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31화
토트윈의 첫 예능은 경기도의 어느 한 세트장에서 진행되었다.
1팀이었던 윤치우, 민주혁, 태현우는 이미 촬영을 마쳤고.
그 일주일 뒤에 안단테와 에르제는 이윤과 함께 촬영장을 찾았다.
1팀이 먼저 촬영을 했기 때문에 에르제와 안단테는 그들에게 어땠었는지 물어보았으나.
그들은 녹초가 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만 했다.
― 직접 겪어 보면 돼. 아주 너무나도 재미있었어.
인상을 잔뜩 찡그린 태현우가 소파에서 늘어진 채로 한 말이었으므로 신뢰성은 거의 0에 수렴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덕분에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한 촬영이 되리라고 에르제는 예상했다.
“오오. 저기 봐여, 은우 형. 겁나 높아.”
물론 세트를 구경하는 안단테는 눈 만난 강아지처럼 마냥 신나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촬영장으로 들어가니 임 PD라는 사람이 나와서 그들을 맞아 주었다.
그는 상당히 바빠 보였는데, 그래도 출연진으로 온 그들을 홀대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어서 와요!”
서글서글한 인상의 그는 저음의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요즘 방송 잘 보고 있어요.”
“아유,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이윤이 환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안단테와 에르제도 인사를 하고는 곧 촬영장을 구경하기 위해 그 자리를 떠났다.
조금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촬영이 시작하기 전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던 것이다.
그렇게 촬영장을 대충 둘러본 에르제와 안단테는 이윽고 자리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이윤이 스태프들과 다른 출연진 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인사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주에 1팀 촬영하고 온 모습 보니까 쉽지는 않아 보이던데여.”
“그러게.”
안단테의 말에 에르제도 동의했다.
녹초가 된 모습을 보니, 아마 육체적으로 많이 굴리는 모양이었다.
“으……. 체력은 자신 없는데.”
안단테가 투덜댔으나, 에르제는 그저 피식 웃었다.
그동안 그들이 연습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하급 기사들을 여기 아이돌 하라고 데려오면 절반 이상은 떨어져 나갈 것 같은데.’
춤과 노래 그리고 그 외에도 ‘연습’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수많은 활동들은 체력이 없다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소화해 내는 스케줄도 체력을 갉아먹는 데 일조를 할 정도였고 말이다.
그래서 안단테의 불안감이 그렇게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솔직히 너 정도면, 웬만한 인간들보다 체력이 좋을걸.”
“……그, 그래여?”
평소에 칭찬을 잘하지 않는 에르제였기에 안단테는 조금 놀라워하며 대답했다.
왠지 진짜로 그런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안단테는 입술을 안으로 말며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 * *
‘쉽겠네.’
에르제는 촬영이 시작된 지 5분 만에 그런 생각을 했다.
초반부터 육체적으로 마구 굴리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촬영 초반부는 전혀 그렇지 않은 듯했으니 말이다.
촬영이 시작되고, MC가 분위기를 주도하며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번 게스트는!! 저번 주에 이어서 토트윈분들이 나오셨습니다!! 안단테, 서은우 씨! 어서 나와 주세요!”
“오오오!”
“잘생겼다!!”
고정 멤버 6인은 그들의 등장을 아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안녕하세여! 안녕하세여!!”
“반갑습니다.”
안단테와 에르제도, 그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모양으로 섰다.
게스트였기에 일렬로 선 자리의 중앙 즈음에 위치할 수 있었다.
“두 분도 이번이 첫 예능이시잖아요?”
“넵.”
“너무 긴장하지 말고, 평소의 모습대로 자연스럽게 해 주시면 됩니다.”
MC가 웃으며 말하자, 조금 긴장이 풀린 안단테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무래도 조그맣고 귀여운 이미지를 더욱 발전시키려는 모양이다.
분명 토트윈에게 필요한 이미지였기 때문에 이윤도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가벼운 인사가 끝나고, 몇 분 뒤.
