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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27화 (27/307)

제27화

27화

이윤이 에르제에게 스폰 받은 거냐고 직접적으로 물어보기도 전에 곧바로 무대에 오를 시간이 되었다.

한 곡 전체를 무대로 꾸미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짧게 무대를 보여 주는 것에 불과했지만.

팬들은 자리를 비우지 않고 무대 앞에 비치되어 있던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5분가량 기다리고 있자, 곧 토트윈이 무대 위로 미소를 지으며 올라왔다.

가장 먼저 윤치우가 마이크를 잡고 운을 뗐다.

“우선 토트윈의 첫 팬 사인회에 와 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마이크를 들지 않은 나머지 멤버들은 육성으로 우렁차게 소리치며 팬들에게 인사했다.

“팬싸 자주 열어 줘어!”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멤버들의 이름을 외치며 대답하자, 윤치우는 눈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저희가 무대 위로 올라온 이유는 다들 아시죠?”

“알아요!!”

보통 팬 사인회는 팬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 주거나 그대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모카 엔터테인먼트에서는 팬 사인회 끝에 작은 무대 하나를 준비해 두었다.

아무래도 첫 팬 사인회라 힘을 주고 싶었던 모양.

그 때문에 1분가량의 짧은 무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사인을 받은 팬들도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윤치우는 팬들의 기대감 어린 시선을 받으며, 손으로 민주혁을 가리켰다.

“원래는 무대를 보여 드리는 것으로 끝이었는데, 주혁이가 아이디어를 하나 내주었어요.”

윤치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인회를 할 때보다 더 커다란 테이블 하나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곳에는 오늘 팬들이 선물해 준 아이템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뭐야?’

‘엇, 저기 내 것도 있다!’

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눈에 궁금증을 가득 담은 채로 토트윈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옆에 보시면, 추첨 통이 있습니다. 추첨으로 뽑힌 선물을 각자 착용하고 무대를 보여 드리려고 해요!”

그 말에 팬들의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어느 정도 웅성거림이 잦아들자, 윤치우는 추첨 통 앞으로 가서 섰다.

“제가 대표로 멤버들 거를 하나씩 뽑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팬들이 준 선물을 착용하고 무대를 보여 준다는 말에 은근한 기대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

“…….”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곧 윤치우의 손에 동그란 공 하나가 잡혔다.

번호는 27이었다.

“주혁 씨, 27번이면 어떤 거죠?”

무대의 앞쪽에 서 있던 윤치우가 뒤를 돌아보며 민주혁에게 묻자, 그가 조심스럽게 번호가 붙은 선물을 들어 올렸다.

머리에 쓸 수 있는 고양이 모자였다.

평상시에 도도하고 시크한 표정을 자주 짓는 민주혁과 아주 잘 어울리는 동물이었다.

“자, 선물이 결정된 멤버는 무대 앞으로 나와 주세요.”

윤치우의 말에 민주혁은 모자를 든 채 무대 앞으로 나와 섰다.

팬들에게 포토 타임을 주기 위해서였다.

민주혁은 고양이 모자를 그대로 머리에 쓰고, 귀 양옆으로 내려온 것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귀가 쫑긋쫑긋했다.

‘귀여워……!!’

팬들은 행복한 얼굴로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차례대로 멤버들의 선물이 윤치우의 손에서 결정이 되었다.

안단테는 비눗방울을 만들 수 있는 장난감이 뽑혔고.

태현우는 양손으로 들고 있기에도 무거울 정도로 큰 피로회복제가 당첨되었다.

“무거워요……. 여러분……! 빨리……!”

덕분에 태현우의 포토 타임 때는 팬들 사이에서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윤치우는 젤리 간식이 뽑혀서 포즈를 잡을 때 ‘엄청 티 나는 PPL’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지막은 에르제였는데, 그가 걸린 것은 커다란 명패였다.

[ 뱀파이어 서은우 ]

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박혀 있는 명패.

심지어 크기도 커서, 양손을 좌우로 펼친 길이랑 비슷해 보일 정도였다.

“푸하하하!!”

“뱀파이어 서은우!! 내 피 가져가!!”

“저 RH+ O형이에요! 수혈 완전 가능!!”

팬들은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며 격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에르제의 머릿속은 엄청나게 복잡해졌다.

‘이걸 들고 무대를 어떻게 하지.’

차라리 화분 같은 것은 손동작을 빼고 춤을 추면 될 테지만.

명패는 길이가 길어서 분명 군무를 추다가 다른 멤버들을 후려칠 것만 같았다.

‘그것도 꽤 재미있는 그림이긴 한데.’

팬들은 피를 준다고 소리쳤지만, 이러다가는 멤버들 몸에서 피가 나게 생겼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네.’

결국 에르제는 명패를 세로로 세워 들었다.

춤을 추는 모습이 국자로 솥을 젓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겠지만, 뭐…… 멤버들이 다치는 것보다야 낫겠지.

에르제가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 무대 공연이 시작되었다.

― HaLLo.

멤버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선물을 들고 무대를 펼치기 시작했다.

안단테가 부는 비눗방울이 무대 위를 수놓았고, 윤치우와 태현우는 춤 도중에 서로에게 각자의 선물을 먹여 주기도 했다.

‘이건…… 귀하다……!’

당연하게도 팬들은 무대를 즐기며 그 모습을 눈과 사진에 소중하게 담았다.

팬과 가수 모두에게 뜻 깊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날.

무대 위 최고의 퍼포먼스는 에르제의 국자 젓기 댄스였다.

* * *

무사히 첫 팬 사인회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멤버들이 모두 타고 있는 차 안은 요란스러웠다.

“큽, 푸하하하!!”

