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26화 (26/307)
  • 제26화

    26화

    토트윈의 첫 팬 사인회를 찾은 인원이 워낙 많았기에 주변은 웅성거리는 소음으로 가득했다.

    그 덕분에, 에르제의 말은 바로 옆의 안단테와 그의 앞에 서 있던 팬밖에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정상적인 상황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겁한 안단테가 에르제의 팔을 잡아끌었다.

    “미쳤어여!?”

    자신이 소리를 질러 놓고, 너무 크게 말했나 싶어 황급히 목소리를 죽이는 모습.

    “갑자기 반말을 하면 어떡해여……!!”

    안단테는 에르제의 팔을 꾹 잡은 채로 팬과 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심지어 반말의 대상이 어린 팬도 아니었다.

    에르제의 눈앞에 있는 것은 집에 어린 팬이 아들로 있을 정도의 중년 아주머니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오히려 살기등등한 눈으로 안단테를 노려보았다.

    “지금 이분께 미쳤냐고 했나요?”

    서슬 퍼런 목소리에 안단테는 당황했다.

    “네, 네……?”

    안단테가 멈칫하며 눈치를 살피자, 에르제는 그런 그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해.”

    “예.”

    그녀는 곧바로 공손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어이없게 안단테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나.’

    에르제는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일족 중 누군가가 이곳을 찾아오지 않을까 했는데.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자, 상황이 예기치 못하게 변했다.

    에르제는 손톱으로 손가락을 꾹 눌러 주변에 인식 장애 술법을 걸었다.

    윤치우의 자리는 두 번째라 이쪽에서는 먼 축에 속했으니, 술법을 꿰뚫는다고 해도 이곳까지 신경 쓰기는 어려울 터.

    안단테는…… 일단 모르겠다. 지금까지의 모습은 어쩔 수 없었다고 치고, 앞으로는 인식 장애 술법에 의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하는 수밖에.

    그나마 다음 팬이 도착한 바람에 안단테의 신경이 분산된 덕도 있었다.

    ‘이젠 팬하고 이야기하느라 정신없겠지.’

    이러면 됐겠지, 하고 에르제가 피를 닦아 내자.

    “아…….”

    그녀는 그 모습에 탄성을 터뜨리며 목소리를 잘게 떨었다. 감격에 겨운 모습이었다.

    “로드는 아직 힘이 남아 있으신 거군요.”

    에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는 의아하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는 모습이 변했구나, 세리나. 마치…… 인간처럼……?”

    “……예. 어쩌다 보니.”

    세리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눈물을 글썽거렸다.

    “일단 살아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정말로.”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에르제는 책상 위에 놓인 세리나의 손을 덮었다.

    “내 선택이었다. 그리고 둘 다 살아 있으니 된 거고.”

    “……예.”

    힘없이 웃는 세리나의 모습에 에르제는 그녀의 손등을 몇 번 다독여 주었다.

    “다른 녀석들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에르제가 흠,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몇 가지 질문을 더 하려던 참이었다.

    “빨리빨리 이동해 주세요!”

    근처에서 팬 사인회를 도와주는 스태프가 이쪽에서 시간을 너무 끌자 다가오며 소리쳤다.

    아마 그에게는 에르제가 어떤 아주머니 팬과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터.

    에르제는 앨범 위에 빠르게 사인을 해 주고는 어서 가 보라고 손짓했다.

    “지금은 사정이 여의치 않네.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네, 로드.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쪽? 오늘 일정 끝날 때까지?”

    “예.”

    당연하다는 대답에 에르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을 거야. 그때 보자.”

    “아……!”

    세리나는 그렇구나, 하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스태프가 결국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앨범을 챙겼다.

    그러다가 앨범을 다시 살펴보곤 피식 웃었다.

    “그런데…… 글씨 정말 못 쓰시네요, 로드.”

    그녀는 에르제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저 꼬맹이가.’

    에르제는 세리나를 노려보며 입술을 씹었지만.

    “선물이에요!!”

    다음 차례로 온 일반 팬이 선물까지 내밀고 있었기에 황급히 표정을 바꿨다.

    “아, 감사합……?”

    에르제는 팬에게서 받은 새하얀 권총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총기 금지라더니 선물로는 주고받을 수 있는 건가?’