그들 앞에 책상이 생기고, 그 위에는 4개의 상자가 놓였다.
MC가 손을 펼치며 말했다.
“여러분들이 어떤 히어로가 될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4개의 상자를 준비해 봤어요.”
“앗!”
저번 주에는 다른 방식으로 했는지, 고정 출연진 중 하나가 눈을 빛냈다.
“오늘은 어떻게 진행이 되나요?”
“아주 간단합니다.”
MC는 제작진이 있는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신인 아이돌 그룹 토트윈과 함께하기 때문에 노래 퀴즈를 준비해 봤어요.”
“앗, 그건가요? 전주 짧게 듣고 노래 맞히는 거?”
“네! 맞습니다~!”
그 말에 에르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번에 데뷔 앨범을 낸 이후, 회사에서는 배우라며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듣게 했는데.
이 세계의 음악도 꽤 듣는 재미가 있어서 에르제는 무언가를 할 때마다 무튜브로 플레이 리스트를 찾아 자주 듣고 있었다.
‘그러면 해 볼 만한 것 같은데?’
아예 모르는 노래가 아니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기억력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으니까.
“총 7문제를 낼 거고, 그중에서 가장 많이 맞힌 순서대로 상자를 고르도록 하겠습니다!”
MC는 곧장 첫 번째 음악을 재생했다.
― 지이이잉.
그냥 어느 곡에서든 자주 들리는 평범한 전자 기타 소리가 1.5초 정도 흘러나왔다가 멈췄다.
“에이~! 이걸 어떻게 맞춰요!”
고정 출연자들도 그렇고, 안단테도 고개를 갸웃하며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모습.
그러나 에르제는 손을 들었다.
“참고로 정답을 외치신 분은 다른 사람이 정답을 외치기 전까지 다시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네.”
MC의 말에 에르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쉬운데, 왜 다들 손을 안 들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곳에 온 이후 뱀파이어가 아닌 인간으로서 생활을 하고 있다 보니, 본인이 완전 기억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말이다.
“LAK의 데뷔곡 ‘데이 바이 데이’입니다.”
“대박.”
당연히 틀릴 거라고 생각했던 MC는 혀를 내두르며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정답!!”이라고 외쳐 주었다.
다른 이들도 ‘이걸?’이라는 눈빛으로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형……! 뭐예여? 윤이 형한테 뭐 미리 정답지라도 받았어여?”
안단테가 그렇게 물어볼 정도로 주변의 분위기도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어……. 그냥 들으니 알겠던데.”
그러나 에르제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딱 도입부가 ‘데이 바이 데이’였는데……. 기타 음정도 그렇고…… 연주 방식도 그렇고.’
MC가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면 기겁할 생각을 하면서 에르제는 그다음 문제도, 또 그다음 문제도 연속으로 정답 행진을 이어 갔다.
중간중간에 그가 모르는 노래가 나오는 바람에 정답을 알아맞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결국은 에르제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은우 씨는 이걸 대체 어떻게 맞히는 거야?”
MC는 에르제를 상자 4개의 앞으로 데리고 가면서 그렇게 물었다.
“어……. 들어 본 노래들은 다 기억하고 있어서요.”
에르제가 그렇게 말하자, MC는 농담이라고 여기고 쿡쿡 웃었다.
“그래요, 그래.”
그는 각각 이름표가 붙어 있는 상자 앞에 에르제를 두고, 다시 뒤로 살짝 빠져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자, 혼자서 다섯 문제나 맞힌 서은우 씨가 가장 먼저 상자를 고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맞히던 패기는 다 어디로 갔는지 에르제는 4개의 상자를 앞에 두고 머뭇거렸다.
각각의 상자에는 친절하게도 어떤 히어로인지 이름까지 붙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에르제는 그에 대해서 듣거나 본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뜻도 모르겠네.’
한글로 쓰여 있어서 읽을 수야 있었지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돌아가면 그 영어인지 뭔지 사전을 통째로 외워야겠어.’
