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28화
에르제는 중얼거리듯이 이윤의 말을 곱씹었다.
“스폰?”
스폰이 뭔지 에르제도 알고 있었다.
인간들은 던전에서 자연적으로 마물이 생성되는 현상을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건 이곳에도 던전이 있다는 뜻인가?’
하지만 곧바로 그렇게 추측하기에는 누군가에게 ‘스폰을 제안 받았냐.’라는 말이 어색해진다.
‘아니면…… 이곳은 인위적으로 마물을 스폰 할 수 있다는 뜻인가.’
제안이라면, 그렇게 해 주길 바라면서 건네는 이야기라는 뜻일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에르제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이 세계에 던전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지금 처음 알았으니까.
“아뇨. 그런 제안을 받은 적은 없었는데.”
“정말? 거짓말 안 하고?”
“진짠데…….”
에르제는 말끝을 흐리며 숙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으로 빨리 들어가고 싶어서였다.
화장실이 1개밖에 없어서 늦게 숙소로 들어갈수록 씻는 순서가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럼.”
대답을 마친 에르제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하던 그때.
“잠깐만.”
그런 그의 마음을 짐작조차 못하는 이윤이 문 앞을 가로막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여기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기억을 잃은 네가 스폰을 알고 있다는 게 더 이상해.”
그의 말에 에르제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썩 괜찮은 추론이지 않은가.
이 정도면 개미 더듬이에서 사마귀 정도로 승격시켜 줄 수 있을 정도의 예리함이었다.
에르제는 마음속으로 이윤의 평가를 한 단계 격상시켜 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윤이 말하는 스폰이 뭔데요?”
아무래도 자신의 세계와, 이곳 세계의 스폰의 뜻이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이렇게 심각한 표정인 걸 보면 던전과 관련된 게 맞는 거 같기는 하지만.’
그러나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고 하지 않던가.
이윤은 ‘네가 대답해 봐.’라고 말을 하려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짧게 설명했다.
“너에게 원하는 것을 받고 ‘인지도’를 지불하는 거지.”
인지도?
마물의 숫자를 늘리면, 악명이 높아진다는 뜻인가?
에르제는 생각하다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물었다.
“원하는 건 뭘 받아 가는 건데요?”
“어……. 음……. 뭐 다 다르기는 한데…… 보통은…….”
이윤은 난처한 기색을 하며 말을 길게 늘어뜨렸다.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건가 싶어서 고민하고 있자, 이윤이 조그만 목소리로 말을 끝마쳤다.
“정……력?”
“정력? 그 정력?”
에르제가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자, 이윤이 주위를 살피며 그의 입을 막았다.
손바닥에서 담배 냄새가 나는 바람에 그대로 깨물어 버릴 뻔했으나, 에르제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 냈다.
오히려 말을 꺼낸 이윤이 초조해하고, 에르제가 침착한 기묘한 대치가 이어졌다.
‘정력이라.’
그리고 에르제는 그 와중에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보통 정력 혹은 정기를 대가로 바라는 이들은 딱 한 부류밖에 없었다.
‘서큐버스.’
서큐버스는 뱀파이어의 하위종으로, 그들을 섬기는 종족 중 하나였다.
그들은 피 대신 정기로 생명을 유지하고, 그것을 위해 인간의 꿈에 침투하는 걸 즐기는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던전의 마물 스폰을 가속화하기 위해 녀석들이 정기를 필요로 하는 거고…….’
그러고 인지도를 대가로 준다?
마물의 숫자를 늘려서 그들에게 좋은 일이 뭐가 있다고?
어쨌든 이 사안은 이렇게 가만히 서서 처리할 일이 아니었다.
‘직접 만나 보는 게 낫겠는데.’
아무리 세계가 달라졌다고 해도, 종족간의 지위가 달라지지는 않았을 테니. 서큐버스와 만난다고 하여도 딱히 해를 입을 일은 없을 터.
‘……이윤한테는 말하지 못하겠고.’
그러나 이윤한테 대놓고 그들을 만나겠다고 했다가는 사달이 날 것 같아서 에르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제안을 받은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 지 정확히 5분가량 지난 시점이었다.
에르제의 말에 이윤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뭘요?”
“명함 받은 것 줘 봐. 너, 잠깐 나간다고 하면서 어떤 아주머니를 만났잖아.”
“명함? 아…….”
에르제는 팬 사인회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세리나한테 받았던 그 종이 쪼가리를 가리키는 듯했다.