태현우가 에르제를 보며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무대가 끝나고 난 뒤부터 지금까지 14번째 터뜨리는 웃음이었다.

“아니, 거기서 어떻게 명패가 나오냐고.”

태현우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아픈 배를 부여잡았다.

“아……. 진짜 너무 웃겨서 배 아파.”

“…….”

에르제는 그를 흘겨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폭소를 하니, 나쁜 의도가 없다고 해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광대가 된 것 같아.’

“현우, 뒤 보는 거 금지.”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윤치우가 양손으로 태현우의 얼굴을 잡고 앞으로 돌려 버렸다.

“아, 왜에!”

“너 은우 보면 또 웃을 거잖아. 질리지도 않아?”

윤치우가 여전히 태현우의 얼굴을 잡고 있는 채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도 무대에서 피로회복제 드링킹 쇼 했잖아.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고.”

“아, 맞아. 그거 맛있더라.”

진정이 되었는지, 태현우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가 생각이 났는지 “아!” 하고 말을 꺼냈다.

“우리 첫 팬 사인회 소감, 개인 계정으로 남기는 거 어때?”

“오, 좋아여!!”

“괜찮네.”

안단테와 민주혁이 동의하자, 윤치우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조했다.

“좋은데? 그러면 단체 사진 찍어서 그 사진으로 통일해서 올리자. 내용은 알아서 작성하고.”

“오키!!”

그렇게 난데없이 차 가운데로 멤버들이 모여 앉았다.

벌써 어둑어둑해진 시간대였기에 사진을 찍는 윤치우의 핸드폰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치이이즈 하세요~~!”

라는 멘트와 함께 단체 사진을 찍었다.

“응?”

찍은 사진을 살피던 윤치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뒤로 돌아보았다.

“은우야, 아직도 렌즈 끼고 있어?”

“?”

에르제가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쳐다보자, 윤치우가 사진을 내밀었다.

플래시가 터지는 바람에 다른 멤버들의 눈도 일반적인 색은 아니었지만, 에르제의 눈만 특이하게 빨간색으로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에르제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눈가에 가져갔다.

윤치우가 물어본 것과는 다르게, 자신은 렌즈를 끼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오늘 렌즈를 낀 적도 없었고 말이다.

‘순간 혈기가 발현이 되었나…….’

그러나 안타깝게도 에르제 본인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따로 힘을 쓴 적도, 그럴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하네…….”

윤치우가 그렇게 말하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에르제는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했다.

“요즘 잠을 잘 못 자서 충혈됐나 봐.”

“……지금은 멀쩡한데?”

“어두워서 그런 거 아닐까?”

최근에 스케줄이 워낙 바빴기에 에르제의 변명은 그럭저럭 통했다.

귀찮아진 태현우가 의자에 벌러덩 몸을 기대며 말했다.

“뭐면 어때~. 오히려 눈 빨갛게 나와서 더 뱀파이어 같고 좋네.”

그 말에 윤치우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지만, 이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냥 이 사진으로 하자.”

그가 단톡방에 사진을 공유하자, 각자 사진을 다운받은 멤버들은 SNS에 접속했다.

전에 태현우에게 SNS를 어떻게 하는지 배운 에르제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현우는 그에게 ‘감동적인 말’을 해 주면, 팬들이 좋아한다고도 알려 주었다.

잠시 무엇을 쓸지 고민하던 에르제는 과거에 마주쳤던 한 영애를 떠올리며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밝은 달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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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트윈의 첫 팬 사인회 후기

( 단체 사진 )

여러분, 안녕하세요. 본명 에르제, 예명 서은우입니다.

팬 사인회에 와 주신 분들과, 오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함께했을 분들께 모두 감사를 드립니다.

( 보름달 사진 )

오늘은 달빛이 참 밝습니다.

사인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러분의 길이 어둡지 않을 것 같아서 한결 마음이 놓여요.

숙소로 돌아가는 길, 보름달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 달빛을 병에 담아 보관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깜깜한 날에 병을 열어서 비춰 주고 싶다고.

그럴 수 있다면 분명,

여러분의 마음속은 슬픔보다는 행복만 남을 거라고.

모두의 밤에 포근한 달빛이 깃들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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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글뱅이가 뱅글뱅글 돌아가고, 곧 개인 SNS 계정에 에르제의 글이 올라갔다.

‘음.’

아주 만족스럽군.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자, 벌써 작성을 마치고 눈을 감은 멤버들과 아직도 SNS와 씨름하고 있는 멤버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올렸나 볼까?’

문득 궁금해져서 핸드폰을 다시 켜던 찰나, 아까부터 계속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윤이 차를 세웠다.

“도착했어.”

“으으으, 온몸이 뻐근해여.”

“빨리 침대로 직행해야지.”

황급히 차문을 열고 내리는 안단테와 태현우를 향해, 윤치우가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씻고 자.”

“네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숙소로 들어가는 둘을 따라, 나머지 인원도 차에서 내려 입구로 향했다.

윤치우와 민주혁도 건물 안으로 사라지고 난 뒤, 발걸음을 옮기는 에르제를 향해 누군가가 뒤에서 불렀다.

“은우야.”

이윤이었다.

표정을 보니 진지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

고개를 갸웃하며 쳐다보자, 이윤이 입구의 문을 닫으며 에르제의 앞에 섰다.

“나는 네 매니저야, 알지?”

이윤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러니까, 꼭! 솔직하게 대답해 줘.”

“저는 거짓말을 일삼지 않아요.”

“……그래.”

산발이 된 머리로 이윤은 독한 수사관의 눈빛을 띠었다.

“너 혹시 스폰 제안을 받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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