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37화
“으으음…….”
에르제는 서서히 의식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천천히 떴다.
젖혀진 의자에 머리가 뉘어져 있었는데, 그쪽으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분명 태현우의 핸드폰을 빼앗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의 기억이 까마득했다.
‘그대로 기절한 것 같기도 한데…….’
“읏…….”
에르제는 상체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반쯤 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은 차 안이었다.
“응?”
그가 몸을 일으키자, 옆에 앉아 있던 태현우가 그를 발견했다.
“뭐야, 잘 자더니 깼어?”
“……깼냐니?”
“?”
에르제가 되묻자, 도리어 태현우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기절한 게 아니라 잠이…… 든 건가?’
하지만 곧 에르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겠지.’
만약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갑자기 잠이 들었다면 이렇게 차에 있을 리 없었고, 태현우가 저렇게 평온하게 물어볼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무대에 오르기 전에 잠이 들었다고 아마 멱살을 쥐고 흔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만히 생각하고 있자, 태현우가 이내 걱정스럽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몸은 괜찮은 거 맞지?”
“……?”
에르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보자, 안단테가 옆에서 거들었다.
“아까 진짜 깜짝 놀랐어여. 은우 형까지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무대에 못 오를 뻔했거든여.”
“……못 오를 뻔……?”
에르제가 뒷말을 따라 하며, 머릿속으로 그 말을 곱씹었다.
못 오를 뻔했다는 건…… 무대에 오르기는 했다는 뜻이 아닌가.
하지만 자신은 바닥에 쓰러진 기억까지만 있을 뿐, 무대를 소화한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정신을 잃은 채로 내가 움직였을 리는 없고.’
그건 아무리 뱀파이어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야.’
그렇다는 건 지금 당장 떠오르는 가능성 있는 이야기는 2가지였다.
‘……당시에는 의식이 있었지만 그 이후 기억이 날아갔거나…… 그것도 아니면.’
에르제의 동공이 불안하게 떨렸다.
‘서은우의 영혼이 튀어나왔거나.’
만약 그랬다면…… 그것을 가장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만약…… 서은우였다면 춤이나 노래를 내가 했던 것보다 못했겠지.’
에르제는 떨리는 목소리로 태현우에게 물었다.
“무대는…… 무대는 문제없었어? 춤이나 노래 같은 거.”
“……누가? 너?”
“응. 내가 뭐 잘못한 건 없었나 해서.”
“음…….”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태현우는 일단 진지하게 고민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래?”
“근데, 그건 왜 물어봐? 무대를 한 네가 제일 잘 아는 거 아니냐?”
“……아냐. 혹시나 해서.”
에르제는 변명이 부족했다고 여기고 말을 덧붙였다.
“그, 제3자가 보면 또 다르잖아.”
“……이상한데, 너.”
그러나 태현우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습할 때도 맨날 ‘내가 최고야.’라고 했으면서, 갑자기 겸손해졌네. 왜 그래?”
아니, 이상한 걸 알아차리는 포인트가 이상하지 않나?
물론 자신이 최고라는 건 불변의 사실이긴 하지만, 그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역으로 의심을 받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에르제는 쿨하게 태현우를 인정했다.
“……너는 날 1,500년 만에 당황시킨 인간이야.”
“뭔 소리래, 갑자기.”
태현우가 손을 들어 에르제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열 나냐? 너 단기 기억상실 이런 거라도 온 거 아니지? 그렇지?”
“오.”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핵심을 짚은 태현우에게 에르제가 드물게 감탄했다.
에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현우에게 말했다.
“그리고 추가로 500년 만에 보는, 통찰력 있는 인간이기도 해.”
“……윤이 형! 핸들 병원으로 돌려야 할 것…….”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에르제의 손에 막혀서 끝을 맺지 못했다.
이윤이 백미러로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현우야, 은우 쓰러진 후에도 일어나 무대까지 완벽하게 끝냈는데 괴롭히지 마라.”
“읍으으으읍!!”
누가 봐도 에르제가 태현우를 괴롭히는 모양새였으나, 오늘 일로 이윤의 눈에 콩깍지가 씐 듯했다.
