러모로 현명하다…… (후략).
그 뒤로 10줄 정도 더 기억이 났지만, 일단 이들을 모두 상대해 주는 것이 맞는 듯했다.
‘하지만 적당히 선은 지키라고 했지.’
선을 그어 두지 않고 무한정 하다 보면 절대 끝이 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인식 장애 술법으로 빠져나가기에는 일이 너무 커져 버렸네.’
심지어 CCTV는 어떻게 할 수 없어서 포기하는 게 현명해 보였다.
‘이참에 괜찮은 인간이 있으면, 권속 후보로 한번 생각해 볼까.’
에르제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람들을 한 번 훑고는, 가장 먼저 자신을 찾아온 아주머니를 제일 앞에 세웠다.
“순서대로 해 드릴게요.”
에르제는 그렇게 말하고는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고 마스크를 내렸다.
“……!!”
“미친……!”
“헉.”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본 이들은 모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감탄사를 내뱉었다.
“얼굴이 내 주먹보다 작은데……?”
“……메보가 아니라 비주얼 센터인 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멀리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에르제의 귀에 들려왔지만, 기분이 그리 썩 좋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칭찬하는 게 서은우의 외모지 에르제 자신의 외모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본판을 보지 못해서 미의 기준이 매우 낮구나.’
오죽하면 음유시인임에도 노래가 아니라 얼굴을 보러 온 관객들이 더 많겠는가.
만약 자신의 얼굴 그대로 이 세계에 왔다면, 존잘 서은우는 존잘존잘 에르제가 되었을 것이다.
‘뭐든 두 번 붙으면 좋은 거랬지.’
태현우의 어록을 떠올리던 에르제는 이내 사람들과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해 주기 시작했다.
다만 사진을 찍자고 한 이들의 행태는 조금 기이했다.
“……? 거기에 계시면…….”
“괜찮아요. 이대로 찍어 주세요. 제발.”
대부분 얼굴을 조금씩 뒤로 빼려고 시도했는데, 지금 사진을 찍자고 한 남자는 더 나아가서 대략 2m는 뒤로 빠진 것이다.
결국 촬영 버튼도 에르제가 눌러야 했는데, 한쪽은 얼굴만 나오고 다른 한쪽은 전신이 다 나온 사진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개인 팬 사인회’ 수준의 일정은 30분이 넘어 가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도대체 어디서 소문을 듣고 온 건지 줄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 사람은 아까 10분 전에 나한테 사인을 받아 간 사람 아니었나?’
게다가 줄어들었던 줄에 다시 난입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하지만 로드였던 에르제에게 이런 대외적인 일을 대충 처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심지어 권속으로 들이기 적합한 인간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대형 마트의 두 코너를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등장했다.
“허억, 헉. 후, 죽겠네, 진짜.”
에르제의 뒤에 모여 있던, 사인과 사진을 받으러 줄을 선 인파를 뚫고 왔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발견한 에르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녀?”
“…….”
윤소희 실장은 어이없다는 듯이 에르제를 보다가 이내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뭐가 되었든, 이것보다 시급한 일이 없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여기까지만 할게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줄을 해체시키고 에르제에게 벗어 두었던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다시 씌우려 하자, 멀리서 “당신 뭐야!?”라는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윤소희 실장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지만, 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대꾸했다.
“모카 엔터 직원입니다. 양해 부탁드릴게요. 뒤에 은우 스케줄이 있어서 이 이상 시간을 할애해 드리긴 어려울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여러분.”
“에이 씨. 유별나네, 진짜.”
“아, 뭐야. 내 앞에 두 명밖에 안 남았는데. X라 짜증 나, 저 아줌마.”
“누가 보면 유명 스타인 줄 알겠네. 토트윈인가 뭔가 오늘 처음 들은 이름인데.”
윤소희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호의적이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태도를 확 바꿨다.
“아, 재수 없어.”
“…….”
에르제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윤소희 실장이 에르제의 팔을 잡아끌었다.
“신경 쓰지 마, 은우야.”
“신경 안 써요.”
윤소희 실장은 빈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에르제는 실제로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저 댓글이 3D가 된 기분이었을 뿐.
잘나가는 신인 아이돌에게 악플은 당연한 성장통이었고, 에르제는 그에 대한 내성을 충분히 길러 왔다.
물론 그것을 실제로 눈앞에서 겪게 되는 것은 악플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에르제의 기분이 크게 상하거나 짜증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에르제가 재수 없다고 말한 인간을 쳐다본 것은 그녀가 음방에도 찾아왔던 토트윈의 팬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고 쳐도, 팬들도 저렇게 반응하는구나.’
새삼 흥미로운 사실을 깨달은 에르제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는 윤소희 실장을 따라 무사히 숙소로 돌아왔다.
다행히 마트에서 엄선했던 요리 재료들도 함께였다.
윤소희 실장은 도끼눈을 뜬 채로, 양손에 큰 비닐봉지를 두 개나 들고 있는 에르제를 노려보았다.
“그건 뭔데? 여기서 요리라도 하려고?”
“네. 며칠분을 맞춰서 사 왔는데, 마침 잘됐네요. 실장님 것도 요리해 드릴게요.”
세상 속 편한 소리를 하는 에르제를 보며, 윤소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히 지금의 상황에서 에르제의 잘못이라고는 매니저 없이 혼자 바깥에 나갔다는 것 말고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매니저까지 휴가를 보내 준 마당에 에르제는 나름대로 대처를 잘한 편이었다.
적당히 끊지 못해서 이 사달이 났지만 말이다.
윤소희 실장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 에르제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윤소희 실장님도 이 근처에 살아요?”
“……SNS에서 난리가 나서 알았어. 마트에 서은우 등장했다고. 빛나는 미모만큼 인성도 빛난다면서 칭찬이 아주 넘쳐나더라. 그래서 바로 차 끌고 달려왔지.”
“……그럼 차는요?”
“아.”
윤소희 실장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마트 주차장에 세워 놨는데, 요금 폭탄을 맞겠네.”
“아아, 그러면 요리하는 동안 차 빼서 오시면 되겠네요.”
“……됐고.”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녀가 보여 주는 핸드폰 화면에는 몇 시간 전에 에르제가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
윤소희 실장은 눈을 가늘게 뜨며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이건 무슨 의미야?”
채소를 손질하려던 에르제의 손이 그녀의 말에 잠시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