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21화
첫 음악 방송을 하는 날이다.
그리고 이곳에 오기 전까지, 에르제는 며칠 동안 윤치우와 이윤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은데요.”
“차라리 딱지가 앉아 주면 좋겠다. 나 대신 계속 잔소리해 주는 잔소리 딱지.”
그런 게 있나 해서 그를 쳐다봤더니, 이윤은 더 걱정스럽게 자신을 쳐다보았다.
‘거래 내용에 잔소리 금지 조항을 넣을걸 그랬어.’
처음에는 이들이 왜 이러나 싶었다.
어차피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만 추면 되는데, 그사이에 말실수를 할 일이 대체 뭐가 있겠냐며 말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다른 것이 있는 모양이다.
MC들과 짧게 이야기를 나눈다거나, 대기실까지 카메라가 와서 무대에 오르기 전 영상을 찍곤 한단다.
“웬만하면 네가 대답하지 말고, 잘 모르는 건 그냥 다른 애들한테 대신 대답해 달라고 해.”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윤이 걱정스럽게 입술을 달싹이다가 몸을 돌렸다.
“나는 PD님 좀 뵙고 올게. 너희 잘 찍어 달라고 부탁해야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뒷말이 붙는 걸 보니, 자신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티 내고 싶은 모양이다.
그렇게 이윤이 나가고, 에르제는 우르르 들어오는 메이크업 팀을 바라보았다.
전에 LAK 콘서트에 갔을 때처럼, 대기실에서 메이크업을 받는 모양이다.
슬쩍 옆을 바라보자, 멤버들이 비몽사몽 상태의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전 녹화가 새벽부터 있었기에 그보다 2시간 전에 이곳에 와야 했기 때문이다.
새벽 4시가 되기 전부터 이곳에 와 있으려니 어제 일찍 잠에 들었다고 해도 졸린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에르제는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래도 이 일에 익숙해져 있는 건지, 그렇게 피곤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말똥말똥한 얼굴의 에르제를 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보통 다른 사람들은 졸고 있던데, 은우 씨는 멀쩡해 보이네요?”
“아, 저는 밤이랑 더 친해서요.”
“아하, 야행성이구나.”
“태양이 싫거든요.”
“흐응.”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온 커다란 가방에서 엄청난 양의 화장 도구를 꺼냈다.
옆의 멤버들에 붙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뭐가 많네요?”
그녀는 대답 대신 깍지를 낀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러고는 목을 좌우로 몇 번 돌린 뒤에 양손에 장비를 쥐었다.
기사들이 결투를 벌이기 직전에 하는 행동 같아서 퍽 용맹해 보였다.
물끄러미 보고 있자, 그녀가 씩 웃었다.
“오늘 우리들이 실력 발휘를 좀 해야 될 것 같아요.”
* * *
새벽 5시.
드디어 사전 녹화가 시작되었다.
이따가 오후에 생방송으로 진행된다는데, 왜 굳이 사전 녹화를 하는지 모르겠다.
이에 대해 민주혁에게 물었더니, “방송에는 제일 잘 나온 걸로 내보내야지.”라고 답했다.
에르제는 무대 쪽으로 향하면서 생각했다.
‘그러면…… 사전 녹화로 잘 나온 게 방송에 나간다고 하면…… 우리가 생방송 무대를 하는 이유가 있나?’
그러나 고민을 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냥 번거롭다고만 느껴질 뿐.
여전히 이 세계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이 꽤 불편하게 느껴졌다.
세트장을 바라보던 에르제는 카메라를 발견하고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차피 TV에만 나오면 되니까.’
실시간으로 TV에 나오나, 사전 녹화를 한 것이 TV에 나오나 별 차이는 없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윤치우가 무대 세트 쪽에 멈춰 섰다.
“우리 첫 음방인데, 사진 한 장 찍자. 우리 이렇게 진하게 메이크업을 한 것도 처음이니까 기념으로.”
