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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2화 (12/307)
  • 제12화

    12화

    뱀파이어와 뱀파이어 사냥꾼이란 퇴마 콘셉트는 잡지사에서 제시했던 거라 고치지 않고 그대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마왕 민주혁’과 ‘뱀파이어 서은우’라는 콘셉트는 ‘ToT-win’의 세계관 문제였기에 저번에 찍었던 개인 티저 이미지를 수정하는 작업을 거쳤다.

    때문에 민주혁과 에르제, 둘만 ‘인생 컷! 스튜디오’에 다시 찾아가 촬영을 마무리 지었고.

    현재는 뮤직 비디오 촬영을 위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흐아암.”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인 탓에, 에르제는 차에 탄 뒤로 말없이 잠을 자려고 노력했다.

    어제는 이미 스튜디오가 다른 촬영으로 스케줄이 꽉 찬 상태였기에 오늘 다녀오는 것 말곤 선택지가 없었고, 덕분에 휴식 시간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에르제와 같이 새벽부터 스튜디오에 다녀온 민주혁과 그냥 잠을 좋아하는 태현우와 안단테.

    그리고 늘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 주려 애쓰던 윤치우도 억지로 잠을 자려고 노력 중이었다.

    ‘느낌이 왜 싸하지?’

    에르제는 뒤척이며 그렇게 생각했다.

    윤치우가 잠을 자려고 노력한다.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지난 그의 성격을 돌이켜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왠지 뮤직 비디오 촬영지에서 엄청 고생할 것 같은 기분.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다 왔어, 얘들아.”

    벌써?

    ‘경기도라는 곳이 그렇게 멀지는 않구나.’

    이윤의 말에 멤버들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잠깐 잔다고 얼굴이 붓는 것도 아니라서 이윤도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자동차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거대한 목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우와!”

    안단테도 그의 옆을 비집고 들어와 감탄사를 내뱉었다.

    “겁나 커.”

    “이번에 대표님이 좋은 제작사 구한다고 돈 엄청 들이셨어. 그러니까 다들 꾀부리지 말고 열심히 해.”

    이윤이 뮤직 비디오 세트장을 구경하는 멤버들에게 말을 덧붙였다.

    “이 세트장도 너희 뮤비 때문에 만든 거야.”

    “헐, 대표님 안마라도 해 드려야겠다.”

    태현우가 양손을 모으며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형, 거짓말인 거 티 나여.”

    “아, 그래?”

    안단테의 말에 태현우가 킥킥대며 차에서 내렸다.

    그렇게 다른 멤버들도 차에서 내리고, 가장 뒷좌석에 앉아 있던 에르제가 따라 내리려던 그때.

    이윤이 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은우야, 실장님이 이거 너 주라고 하시더라.”

    “……? 이게 뭐예요?”

    에르제가 받아서 살펴보니,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그만 통이었다.

    “선크림이야.”

    “선크림?”

    “그, 햇빛 막아 주는 거.”

    “?!”

    에르제가 원 형태의 통을 가만히 들고 있자, 이윤이 손을 뻗어서 뚜껑을 따 주었다.

    그 안에는 점성이 있는 물질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하면 돼.”

    이윤이 손가락으로 푹 찍어서 에르제의 손등 위에 발랐다.

    “반대편 손으로 문질러 줘. 네 피부가 하얘서 상하기 쉽다면서 챙겨 주셨어. 나중에 얼굴 뵈면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그는 그렇게 사용법을 알려 주고는 차에서 내렸다.

    에르제는 이윤이 말한 대로, 크림을 얇게 펴 바르고는 생각에 잠겼다.

    ‘실장이면, 그 사람인데…….’

    이틀 전에 숙소에 찾아왔던, 윤소희라는 여자였다.

    ‘태양을 피하게 해 주는 크림……을 굳이 나한테만 줬다고?’

    아까 싸한 기분이 이것 때문인가.

    피부가 상하기 쉽다는 것은 핑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윤이 민주혁이랑 콘셉트가 바뀐 것도 윤소희 실장 때문이라고 하던데…….’

    에르제가 심각한 표정으로 있자, 윤치우가 그를 데리고 가기 위해 가까이 다가왔다.