    어리둥절해 있던 에르제는 이내 자신의 본분을 떠올리고는 그 팬을 바라보며 물었다.

    “유용하게 사용하겠습니다. 음, 걱정거리는 무엇인가요?”

    “어……. 걱정거리요……. 네…… 음…….”

    아이돌이 질문하고, 팬이 대답을 고민하는 광경이 또다시 펼쳐졌다.

    세리나를 만난 이후, 조금 전에 안단테가 했던 말은 죄다 기억 바깥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 * *

    팬 사인회에 찾아온 팬들은 총 120명.

    에르제는 그들 모두와 이야기를 나누고 사인을 해 준 뒤에 15분가량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곧 팬 사인회에 와 준 팬들을 위해 ‘HaLLo’ 무대를 보여 주어야 했기에 쉬는 시간이 그렇게 긴 편은 아니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현우야! 같이 다녀와라!”

    에르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이윤이 황급히 태현우를 붙여 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에르제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혼자 다녀오고 싶어요.”

    “……왜? 무슨 일 있어?”

    이윤은 ‘얘가 왜 이래?’ 하는 눈빛에 걱정을 한 스푼 담아서 물었다.

    그에 비해 에르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누구 만나기로 했거든요.”

    “누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그러나 막상 둘러댈 말이 없었다. 일족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비밀이에요.”

    결국 에르제는 그렇게 말하고 어깨를 으쓱하고는 곧장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에 태현우만 엉거주춤 일어났다가 다시 앉아 버렸다.

    “무슨 사고 치는 건 아니겠지…….”

    “은우가 저번에도 그랬는데, 설마 이번에도 그럴까요?”

    윤치우의 말에 이윤은 그런가 싶었다가.

    “근데 은우 형, 아까 아주머니한테 막 반말하고 그러던데여? 식겁했잖아여.”

    이어진 안단테의 말에 이윤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따라가 봐야지.”

    * * *

    사인회 현장의 옆 복도에 의자가 줄줄이 늘어서 있었고, 세리나는 그곳에 앉아 있었다.

    아까 그녀가 기다리겠다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바로 그곳이었다.

    세리나는 양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

    잠시 회상에 젖으려던 에르제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 그녀의 옆에 앉았다.

    “오셨군요.”

    세리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았기에 에르제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어째서 정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지?”

    “아아.”

    세리나는 에르제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 허공을 응시했다.

    “저는 현재 평범한 인간 여성입니다. 정기나 혈기가 있을 리가 없지요.”

    그리고 느릿하게 입술을 떼며 말을 이어 갔다.

    “……로드께서 해 주신 술법은 원래 차원을 이동시키는 술법이었지요.”

    “맞아.”

    “그런데 눈을 떠 보니 저는 이곳 세상의 인간 아기더군요.”

    “……인간 아기?”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원래 술법의 결과로 나타났어야 하는 것은 그들 본체 그대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말을 들어 보면, 마치 영혼만 옮겨간 것 같은 모양새였다.

    게다가 이어진 세리나의 말은 그 예상조차 벗어나는 이야기였다.

    “영혼만 옮겨 온 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으로 새로 태어난 거였더군요.”

    “뭐……?”

    “저 말고도 다른 일족들도 분명 그렇게 이곳에 오게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혈기도 없어진 마당에, 다른 일족을 찾는 일이 쉽지도 않았고……. 아무래도 저도 이 세계에 적응해서 살아야 했으니 더욱 어려웠죠.”

    “…….”

    “로드도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뱀파이어라는 개념이 이 세계에는 존재하더군요.”

    “……나도 확인했어.”

    “역시, 로드는 영민하시니 알고 계셨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에르제는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곧바로 알아챘다.

    “그러니까 우리보다 먼저 이 차원에 온 일족이 있었고……. 그들이 뱀파이어의 개념을 정착시켰다?”

    세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르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그건 맹점이 있어.”

    “그들도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뱀파이어일 수가 없다는 말씀이시죠?”

    “응.”

    하지만 세리나는 그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방법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로드.”

    “……카니발……?”

    에르제는 그 말을 꺼냈다가, “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대량의 피를 갈취하는 것을 통해 강제로 뱀파이어로 변하게 하는 방법.