에르제는 명함을 꺼내기 위해 품으로 손을 가져가다가 멈칫했다.
‘……잠깐, 뒤를 밟은 건가?’
누굴 만났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까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확실했다.
그녀와 자신이 나눈 대화를 들었을까?
‘만약…… 여차하면.’
에르제는 숙소 쪽을 살핀 뒤에, 언제든 피를 뽑아낼 수 있도록 준비했다.
스폰 같은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낸 걸로 보아, 아닐 가능성이 크기는 했지만.
세리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을 수도 있었기에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에르제는 스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윤……. 내 뒤를 밟았어요?”
“……큼, 불안해서 그랬지.”
“그럼, 혹시 대화 내용을 들었나요?”
“어?”
이윤은 턱을 당기며 되물었다가 이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인마, 내가 그걸 들었으면 이러고 있겠냐? 그 저기 뭐야, 아주머니의 명함만 받아 오니까 의심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일단 내놔 봐. 이런 식으로 자꾸 숨기면 더 이상하게 보이는 거 알지?”
“흠.”
에르제는 감정의 동요를 읽어 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능력은 없었지만, 딱히 이윤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굳이 정신을 건드릴 필요는 없겠지.’
“여기 있어요.”
에르제는 품에 넣어 두었던 명함을 꺼내 이윤에게 내밀었다.
이윤은 잡아채듯이 가져간 뒤, 명함을 꼼꼼하게 살폈다.
“……결혼 중매 업체?”
심지어 이름을 들어 본 기억이 있을 정도로 이쪽 방면에서는 유명한 회사였다.
“웨딩 매처(Wedding Matcher)에서 너한테 왜 접근한 거지? 사인회에서 보고, 따로 만나서 둘이 이야기할 정도면 뭐가 있긴 있다는 거잖아.”
이제 막 데뷔한 아이돌 멤버를 뜬금없이 결혼 상대자 중 하나로 넣을 것도 아니고.
이윤은 오히려 명함을 보고 나니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에르제는 서은우의 과거를 이용한 적절한 변명을 이미 생각해 둔 상태였다.
“친척이라고 하더라고요.”
“……친척? 진짜로?”
이윤이 놀라서 대답했다.
“네…….”
에르제는 표정 연기를 곁들였다.
“그…… TV에서 얼굴 보고 알았다고…….”
“아니, 그러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아이 참, 내가 인사라도 드렸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그분도 그냥 반가워서 온 거라고 하셔서.”
“……그렇구나.”
이윤은 괜히 숙연해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단테가 들었다는 반말도 가족이라서 그런 건가.’
말로는 서은우의 부모님을 찾아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따로 찾아보고 있음에도 진척이 아예 없었던 상황인지라 왠지 모를 죄책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 은우야.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오해해서 미안하고.”
“괜찮아요.”
이윤은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는 에르제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겼다.
“언제 한번 회사로 오시라고 해. 그리고 이제 얼른 들어가서 씻어라.”
“네.”
덕분에 세리나가 회사에 출입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그럼, 들어가 볼게요.”
“……그, 그래.”
에르제는 그 말을 남기고 숙소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이윤은 한숨을 푹 쉬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달으며 혀를 내둘렀다.
“근데, 이번 팬싸컷 60장이라던데……. 그걸 용케 뚫으셨네.”
* * *
에르제가 이윤과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던 시각.
집으로 돌아가던 팬들의 팬 사인회 후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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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토트윈 팬 사인회 갔다 왔거든?
참고로 내 최애는 현우라서 현우 보러 가기는 했는데……. 와, 서은우는 진짜 실물 쩔기는 쩔더라. 순간 얼굴만 보고 최애 2명 될 뻔;;
아무튼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니고. ㅋㅋㅋ
서은우가 제일 마지막에 있었는데, 얘기하다 보니 정신이 혼미해지더라.
뭐랄까, 내 신상을 탈탈 털리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이걸 왜 이야기하고 있지, 하는 기분?
― 나도 요즘 고민하던 문제를 서은우한테 상담하고 옴;;
― 무슨,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이었다고……. ㅋㅋㅋㅋ 그 와중에 박쥐 인형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졸귀였다. ㅋㅋ
― 근데 솔직히 치안 좋으냐는 말은 왜 물어본 건지 모르겠음;;
┖ 나도 그거 물어보던데, 너도?
┖ 너두? 나두!