    “은우야, 이동하자.”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나란히 걷자, 윤치우가 그의 손을 보며 물었다.

    “근데, 그건 뭐야? 선크림인가?”

    에르제가 말없이 스윽 내밀자, 윤치우가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크림 맞네. 윤이 형이 준 거야?”

    에르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실장이라는 사람이 줬어.”

    “윤소희 실장님이?”

    의외라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윤치우는 “그렇구나.”라고 말하며 바로 수긍해 버렸다.

    “뭐, 원래 실장님이 너를 아꼈으니까.”

    ‘서은우를 아꼈다고?’

    에르제가 미간을 좁히자, 윤치우가 말을 덧붙였다.

    “너한테 가끔 맛있는 것도 사 주시고,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그러셨거든. 당연히 애들도 그런 걸로 불만을 가진 적 없었고.”

    담담한 그의 말에 에르제는 대충 상황을 이해했다.

    윤치우가 ‘멤버들이 불만을 갖지 않았다.’라는 말로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당연히 멤버들이 편애한다고 불만을 가질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그랬다는 건 반대로 서은우가 그만큼 챙김을 받았어야 한다는 뜻이 되니까.

    ‘고아……라서 그랬구나.’

    선크림 하나에 괜히 의미 부여를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에르제는 촬영 현장에 도착했다.

    “……와!”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넓은 공간은 커다란 나무 판에 의해 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카메라가 좌우로 이동할 수 있게 레일이 깔려 있었다.

    ‘스튜디오에서 봤던 것보다 더 큰 것 같은데?’

    레일 위를 왔다 갔다 하는 카메라는 정말 그때보다 더 커 보였다.

    그리고 현장 안을 돌아다니는 수많은 스태프들과 처음 보는 마도구들까지.

    한꺼번에 많은 정보가 쏟아져서 살짝 어지러울 정도였다.

    꿀꺽―.

    윤치우도 같은 생각인지, 침을 크게 삼키는 모습이 보였다.

    ‘잘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미리 받아서 확인했던 뮤비 콘티는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워 보였으니까.

    그러나.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뮤직 비디오 제작을 맡은 ‘로스트필름’은 능숙하게 멤버들을 이끌었다.

    “아이고, 장태수 대표님은 기한도 이렇게 빡빡하게 잡으셔 놓고는 빨리 세트 만들어 달라고 어찌나 닦달을 하시던지.”

    ‘로스트필름’의 대표 이창원은 그동안의 고충을 매니저인 이윤에게 털어놓으면서도 눈은 쉴 새 없이 현장에 꽂혀 있었다.

    “이야, 잘하네.”

    타이틀곡 ‘할로(HaLLo)’에 맞춰서 군무를 추는 그들은 이창원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웬만한 아이돌 그룹보다 훨씬 낫구먼.”

    “저희 애들 준비 많이 했습니다.”

    이윤이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렇게 초반부터 이창원의 호감을 산 멤버들은 무려 10시간에 걸친 대장정을 마무리하고 지쳐서 바닥에 널브러졌다.

    “와! 죽겠다, 진짜.”

    아직도 숨을 고르지 못한 태현우가 땀에 젖은 머리를 털었다.

    4개의 세트 그리고 야외까지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이동하고 준비하는 데에도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윤치우가 그런 그들을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다들 처음이라 힘들었을 텐데, 잘 따라와 줘서 고맙다.”

    “형도요.”

    “뮤비 잘 나왔으면 좋겠어여.”

    민주혁과 안단테가 곧바로 반응했다.

    말할 기운이 아직 남아 있나 보다.

    윤치우는 한 명씩 어깨를 두들겨 주곤 에르제의 옆에 와서 앉았다.

    그는 이 중에서 제일 멀쩡한 상태였다.

    “네가 기억을 잃어서 걱정했는데, 괜한 생각이었나 보다.”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놀라움이 더 컸다.

    기억을 잃고 난 뒤에 연습을 한 시간이 결코 많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뮤비도 뮤비이지만 데뷔하고 난 뒤에도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을 계속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는데…….

    오늘 그 불안감이 조금은 씻겨 나간 기분이었다.

    “음.”