윤치우가 핸드폰을 들어 올리자, 다들 그 뒤로 옹기종기 모였다.
태현우가 멀뚱히 서 있는 에르제의 소매를 잡아당겨 안으로 밀어 넣었다.
SNS라는 곳에 올릴 사진을 찍는 모양이다.
대략 5장 정도를 찍고 난 뒤, 태현우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 느낌 있어!”
“엑, 이거 저 눈 감았어여!”
“아닌데. 원래 눈 작은 건데?”
“저 안 작아여.”
안단테가 도끼눈을 뜨자, 윤치우가 웃음을 터뜨리며 사진 하나를 골랐다.
“현우가 고른 거 말고, 이거로 하자. 이게 제일 무난하게 나온 것 같아.”
“확실히 제일 합리적인 사진이네.”
에르제도 그 사진을 보며 한마디 했다.
“내가 제일 못 나온 사진이네.”
“…….”
“…….”
모두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왜?”
에르제가 묻자, 그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두가 무난하게 나온 이유를 말해 줘서 너무 감격스럽고 고맙구나.”
민주혁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뭐, 고마울 것까지야.”
로드로서 일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이런 통찰력과 배려심은 기본적인 소양이다.
민주혁이 자신의 어깨에 올려놓은 손에 힘을 꾹 주었다.
에르제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민주혁에게 작게 속삭였다.
“감사한 마음은, 이왕이면 생과일주스로.”
민주혁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지만, 에르제는 그것까지 알아채진 못했다.
“다음 토트윈 올라갈게요!!”
멀리서 스태프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가자!”
윤치우가 멤버들의 등을 떠밀자, 다들 그들이 올라가야 할 스테이지를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윤치우가 에르제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무대에 올라가면, 우리 보러 온 팬들이 있을 거야. 네가 무대 센터로 치고 나갈 때, 팬들한테 인사나 애교 같은 거 해.”
“……애교?”
“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아! 팬들이 좋아할 만한 행동?”
“아아아!”
의미를 깨달은 에르제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내 전문이야.”
“그……래. 사녹 보러 새벽에 오는 팬들을 위해서 우리가 감사의 의미로 하는 거니까……. 알지?”
점점 이윤화가 되어 가는 윤치우를 보며, 에르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조만간 왼쪽 귀와 오른쪽 귀, 둘 다 못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마이크 찰게요.”
스태프가 다가와서 그들의 귀에 인이어와 마이크를 채워 주었다.
에르제는 휘어진 막대기 같은 마이크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기고는 그들이 올라가야 할 무대를 바라보았다.
‘크다.’
데뷔 쇼케이스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무대 사이즈가 어마어마했다.
당장 높이만 해도 대기 장소에서는 고개를 바짝 들어서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왕궁에 초청되었을 때 무대가 이만했던가.’
한창 음유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때였을 거다.
대륙의 1/4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국가에 초청되어서 공연을 했었는데, 그때와 비슷한 크기인 것 같았다.
곧 사인이 떨어지고, 앞장서는 윤치우를 따라 무대 위로 올라갔다.
“와아아아아!!”
아직 무대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팬들이 소리를 질러 주었다.
태현우는 팔이 빠져라 그쪽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새벽부터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윤치우가 이를 받아서 크게 소리쳐 주었다.
“아침형 인간이라서 괜찮아!!”
그쪽에서 유쾌한 대답이 들려왔다.
덕분에 멤버들도 조금 편안해진 미소로 화답했다.
“잘하자, 얘들아. 새벽부터 온 팬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다짐하는 듯한 윤치우의 말과 함께, 토트윈은 각자의 자리에 빠르게 대형을 잡아 섰다.
이번에 사전 녹화로 진행하는 것은 타이틀 곡인 ‘HaLLo.’
그러나 이번에 그들은 머리띠를 하지 않았다.
뮤직 비디오 2절에서 나왔던 모습처럼 진하게 메이크업을 한 모습.
