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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48화 (48/307)

제48화

48화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기업을 고르라고 한다면, 무조건 제일 먼저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바로 ‘청화’였다.

그리고 청화의 회장인 ‘안병인’은 맨손으로 시작해 지금과 같은 어엿한 대기업으로 키운, 굴지의 기업인이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멤버들은 청화에서 먼저 CF 제의가 들어왔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 CF 모델은 항상 톱스타만 나오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진짜 저희 맞아요? 블링블링 선배님들 아니고?”

이미 몇 년째 여자 아이돌 그룹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블링블링도 아니고 신인인 자신들이라니?

윤치우, 태현우, 안단테는 전혀 현실감이 없다는 얼굴로 이윤에게 되물었다.

“어어. 그러니까 내가 좋은 일이라고 했잖아.”

이윤은 조금 전의 반발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거, 또 청화 광고 모델 됐다고 콧대만 더 높아지는 건 아니겠지.”

“에이, 저희가 언제 그랬어여.”

안단테가 히히, 하고 웃으며 이윤의 팔에 매달렸다.

“인마, 너도 곧 20살이야. 징그러워.”

이윤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런 안단테를 팔에서 떼어 냈다.

그러고는 곧 진지한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일단 대표님이 너희 자컨 기획하고 일정 소화하느라 힘들었다고 휴가는 무조건 보장해 주신다고 하셨어. 아직 회사 내부적으로 컴백 준비 시기가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번 CF 때문에 휴식 기간이 없어지지는 않을 거야.”

‘다행이네.’

그렇다면 외부적인 일을 처리하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얘기고, 모든 것을 세리나에게만 맡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에르제는 속으로 안도를 했고, 이윤은 말을 이어 갔다.

“대표님이 너희들 생각 엄청 많이 하고 계시니까 너무 걱정들 하지 말고. 아무튼, 그쪽에서 먼저 CF 제의가 들어온 거라 어그러질 일은 거의 없을 거야. 내가 이 얘기를 너희 휴가 전에 말해 주는 이유는 다들 알지?”

“앗!”

이윤의 말에 멤버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휴가라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어디 바닷가 가서 몸 태우고 그러지 말라는 얘기였다.

“휴가도 마음대로 못 즐기는 내 인생……!”

태현우가 크흡, 이라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일주일 만에 찐 살 다 뺄 수 있으면 뭐라고 안 할게.”

이윤이 피식, 웃으며 태현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러다가 아직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민주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주혁이, 너는? 괜찮아?”

“……네. 괜찮지 않을 이유가 뭐 있나요.”

민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청화에서 CF 찍는다고 하면, 팬들도 우리 위상이 올라갔다고 좋아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컴백 준비 때 CF 찍는 거면, 저희 컴백하는 날짜랑 비슷하게 CF도 풀릴 것 같은데 맞나요?”

“어? 어어.”

“그러면 자연스럽게 저희 앨범도 홍보할 수 있고……. 좋죠, 뭐.”

“…….”

민주혁의 말에 이윤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뒤에 이어서 말해야 할 걸 주혁이가 다 말해 버렸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그런 김에 마무리 지어야겠다. 내일부터 휴가니까 다들 어디 가서 사고 치지 마라.”

그 말을 왜 자신을 보면서 하는 건지.

‘누가 보면 내가 사고만 치고 다니는 줄 알겠네.’

에르제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참고로 나도 같이 휴가이기는 한데, 무슨 일 생기면 바로바로 연락하고. 그럼 나 간다.”

이윤은 핸드폰을 흔들어 주고는 이내 숙소를 나갔다.

그가 나간 뒤 잠깐의 적막이 흐르던 숙소 안은 금세 활기가 돌았다.

“일이 생겨서 좋은데, 그런 반면 일이 생겨서 괴로워……!”

“그래도 청화면 좋은 거 아니에여? 벌써부터 나는 신나는데.”

“젊음이 좋구나. 껄껄껄.”

“할아버지도 한때 젊으셨던 때가 있었잖아여.”

태현우와 안단테는 CF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또 한 편의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민주혁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소파 옆에 놔두었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나는 읽던 게 있어서.”

그러고는 그대로 방 안으로 혼자 들어가 버렸다.

‘……왜 괜히 신경이 쓰이지.’

에르제는 민주혁이 닫은 방문을 보며 찝찝함을 느꼈다.

아까 CF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도 겉으로 보기에는 냉정하게 분석하는 듯했지만.

에르제는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려 나오던 것을 눈치챘다.

‘……CF에 관해서 뭔가 좋지 않은 기억이라도 있나.’

하지만 이전까지는 연습생이었을 테니 CF랑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청화인데.’

그건 오히려 CF보다 더 접점이 없을 듯하니 패스.

그나마 생각해 볼 만한 것은 CF는 ‘연기’를 해야 한다는 점인데. 뮤직비디오를 찍을 때에도 연기하는 데 그리 부담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휴우.”

민주혁을 생각하다가 머릿속이 점점 더 복잡해지는 듯해 에르제는 숨을 내뱉으며 생각을 털어 냈다.

자기 앞가림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벅찬 상태다.

‘윤소희 실장 쪽은 아직 건드리지도 못했고.’

자컨 일정 중에 접근을 시도했으나, 윤소희 실장은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을 만나 주지 않았다.

평상시 서은우를 챙겨 주던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지만, ‘바쁘다’는 회신이 왔기에 일단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상태.

‘거기에다 비밀 집단 건도 있고.’