    에르제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윤치우를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것 같은 그의 붉은 머리카락은 더워서 물이라도 부었는지 비에 젖은 듯 보였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이유가 뭐야?’

    그렇게 묻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위기에 휩쓸리기는 했지만, 자신도 열심히 춤을 추고 연기를 했으니까.

    잘은 모르겠는데, 또 알 것 같기도 한 기분.

    알쏭달쏭한 감정에 에르제가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이런 거, 앞으로도 계속해야 해?”

    “아하하.”

    에르제의 말에 윤치우가 밝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 * *

    10월 17일.

    모카 엔터테인먼트에서는 ‘ToT-win’이 데뷔하기 2주 전에 타임 테이블을 공식 계정에 게시했다.

    동시에 공격적으로 기사를 뿌려 댔다.

    [ 모카 엔터테인먼트 ‘ToT-win’, 10월 31일 데뷔! ]

    [ 모카 엔터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남자 아이돌 ‘ToT-win’ 이번에는 과연? ]

    [ 모카 엔터 장태수 대표, 이번에는 야심 차게 준비했다 ]

    10월 31일에 데뷔를 한다는 기사와 그 안에 같이 첨부된 타임 테이블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반응했다.

    ― ?

    ┖ ?????

    ― 모카 엔터에서 남돌 새로 내는 거임?

    ― ㅋㅋㅋㅋㅋㅋ 실화냐. 질리지도 않고 남돌 생산하네.

    ┖ 그냥 지금처럼 배우나 여돌 밀지. 장뭐시기 그놈의 ‘마이너스의 손’ 스탠스 계속 유지하네.

    ┖ 아, 그냥 ㄹㅇㅋㅋ만 치라고. ㅋㅋ

    그리고 대부분은 우호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장 대표가 그동안 말아먹은 게 있었기 때문에 보이는 당연한 반응이었고,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

    “?!”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하는 알람 소리에 회로에 찌들어 있던 한 대학생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내내 납땜하느라 흐느적거리던 몸뚱이가 이번에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주변에 과제로 같이 죽어 가던 동기들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그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또 남돌이야!?’

    그녀는 핸드폰을 양손으로 꽉 쥐었다.

    그동안, 장 대표가 말아먹었던 남자 아이돌이 대체 몇 팀이었던가.

    ‘아니, 솔직히 장 대표의 잘못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원래 논란 터지면, 당사자는 물론 소속사도 같이 욕먹는 법이다.

    사실 그래서 그녀도 저번 남자 아이돌을 말아먹었을 때 모카 엔터에서 완전히 손을 떼려고 했었는데…….

    장 대표의 안목만큼은 확실해서 나오는 애들마다 기대감을 심어 주는 게 문제였다.

    ‘ToT-win…….’

    그녀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찐막?’

    아니다.

    아냐, 아냐. 찐막은 무슨.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이니까.

    그냥 애들 얼굴이나 한번 보자. 그렇게 생각한 그녀의 눈이 빠르게 타임 테이블을 훑었다.

    4일 뒤부터 한 명씩, 무튜브에 만들어진 ‘ToT-win’ 계정으로 개인 티저 이미지와 클립이 공개된다고 한다.

    “어나더 월드……?”

    데뷔 앨범 제목이었다.

    타임 테이블은 또 왜 이렇게 화려하게 꾸며 놨어?

    그녀는 홀린 듯이 구독과 알림 설정을 해 둔 뒤, 핸드폰에 이마를 박은 채 눈을 감았다.

    ‘제발 이번만큼은 덕심을 잃고 길을 헤매는 어린 양을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기도하듯이 중얼거린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일단 지금은 과제부터.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아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4일이 흐른 뒤.

    무한한 실패의 늪에 빠진 브래드보드판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왔다!”

    무튜브의 ‘ToT-win’ 공식 계정에서 알림이 온 것이다.

    그동안 주접을 부리지 못해 석화되어 가던 심장이 두근거렸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녀는 트레일러 티저를 확인했다.

    그녀는 첫날 공개된 멤버의 얼굴을 보고, 숨을 헉! 하고 들이마셨다.

    ‘서은우……?’

    그리고 그녀와 똑같은 반응이 SNS상으로 빠르게 번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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