다만 슈트는 아니었고, 그보다 더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잘 살릴 액세서리로 무장한 의상이었다.
― 기다려 왔어.
이 순간이 오기를.
Under the blue sky.
처음 시작은 윤치우였다.
세로로 쭉 찢어진 붉은색 렌즈를 낀 채, 오만한 표정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 뒤로 안단테와 민주혁, 태현우까지.
그들은 자신의 파트를 훌륭하게 소화했고, 각자 그들만의 방식으로 사전 녹화에 와 준 팬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제 내 차롄가?’
에르제는 열심히 춤을 추고 화음도 쌓다가, 자신의 파트가 다가오자 씩 웃었다.
윤치우에게도 말했지만, 이런 건 자신의 전문이었다.
자신은 뱀파이어였고, 누군가의 환심을 사야 하는 종족이었으니까.
높은 고음을 내지른 뒤.
― 지금
나는
네 앞에―.
다시 저음으로 뚝 떨어지는 파트를 마친 에르제가 혀로 입술을 느긋하게 핥았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에르제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촉촉해진 입술에 찍었다.
그러고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팬들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주었다.
“……!!”
요염한 키스 날리기에 응원봉들이 마구 요동쳤다.
* * *
‘뮤직 큐’ 생방송은 금요일 5시에 시작되었다.
컴백하고 몇 주 내내 순위권에 진입해 있던 LAK부터, 요즘 아이돌계를 주름잡고 있는 2팀의 여자 아이돌 그룹, 그리고 이제 막 데뷔 무대를 가진 토트윈까지.
전에 토트윈 데뷔 쇼케이스에 왔던 기자가 ‘지각 변동’이라는 단어를 괜히 기사에 집어넣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생방송을 기다리는 팬들이 북적거리며 실시간 댓글을 쏟아 냈다.
― 오늘 토트윈 데뷔 무대임?
┖ ㅇㅇ 사녹 후기 봤는데, ‘HaLLo’ 무대 라이브로 찢었다는데? 역시 차트를 바로 뚫어 버린 남돌답쥬.
┖ 그래 봤자 곧 망할 돌~.
┖ LAK 팬은 다른 데 가서 노세요. 물 흐리지 말고.
― 설마 우리 애들 오늘도 머리띠 했음?!
┖ 오늘은 2절 콘셉트래.
┖ 드디어 ㅠㅠ 존버한 보답을 받겠구나.
그리고 쏟아지는 댓글 속에서 가장 큰 이슈는 단연 이것이었다.
― 아닠ㅋㅋㅋㅋ 내 친구 사녹 갔다 왔는데, 서은우 키스 날렸음.
┖ ??
┖ LAK 애들도 자주 하는 건데, 왜 유난이지?
― 서은우 키스 날리기가 별거 아니라는 너희들을 위해 링크를 가져왔다. ㄹㅇ 요염 그 자체. 내가 볼 때 뱀파이어의 피가 무조건 섞인 것 같음.
┖ 그래서 링크는 어딨냐?
┖ 아……. 현기증 나게 하지 말고, 빨리 직캠 주소 좀!!
┖ 무튜브에 ‘토트윈 사녹’ 치면 바로 나옴.
― 니들이 하도 난리 치니까 궁금해서 보고 왔는데, 서은우 표정 실화냐. 타돌 팬인데도, 순간 심쿵함;;
┖ 딱 보니까, 연애 경험 100회 이상인 듯. 경험이 없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표정임.
┖ ㄹㅇ ㅋㅋ
사전 녹화를 직접 다녀왔거나, 직캠을 본 토트윈 팬들은 심장통을 호소했으나.
당연히 토트윈을 좋게 보지 않는 이들은 곧장 물타기를 시전하며 분탕질을 했다.
팬들의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은 토트윈의 무대가 나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곧 토트윈의 생방 무대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 토트윈 ‘Kill shot’ 무대 시작한다! ‘HaLLo’는 조금 뒤인 듯??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커뮤니티와 실시간 댓글이 잠시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