어차피 가사에도 영어가 자주 등장하는 모양이니 그래야 앞으로도 좋을 듯싶었다.
그렇게 이것저것 상자를 만져 보던 에르제는 결국 ‘블랙 윈도우’라고 적혀 있는 상자를 골랐다.
“억!”
그러자 누군가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블랙 윈도우는 누가 보아도 에르제가 결코 선택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큼.”
“거, 손대면 끝입니다!”
그러나 알아서 폭탄을 제거해 주는 모습에 다른 출연진들은 헛기침을 하면서 차례대로 자신의 상자를 골라서 가져갔다.
‘뭐야.’
왠지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에르제였으나, 이미 선택의 시간은 끝이 난 뒤였다.
그렇게 각자의 상자를 들고 서 있자, MC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여러분들은 이제 옷을 갈아입고 나와 주시면 됩니다!”
그 말과 함께 에르제도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서 뒤쪽에 위치해 있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화장실 같은 곳에서 갈아입는 것은 아니었고, 따로 갈아입을 수 있게 빈방이 마련돼 있었다.
같은 멤버라고 한 방에 몰아넣는 건 아닌 모양인지, 안단테도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사이즈도 교체해 드렸으니까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스태프는 그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방을 나갔다.
탁―.
에르제는 상자를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걸 골랐어야 했나?’
안단테가 자신을 보며 지었던 오묘한 표정도 그렇고, 뭔가 선택이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다시금 머리를 내밀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에르제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검은색의 슈트와 가발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생각보다 멀쩡한 거 아닌가?
그러나 그 생각은 직접 입어 보고 난 뒤에 180도로 바뀌었다.
“…….”
슈트는 무슨, 쫄쫄이 옷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가발도 긴 갈색의 생머리 가발이었는데, 이건 영락없는 여성 히어로가 틀림없었다.
‘아, 핸드폰.’
왜 그 생각을 먼저 하지 못했지?
에르제는 벗어 두었던 옷에서 핸드폰을 찾아서 상자에 적혀 있었던 ‘블랙 윈도우’를 재빨리 검색했다.
“……아!”
그리고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했던 생각이 맞았다고.
에르제는 그녀에 관련된 이미지와 내용들을 쓱 훑다가 혹시나 싶어 다른 사람들의 것까지 같이 검색했다.
안단테가 고른 ‘아이런맨’은 자신이 살던 세계의 기갑기사 같은 느낌의 히어로였고.
‘헬크’는 초록색의 덩치 큰 괴물,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노’는 방패를 든 또 다른 쫄쫄이였다.
‘거기서 거기 같기는 한데…….’
그래도 이 중에서 고른다면 아이런맨이 제일 무난했고, 멋이 있지 않았을까.
그래도 한 명이라도 살았으면 됐지, 라고 생각한 에르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하게 된 거 열심히 해서 TV에 최대한 많이 나오기라도 해야겠다.
“준비 다 되셨으면, 아까 그 장소로 나와 주시면 됩니다!”
문밖에서 스태프가 말하자, 에르제는 당당히 방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굽이 조금 있는 신발이라서 걷는 것이 불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비틀거릴 정도는 아니라서 걸음을 빨리하는 것도 가능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자신보다 먼저 갈아입었는지 다른 3명의 사람들도 히어로 복장을 하고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좋아.’
에르제는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며, 걷던 것을 뜀박질로 바꾸었다.
타다다닥―!
“어?”
“은우 씨!”
곧 그를 발견한 이들이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에르제는 꼿꼿하게 앞만 바라보고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는 거의 도착할 때쯤 휙!! 하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꽤 높이 뛰어오른 에르제는 몸을 최대한 낮추며 착지했다.
그리고 한쪽 손은 날개처럼 뻗고, 나머지는 바닥을 짚었다.
“……어!”
그 모습을 알아본 이들이 아는 척을 하기도 전에.
에르제가 먼저 스윽, 하고 고개를 들어 올리며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히어로 랜딩.”
“…….”
“……!!”
제작진 쪽에서 박수가 아낌없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