    카니발은 지금까지의 추리에 힘을 실어 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뱀파리스들이나 할 짓을…….”

    “……아마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을 겁니다. 자신들이 이렇게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는 로드가 살아 있기 때문일 거라고. 그리고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TV에서 로드의 그 말이 나오기 전까지 확신은 못 했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이지러진 달빛이 그대의 마음에 깃들기를.”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에르제가 ‘백스테이지가 궁금해!’에서 일족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한 덕분에 알아챘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지금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저뿐일지도 모릅니다. 아직 이곳에 오지 못한 일족들이 있을 수도 있고요.”

    “…….”

    세리나는 가만히 에르제의 양손을 잡았다.

    “그래서, 저는 로드의 현명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저희를 찾기 위해서…… 아이돌이 되신 결정 말입니다.”

    “그건…….”

    아니다. 그냥 반강제적인 상황이었다. 애초에 아이돌이 뭔지도 몰랐고.

    “음…….”

    하지만 희망적인 세리나의 추측을 깨 버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에르제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지. 그래서 아이돌을 한 거지.”

    “역시……!”

    세리나는 살짝 눈물을 보였다가, 이내 손등으로 닦아 냈다.

    “천년만년 아이돌로 남아서 TV에 계속 얼굴을 비쳐 주십시오. 저도 계속 팬으로 남아 있겠습니다.”

    “……뭐?”

    “일족들이 어느 시간대에 올지 모르니 등대처럼 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다시 한번 탄복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이 세계에 있는 나라들을 줄줄이 읊으며 그곳까지 영향력을 더욱 넓혀야 한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에르제는 식은땀을 흘렸다.

    어쩌면 제2의 이윤은 윤치우가 아니라, 세리나가 아닐까?

    그러나 이 이상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1분도 안 남았네.’

    에르제는 빠르게 세리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펼치게끔 한 뒤에 그 위로 자신의 핏방울 하나를 떨어뜨렸다.

    놀랍게도, 손바닥에 부딪혀 넓게 퍼졌어야 할 핏방울은 허공에 멈춘 채 떠 있었다.

    “……로드…….”

    세리나는 가만히 주먹을 쥐어 그 안에 핏방울을 담아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

    “……예.”

    “선택권을 주는 거야.”

    에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남겼다.

    “인간으로 남아 있을지, 아니면 뱀파이어로 다시 돌아올지.”

    그녀가 40년 넘게 이곳에서 생활하며 쌓아 왔던, 인간으로서의 삶도 존중해야 했다.

    그게 자신이 로드로서 뱀파이어 종족을 이끌었던 방식이었다.

    모든 구성원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지는 않겠다는 신념.

    그리고 세리나는 변하지 않은 로드의 모습에 눈물 섞인 웃음을 지었다.

    “저는 평생 로드의 홈마가 되겠습니다.”

    “그게 뭔……. 아니, 그렇게 하도록 해.”

    그게 뭐냐고 물으려던 에르제는 이내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평생’이라는 단어에서 그녀가 뱀파이어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빠르게 품에서 명함을 꺼내 에르제에게 내밀었다.

    “제가 뱀파이어가 되기 전까지는 저에게 연락할 수단이 필요하실 겁니다. 이쪽으로 연락을 주시면 됩니다, 로드.”

    “음.”

    명함에는 ‘이주현’이라는 이름과 그녀가 다니는 직장, 그리고 핸드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알았다.”

    빠르게 훑은 에르제는 이내 무대 공연을 위해서 걸음을 옮겼다.

    * * *

    “…….”

    에르제가 대기실 쪽으로 사라진 뒤.

    복도 중간에 위치한 기둥 뒤에서 이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 남자가 착잡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거리도 아니었고, 기둥 뒤에 숨어 있는 바람에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여자가 명함을 건네고, 서은우가 그것을 받아 가는 모습을 말이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 어, 뭔데? 나 지금 바빠. 애들 예능 일정과 관련해서 처리할 거 많으니까 빨랑 얘기해. ]

    “은우가, 아무래도…… 스폰 제안을 받은 것 같은데요.”

    [ 어, 그래. 알았……. 뭐? 뭐어어? ]

    이윤은 푸르죽죽하게 변한 표정으로, 에르제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