“읍!!”
한낱 인간이 뱀파이어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기에 에르제의 손을 풀어내려던 태현우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항복의 표시였다.
“푸하……!!”
에르제가 입을 풀어 주자, 막혔던 숨을 뱉어 내며 태현우가 이를 갈았다.
“이따 잘 때 이불 뺏어 갈 거야.”
“우와, 무서워.”
“2개 다 뺏어 갈 거라고!”
“오들오들.”
유치한 복수를 꿈꾸는 태현우에게 에르제는 건성으로 대답해 주었다.
그러고는 대충 분위기가 정리되었다고 여기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보니까 무튜브에 직캠 같은 것들이 바로바로 올라오던데.’
그러나 무대가 끝난 직후여서인지 아니면 다른 문제 때문인지 이번 뮤직 큐 무대 영상은 아직 무튜브에 올라와 있지 않았다.
‘……다른 쪽에서 찾아야 하나?’
에르제는 이내 검색 방법을 바꾸어서 SNS와 공식 카페 등을 뒤지기 시작했다.
[ 이번 뮤직 큐 무대 토트윈 아쉽게 2등. ㅠ 내일이랑 모레는 꼭 1등 찍기를. ]
[ 솔직히 이번에 토트윈이 1등 못 한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1등 한 게, 이제 막 이번 주에 앨범을 낸 발라드 가수인데……. 아무리 이름값이 있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않나? 혹시 조작 아님? ]
[ 심지어 애들 무대도 엄청 잘했어. ]
에르제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글들은 이런 내용이었다.
‘아쉽기는 하네.’
덕분에 이번 뮤직 큐에서 2등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르제는 기억은 없었지만,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번에 1등을 하고 토트윈이 더욱 승승장구를 한다면 이 나라의 인간들이 자신을 더욱 많이 알아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세리나의 경우를 보니, 그가 이곳으로 보낸 일족들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경우도 있는 듯했고.
그렇다면 그들이 꼭 ‘아이돌’에 관심을 가진다고 볼 수도 없었으니까.
‘그러려면 최대한 TV에 내가 많이 나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1등까지 한다면 더욱 좋을 터였다.
던전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그만한 양의 인지도를 얻을 수 있으리라.
아쉬운 마음을 삼키던 에르제는 다시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검색을 계속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찾았다.’
에르제는 그들의 무대를 찍은 직캠 영상을 발견했다.
‘에르제 홈마’라고 본인을 밝힌 사람의 계정이었는데, 계정명이 세리나였다.
‘……홈마를 하겠다더니 진짜였냐.’
에르제라는 이름을 굳이 언급한 것과, 세리나라는 계정명이 단순히 우연일 것 같지는 않았다.
에르제는 팬 사인회에서 세리나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찍은 직캠 영상 2개 중 하나를 재생했다.
다른 하나는 완전히 자신 위주로 찍은 듯해서 윤치우의 상태까지 살피기는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곧 핸드폰에서 노랫소리가 나오고, 그들의 무대 영상이 재생되었다.
“뭐야, 우리 무대 보는 거임?”
옆에서 꿍얼대던 태현우가 호기심을 느꼈는지, 그의 옆에 찰싹 붙어서 핸드폰에 시선을 두었다.
떼어 놓을까 고민하던 에르제는 딱히 별문제가 없겠다 싶어서 그냥 영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춤은 문제없고.’
그렇다고 노래도 딱히 문제될 부분이 없었다.
딱 하나.
‘매혹의 힘이 아예 섞여 있지 않아.’
오늘 1등을 하기 위해서 매혹의 힘을 약하게 섞으려고 했는데.
현재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자신은 그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태현우의 말대로 ‘문제가 있다’고 볼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서은우의 영혼이 튀어나온 거라면…… 이럴 리가 없을 텐데.’
진짜로 기억을 잃은 채로 인형이 움직이는 것처럼 자신이 움직였다는 건가?
‘……이게 바로 그 미친 연습량에 의해 움직임이 몸에 각인되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것…….’
