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47화
이윤의 차에서 내려 회사에 도착한 에르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부주의할 수가.’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그렇게 노력을 해 놓고선, 순간 기억을 떠올리지 못해 발목을 잡힐 뻔했다.
― 네 친척이라면서……?
이윤의 의심 섞인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에르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주현’이 기다리고 있을 로비로 향했다.
‘너무 세리나라는 이름에 익숙해져 있었나.’
아니면, 회사로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단정 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음에는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다짐한 에르제는 곧 로비에 앉아 있는 세리나를 발견했다.
다만 이윤이 동행하고 있었기에 에르제와 세리나는 십몇 년 만에 만나는 친척 사이로 연기해야 했다.
세리나는 이윤에게 먼저 가볍게 목례를 하며 인사했다.
“은우 매니저님이시죠? 은우 데리고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별일 아닙니다.”
가벼운 인사가 끝나고, 세리나는 에르제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은우 안녕. 잘 지냈어?”
“니…… 에.”
한참 어린 녀석에게 존댓말로 대답하려니 쉽지 않았다.
에르제가 주뼛거리다가 허리를 숙이자, 이윤이 조심스럽게 세리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드리기 좀 그렇지만, 두 사람은 정확히 어떤…….”
“아아.”
먼 친척이라고만 했지 정확히 무슨 사이인지 밝히지 않았기에 세리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친척 관계 같은 부분은 이곳에서 인간으로 오래 산 자신이 더 잘 알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큰 5대조 할아버님의 손자분의 양녀에 또 그쪽으로 5촌지간인…….”
세리나가 사방으로 최대한 꼬아서 족보를 읊자, 이윤이 재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괜한 걸 물었네요.”
세리나가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자, 이윤이 고개를 숙이고 은우의 등을 두들겼다.
“그럼 편하게 이야기 나누세요. 대표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필요하신 거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
“커피 대접으로 충분해요.”
그렇게 이윤을 보내고, 세리나와 에르제는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로…….”
“잠깐만.”
세리나가 입을 열자마자 에르제가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에르제는 엄지손톱으로 검지를 긁어 피를 뽑아내고는 주변에 ‘인식 장애 술법’을 걸었다.
‘윤치우같이 특이한 이가 아니라면 문제없겠지.’
로비에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기에 한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감격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세리나에게 에르제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 저번에 제게 따로 알아보라고 하신 것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저번처럼 숙소로 찾아가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아서…….”
세리나는 그렇게 말하며 에르제의 눈치를 보았다.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라고 했는데, 이곳까지 직접 찾아왔기에 문책을 당할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에르제는 가만히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직접 찾아올 정도면, 무언가 이유가 있었겠지.”
“……맞아요.”
“내가 따로 알아보라고 한 거 무슨 소득이 있었어?”
에르제의 물음에 세리나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소득이 있었다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상한 움직임이 보였어요.”
“이상한 움직임?”
“네. 처음에 로드께서 악마와 관련된 것을 알아보라고 했을 때, 솔직히 이상한 명령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만……. 진짜로 있었습니다. 청주 쪽 이름 없는 산에서요.”
세리나는 그렇게 운을 떼며, 에르제에게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바닥에는, 붉은색의 형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빠져나올 때, 거기 있는 신도들 중 한 명에게 이것을 심어 두었습니다.”
“……우혈충?”
“네.”
에르제는 그녀의 손바닥에서 숙주를 찾아다니는 우혈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녀석은 피를 먹고사는 기생충인데, 주인에게 시야를 제공하는 능력이 있어 그들 뱀파이어가 간간이 정보 수집용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다만 시야 범위가 좁고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인간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지는 않아서 에르제가 사용을 허락해 주었다.
‘뱀파이어 사냥꾼들을 피하기 위해서 써먹곤 했는데.’
잠시 옛 생각을 떠올리며 피식 웃은 에르제는 이내 세리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좀 알아낸 게 있어?”
“아직까지 애매하기는 한데…….”
세리나는 조금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악마보다는 뱀파이어……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뱀파이어라고?”
에르제는 놀라서 되물었다.
뱀파이어라면, 그가 지금 애타게 찾고 있는 일족들이 아닌가.
하지만 세리나의 표정은 뱀파이어와 관련이 있다고 좋아하는 낌새는 아니었다.
“뭔가 있구나.”
에르제가 그렇게 묻자, 세리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이 말하는 ‘그분’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그들은 광신도 집단이나 다름이 없어 보였습니다.”
세리나는 그날 보았던 것들을 에르제에게 상세히 말해 주었다.
광기가 넘치던 의식 장면과 흥건했던 피, 그리고 우혈충으로 수집한 정보들까지.
에르제는 그제야 세리나가 뱀파이어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 말을 이해했다.
애초에 마족들은 인간의 영혼이나 감정과 관련이 있지, 피와는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피를 제물의 매개체로 이용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분’이라는 자에게 피를 바치는 모양이더군요.”
“……그렇다면 확실하겠네.”
에르제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현재 자신이 와 있는 시기는 2021년이지만, 세리나의 말대로라면 몇백 년 전에 지구에 온 일족들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카니발을 통해 다시 뱀파이어가 되었으니 이런 식으로 인간을 이용하며 삶을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세리나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에르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족 중 하나라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먼저 이야기는 해 봐야겠지.”