― 어느 순간 내가 ‘아, 그렇구나…….’ 하고 있었음.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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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토트윈 애들 너무 사랑스러웠다. ㅠㅠ
한 마디, 한 마디 다 정성스럽게 대답해 주고 사인도 완전 애정 듬뿍이었음.
팬들 팬싸 가서 입덕 한 거 후회하는 경우도 많은데, 나는 진짜 후회 1도 안 하고 오히려 행복 만땅으로 채워 옴. ㅠ
민주혁은 도도하게 대답도 잘 안 해 줄 것 같더니, 시선 피하면서 은근슬쩍 깍지 껴 주는데 ㄹㅇ 심멎 당했다.
내일까지 대댓글 없으면 나 행복사한 걸로 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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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팬 사인회에 온 만큼, 진짜 팬들이 대부분이라 후기 자체는 평이 좋았다.
그러나 악성 계정들이 물을 흐리는 것은 아직 여전한 모양이었다.
― 사인회 끝나고 토트윈 무대 했다면서? 추첨이 뭐냐, 추첨이; 선물 준 사람들에게만 기회 주는 거랑 뭐가 다름? 심지어 선물 줬는데도 또 뽑기. ㅠㅠ
― 진짜. ㅋㅋㅋ 이 정도면 대놓고 선물 내놔라, 하는 수준 아니냐.
그룹 전체를 향한 악플도 있었으나, 개개인을 향한 것들도 그 수위가 결코 낮지 않았다.
― 직캠 봤는데 명패 준 팬 울겠더라……. 그거 때문에 군무 다 망가지고, 서은우는 그걸 또 웃긴 춤으로 승화해서 추고 있고. ㅠㅠ
┖ 솔직히 나였으면, 마음 상해서 바로 탈덕 했다. ㅠ
┖ 네, 그럼 조용히 탈덕 하고 꺼져 주세요. 제발;; 물 흐리지 마시고요.
┖ 토트윈이나 그 팬덤이나 개울물 수준이니까 흐려지는 거지. ㅋㅋㅋㅋ
― 장머 진짜 일 못한다; 팬싸컷 60장? 이제 막 데뷔한 아이돌이? 이 정도면 사재기 의혹 붙기 딱 좋을 듯?
┖ 팬싸컷 60장 이야기에 장머 소환하는 건 뭐냐, 도대체;
┖ 내버려 둬. ㅋㅋ 딱 봐도 배 아픈 타돌팬임. 먹이 주지 마셈.
토트윈의 팬들이 열심히 악계를 차단하고, 처단을 반복했지만.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악의적인 댓글들은 그들을 정신적으로 지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유일하게 커버를 쳐 주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 근데 서은우, 팬싸 후기 왜 저럼? (링크)
에르제가 개인 계정에 남긴, 멋들어진 팬 사인회 후기 글이었다.
하지만 팬들의 댓글은 순한 맛이 아니었다.
― 완전히 달빛좌로 자리 잡겠다 이 말이야~.
┖ ㅋㅋㅋ 님 배사로 저거 박아 두셈.
┖ ㅗ
― 매형 복장 터지는 소리 여기까지 들린다.
┖ ㅋㅋㅋㅋ 우리 은우 노빠꾸라구욧.
┖ 서은우 SNS 막아야 하는 거 아니냐……. 좀 걱정됨.
― 근데 왜 예명이 서은우냐?
┖ ㅁㄹ
저번 음악 방송에서 불거졌던 중2병 논란이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 미안해, 은우야……. 나 민수……. 이것만큼은 못 하겠어.
라는 댓글이 최대 공감수를 기록했는데, 조금 전 안단테가 발견한 것도 그 댓글이었다.
“어휴.”
안단테는 에르제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자신이 개인 계정에 올린 글에 팬들이 단 댓글이 궁금하다고 하던데.
분명 지금도 핸드폰으로 그것을 보고 있을 터.
‘그러니까 이런 오글거리는 글은 왜 써 가지고…….’
안단테는 조심스럽게 에르제에게 물었다.
“은우 형, 댓글 봤어?”
“보고 있는데, 왜?”
“……괜찮아?”
“아니.”
에르제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럼 그렇지. 안단테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르제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평범하게 글을 쓰…….”
그러나 안단테는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입을 쩍 하고 벌릴 수밖에 없었다.
띠링―.
정말 뜬금없이…… 어떠한 예고도 없이 에르제가 라이브 방송을 켜 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