그런 게 있었다. 이전 세계에서도 격렬한 싸움에 오랫동안 몰입한 기사는 몸에 각인되어 있는 연습량으로 싸운다고.
어쩌면, 자신은 연습 천재일지도 모르겠다.
‘……인터뷰 같은 거 하면, 꼭 얘기해야지.’
이 시대 아이돌은 자기 PR이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 했으니,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하는 법이다.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기력이 다했을 테니, 매혹 능력을 섞기에는 힘이 모자랐던 건가?’
일단 어느 정도 생각의 정리는 된 듯했다.
‘하지만, 다시는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 해.’
어떠한 이유가 되었든, 의식이 날아가는 것만큼은 썩 기분 좋은 감각이 아니었으니까. 이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이제는 영상 속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윤치우의 모습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가 생명력을 나누어 준 것이 확실히 효과가 있었는지 윤치우는 기존의 무대보다 더욱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태현우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같이 영상을 보는 와중에 입을 열었다.
“치우 형 진짜 장난 아니었다니까. 전에는 연습 때보다 못 보여 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았는데, 오늘은 연습 때보다 훨씬 잘한 것 같아.”
태현우가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각성이라도 했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자신의 생명력을 나누어 받았을 뿐이다.
아마 그 때문에 몸을 굳게 만드는 긴장감이나 부담감을 떨쳐 냈던 게 아닌가 싶다.
‘……솔직히 나도 평상시 정도로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더 좋아진 거면 저 녀석도 정신력이 좋기는 하네.’
하긴 데뷔한 이후로 지속적인 악플에 시달려 왔던 윤치우다.
그것을 지금까지 버티면서 본인의 노력으로 그런 분위기를 뒤집으려 노력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정신력이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실제로 분위기도 어느 정도 바뀐 것 같고.’
에르제는 직캠 영상을 찾다가 보았던 글들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 근데 윤치우, 갑자기 실력이 늘지 않았음? ]
[ 노래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춤선은 엄청 깔끔해졌더라. ]
[ 우리 치우…… 엄청 노력한 것 같더라. 그러니까 거지 같은 글 좀 싸지르지 마. 찐 토트윈 팬이면, 특정 한 사람만 욕하고 지X 좀 하지 말라고. ]
확실히 윤치우를 공격하는 글의 숫자가 줄었고, 방어해 주는 팬들의 숫자도 늘어난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뭐 인간들은, 그런 게 오래가는 편은 아니지만.’
당연히 앞으로도 지속적인 비난은 있을 수 있겠지만, 오늘 일로 이겨 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으리라고 판단했다.
‘내 문제 말고 이쪽은…… 어느 정도 해결되었겠지.’
괜히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에르제는 잠들어 있는 윤치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정도면 생명력을 나누어 준 것이 그리 아깝지 않다고 여기면서.
* * *
같은 시각.
모카 엔터테인먼트의 실장 윤소희는 아직 퇴근하지 않은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만 재촉했으면 하는데요.”
[ 재촉하게 만들잖아, 그쪽에서. ]
통화 상대방인 남자는 무덤덤한 말투로 말을 이어 갔다.
[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어떻게 할지는 본인이 더 잘 알 텐데? ]
“…….”
윤소희는 이대로 핸드폰을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알……았어요.”
[ 아주 이를 갈면서 말하는군. ]
쿡쿡거리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 연구 끝나는 대로 바로 보내. 길어지면 좋은 꼴은 못 볼 거야. ]
까드득―.
윤소희의 손톱이 회색 탁자를 갈았다.
“…….”
대답을 미루던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면서 체념한 투로 말했다.
“알았으니까…….”
그녀의 눈이 천천히 벽면으로 향했다.
토트윈의 일정이 적힌 스케줄표였다.
“서은우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 지키세요.”
[ 그건 청화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
“…….”
[ 아, 참. 그리고 조만간 그쪽으로 재미있는 소식이 갈 거야.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니 잘 생각해 보라고. ]
뚝―.
상대방은 그 말을 하고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결국 윤소희 실장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푹신한 소파 위에 집어 던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