에르제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내 사람이 아닌 걸 테고.”
“그 말씀은…….”
에르제는 세리나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더 이상 녀석은 일족이 아니게 되겠지.”
“…….”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몇천 년 에르제가 로드가 된 이후 지켜져 왔던 룰임과 동시에 뱀파이어 일족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들은 인간을 포함한 다른 종족들과 잘 섞여서 지낼 수 있었고 말이다.
물론 모든 마족을 멸살하겠다는 사냥꾼 집단의 이념과는 부딪혔지만, 그들 일족은 늘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그렇게 하면 그들도 생각이 바뀔 거라고, 언젠가는 마녀들과의 관계처럼…… 인간들과도 허물없이 지낼 수 있을 거라며 말이다.
‘하지만 그때의 과오를 또 범할 수는 없지.’
말을 듣지 않는다면 쥐어 패서라도 데리고 갈 생각이었지만, 그럼에도 끝내 다른 길을 가겠다면 일족에서 몰아낼 수밖에 없다.
‘점점 할 일만 늘어나는구나.’
에르제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누르자, 세리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먼저 설득해 보겠습니다.”
“……네가?”
에르제는 눈썹을 찡그렸다.
“지금 우리 세계와 겉모습도 다르잖아.”
“그건 로드도 마찬가지잖습니까.”
세리나의 말에 말문이 막힌 에르제를 보고 그녀는 빙긋 웃었다.
“로드의 힘을 받아 직계급의 힘을 얻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그러나 에르제는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직계급의 힘이라고 하더라도, 인간들을 쥐어짜 얻어 낸 힘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세리나는 이미 생각을 굳힌 모양이었다.
“긴가민가해서 다시 찾아가지는 않았으나, 오늘 로드와 이야기를 나누고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쪽은 악마가 아니라 뱀파이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요.”
“그렇기는 한데…….”
“그리고 아무리 카니발을 일으켰다고 해도, 같은 일족이었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 최악의 경우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뿐이니까요.”
결국 에르제는 항복 선언을 했다.
“후우, 더 말해 봤자 소용없겠지.”
게다가 만약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세리나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이 곧장 알 수 있었다.
‘일단은 별일…… 없겠지.’
에르제의 말에 세리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로드.”
“감사는 무슨. 네게 자꾸 짐만 떠넘기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해.”
“로드.”
세리나는 에르제의 손을 자신의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늘 모든 것을 로드 혼자 책임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일족들과 같이 나누어 주세요. 저희도…… 뱀파이어입니다.”
“…….”
세리나의 뼈 있는 말에 에르제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에르제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일족들을 다른 세계로 보내 버린 일.
라하임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반대했던 세리나가 마치 자신을 책망 하는 듯해서였다.
왠지 그녀에게서 라하임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고마워. 부탁할게.”
“예, 로드.”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에르제는 세리나에게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다시 이윤의 차를 얻어 타고 숙소로 돌아왔고, 이윤은 멤버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는데, 차에서부터 그랬던 것을 떠올리면 뭔가 좋은 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한테 먼저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는 것 같던데.’
그래도 멤버들에게 동시에 말해 주고 싶었는지, 끝내 그 유혹을 참아 낸 이윤에게 에르제는 내적 박수를 보내 주었다.
“좋은 소식이 있다, 얘들아.”
그러나 좋은 소식이라는 말에도 토트윈 멤버들의 얼굴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으……. 또 이상한 거 시키려고 하는 거져.”
“맞아. 이번에 자컨 기획하는 것도 엄청 힘들었어요.”
“휴식을 달라!!”
그도 그럴 것이 다음 컴백을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고, 멤버들은 그사이 짧은 휴식을 누리고 싶어 했으니 말이다.
좋은 일=좋은 ‘일’, 멤버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런 공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태현우가 진지한 얼굴로 에르제에게 말했다.
“은우야, 내 생각에 노동청에 신고를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
“음.”
에르제는 태현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세리나와 이야기를 하고 난 뒤였기에 에르제도 아이돌 활동 외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니면 팬들에게 회사의 만행을 고발하는 방법도…….”
멤버들의 심정에 적극 공감하며 에르제까지 그렇게 가세하자, 이윤이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진화를 시도했다.
“아니아니, 얘들아? 너희들 휴식기에 일하라는 게 아니고 컴백 준비할 때랑 겹치는 스케줄이라서 상관없어. 진정해.”
“그래. 일단 얘기부터 먼저 들어 보자.”
리더인 윤치우가 이윤을 두둔해 주자, 멤버들은 그제야 조금 진정했다.
진땀을 흘리던 이윤이 투덜댔다.
“1위도 하고, 자컨 일정 소화도 잘 해냈다고…… 이제는 다 컸다 이거냐?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농담 반, 진담 반의 심정을 토로한 이윤이 말을 이었다.
“‘청화’ 그룹에서 신제품이 나오는데, 너희들한테 그 신제품 광고 모델 제의가 들어왔어.”
“!?”
그리고 멤버들은 ‘청화 그룹’이라는 말에, 조금 전의 불평은 어디로 갔는지 눈을 반짝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