이렇게 당장 해야 할 큰일만 생각해도 머리가 지끈지끈거리는 판이니 민주혁까지 신경 쓰기는 쉽지 않았다.

그것도 확신이 아니라 단순히 심증뿐이라면 더더욱.

‘일단 지켜보는 걸로.’

에르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윤치우가 그에게 다가왔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

뜬금없는 소리에 윤치우를 바라보자, 그가 작게 속삭였다.

“은우는 본가가 없어. 딱히 어디 갈 데가 없어서 명절에도 회사나 숙소에 있었거든.”

“아아.”

그제야 의미를 이해한 에르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휴가 기간에도 서은우를 연기해야 하니까.’

그러나 애초에 숙소를 거점으로 하려 했으니, 대답이 어렵지는 않았다.

“나도 숙소에 있을 예정이야. 물론 중간중간에 잠시 자리를 비우는 일도 있긴 하지만…….”

“그래?”

윤치우는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 에르제에게 말했다.

“윤이 형은 그냥 별생각 없이 얘기했겠지만, 나는 아니야. 진짜로 어디 가서 사고 치지 마.”

“2,500년을 넘게 살았는데, 내가 어디 가서 사고 칠 정도로 어수룩하진 않아.”

“그건 중요하지 않아.”

윤치우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다시금 주의를 주었다.

“네가 이 세계에 온 지 고작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다.

이곳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저질렀던 일들 몇 가지가 에르제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에 많이 적응을 한 상태. 그때와는 다르다.

에르제는 당당한 태도로 대꾸했다.

“조금 전에 태현우가 노동청 이야기를 꺼냈을 때에도 나는 당황하지 않았어.”

“?”

윤치우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으나, 에르제는 계속해서 말했다.

“I’m from Korea. 이제 영어도 곧잘 하지.”

“??”

여전한 윤치우의 표정에 에르제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부족한가? 태정태세문단세…….”

“아냐. 아니, 알았어, 알았어.”

그제야 에르제의 생각을 짐작한 윤치우가 황급히 그를 말렸다.

이제는 이 세계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어필한 것이다.

윤치우는 결국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아이돌을 계속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노파심에 하는 이야기니까.”

“음.”

에르제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노파심이 뭐야?”

“…….”

윤치우는 너무 성급하게 항복 선언을 했다며, 잠시 후회했다.

* * *

드디어 휴가 첫날의 아침이 밝았다.

“다들 건강한 모습으로 봅시다.”

“빠이여!”

각자 짐을 챙긴 멤버들이 하나둘 숙소를 떠나기 시작했다.

“무슨 일 있으면 윤이 형 말고 나한테 연락해. 무슨 뜻인지 알지?”

인간의 일은 이윤에게, 뱀파이어의 일은 윤치우에게. 뭐 그런 이야기인 듯해서 에르제는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그렇게 윤치우도 떠나고, 민주혁과 에르제만 숙소에 남았다.

그러나 민주혁도 양손에 짐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숙소에 남는 것은 아닌 듯했다.

역시나 민주혁은 별말 없이 신발장으로 가서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가운데, 에르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CF.”

“?”

“연기.”

“……뭔데?”

“흠.”

에르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청화?”

“……!”

민주혁의 표정이 급격하게 무너졌다가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에르제는 그런 민주혁의 짧은 표정 변화를 이미 눈치챈 상태.

그 사실을 깨달은 민주혁은 살짝 입술을 깨물며 에르제를 잠시 노려보았다.

“너…… 진짜 짜증 나.”

“전에도 말했지만, 굉장히 드문 일이네.”

에르제가 볼을 긁적이자, 민주혁이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았다.

‘뱀파이어가 이렇게 자비로운 것도 드문 일이지만.’

에르제는 자아 성찰을 하며, 문을 열고 나서려는 민주혁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얘기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나한테만 얘기해. 그 정도 관대함은 베풀어 줄 테니까.”

“……뭐라는 거야.”

민주혁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밖으로 나가며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러나 에르제는 굳게 닫힌 문을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약하게 매혹의 힘을 섞어서 말을 했으니, 진짜로 털어놓을 곳이 없다면 자신에게 와서 말을 할 것이다.

‘다른 녀석들은 너무 둔하다니까.’

어젯밤 CF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민주혁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멤버들은 그의 심경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 말이다.

‘원래는 깊게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같은 팀, 같은 멤버였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토트윈으로서 더욱 성공해야 하는 자신도 곤란해질 터.

‘어디까지나 날 위해서야.’

에르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숙소 소파에 털썩 앉았다.

개인 연습을 위해 멤버들이 숙소를 나갔을 때 말고는, 처음 맞이하는 고요함이었다.

뭔가 진짜로 휴식하는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 순조로웠다.

매일같이 거실에서 난동을 피우는 ‘태테 듀오’가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잠시 그들의 환영이 떠올라 황급히 고개를 저은 에르제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이럴 때 라하임 녀석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만약 이윤이 아니라, 라하임이 매니저로 있었다면 굉장히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솔직한 심정으로, 이번에 세리나가 찾아간 비밀 집단의 수장이 라하임이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다.

녀석을 설득하는 일은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할 테니까.

‘……나중에 진짜로 만나게 되면, 매니저로 오라고 해 볼까.’

에르제는 즐거운 상상을 하다가 이내 윤소희 실장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이번만큼은 바쁘다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일 생각이다.

잠시 고민하던 에르제는, 윤소희 실장에게 딱 두 글자를 보냈다.

[ 마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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