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1화 (11/307)

제11화

11화

방으로 들어오니, 태현우는 침대에서 뭉그적대고 있었다.

에르제는 쭈그리고 앉아서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태현우, 숙제가 뭐야?”

“…….”

대답 없이 벽 쪽으로 몸을 돌리는 그의 모습에 에르제의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아! 큭, 끄으으윽! 아하하핰!!”

피아노를 치듯 유려하게 휘젓는 손놀림에 간지러움을 견디지 못한 태현우가 눈물을 흘리며 일어났다.

“아아아아! 알았어! 알았다고! 그만해!!”

목적을 달성한 에르제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침대 옆에 놓여 있던 의자에 앉았다.

태현우가 투덜거렸다.

“무슨, 일평생 간지럽히기만 해 온 사람인 줄.”

“2,000년 동안 갈고닦은 기술이야.”

“에휴.”

태현우는 귀찮다는 티를 내면서도, 꽤 성실하게 대답을 해 줬다.

“뭐, 우리뿐만이 아니라 연습생 애들도 죄다 일주일마다 숙제 검사를 받는데. 어……. 제일 중요한 게 일기야. 매일매일 써야 하는데, 뭐 사실 토요일에 몰아서 쓴다고 보면 돼. 맨날 연습하고 돌아오면 녹촌데, 그거 쓸 기력이 어디 있냐고. 이게 말이 되냐?”

물론 절반은 신세 한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태현우가 줄줄이 늘어놓는 숙제는 참으로 종류가 다양했다.

방금 말한 일기를 포함해서.

일주일에 20장씩 셀카 찍기, 몸무게 체크하기, 연습 일지 작성하기, 그리고 안 좋은 버릇이 있는 멤버들에게는 그것을 고치는 개인적인 숙제까지.

이걸 왜 해야 하나 싶은 것들이 참으로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웃는 연습도 해야 하는 거야?”

“응. 일요일에 그거 사진 찍어서 가져간다? 그리고 다음 주에 비교해 보고.”

“……나아지는 게 보이나.”

에르제가 고개를 갸웃했고, 태현우도 알게 뭐냐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뭐, 하라면 해야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에르제가 다른 궁금증을 꺼냈다.

“그런데, 실장은 누군데 그렇게 난리인 거야?”

“아……. 실장님.”

태현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엄청 무서운 사람?”

“무서워?”

“어.”

태현우가 에르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마녀야, 마녀.”

마녀!? 마녀라고?

그의 말에 에르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로부터 마녀는 뱀파이어들과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마녀가 연구하는 다양한 약물과 마법들은 뱀파이어들의 생활을 꽤 윤택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태양을 어느 정도 견디게 만들어 주는 크림, 피를 먹지 않아도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음식 등을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반대로.

뱀파이어는 마녀들이 연구할 수 있는 비용을 충당해 주는 우수 고객이었다.

또한 그녀들의 연구에 필요한 재료를 구해다 주기도 했다.

그렇게 두 존재는 명백하게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다.

에르제는 “나 이제 진짜 쉴 거임! 건들지 마!”라고 말하고 침대에 드러누운 태현우를 바라보았다.

‘음…….’

마녀에 대해서 더 물어보고 싶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말만 마녀지, 진짜 마녀는 아닐 수도 있어.’

뱀파이어도 인형으로는 있지만, 이곳의 인간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으니까.

‘물론 직접 봐도 쉽게 알기는 어렵겠지만.’

자기가 마녀라고 밝히지 않는 이상, 그들도 정체를 숨기는 데에 꽤나 탁월한 존재들이니 말이다.

에르제는 기지개를 켜며, 잠에 빠져드려는 태현우에게 말했다.

“태현우.”

“…….”

“숙제해야 하는 거 아니야?”

“……으어어.”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태현우가 흐느적대며 몸을 배배 꼬았다.

예전에 사령술사를 만났을 때 보았던, 강화된 좀비 같았다.

* * *

일요일 11시.

숙소 거실은 쓸데없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각자 준비한 것을 들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자, 이윤이 들어왔다.

“실장님 오셨다.”

“으헉.”

누군가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와 함께, 실장이 거실로 들어섰다.

‘진짜 마녀일까?’

에르제는 그녀를 탐색하듯이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차갑다.’였다.

옷부터 머리색까지 전부 검은색이었는데, 무뚝뚝한 표정이 그런 감상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윤소희 실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윤치우가 냉랭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다른 멤버들도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래. 다들 데뷔 준비 잘하고 있지?”

“네!”

윤소희의 말에 태현우가 번쩍 손을 들고 외쳤다.

“완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저, 저두여.”

안단테는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섰고, 민주혁은 정중하게 인사만 하고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녀는 멤버들의 얼굴을 하나씩 바라보다가 에르제에게서 멈췄다.

윤소희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은우는 나 기억 안 나지?”

“……네.”

에르제가 느릿하게 대답하자, 그녀는 그를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고 있자, 윤소희가 피식 웃었다.

“재미있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멤버들의 숙제를 검사하기 위해 윤치우에게로 향했다.

‘재미…… 있다고?’

뭐가?

재미있을 만한 일이 있었나?

‘내가 기억 못 하는 게 재미있는 건가……? 기억 안 나도 기억나는 척이라도 했어야 했나.’

순간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지만, 일단은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두고 보게 된 것은 탈탈 털리는 광경이었지만.

“너희들 연습생 기간만 평균 2년이야. 특히 단테는 중학생 때부터 들어와서 3년 넘게 있었고. 너 올해 지나면 성인 아니야?”

“……네에, 맞아여.”

“그런데, 벌써부터 이렇게 약속 어길 거야? 내가 온다고 미리 말을 했는데도 이 정도면 평상시에…….”

불똥이 이윤에게로 튀었다.

“이윤 매니저님.”

“예.”

“평상시에 얼마나 풀어 줬으면 애들이 이래요?”

“죄송합니다.”

“하아.”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희 조금만 있으면 데뷔야. 너희 괴롭히려고 숙제 내주는 것도 아니고, 다 너희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려고 하는 거잖아. 이런 작은 약속도 못 지키면, 팬들과의 약속은 어떻게 지키려고 그래?”

그렇게 쏘아붙인 윤소희는 숨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치우랑 주혁이는 워낙 성실하니까 괜찮은데, 현우랑 단테…… 너희 둘은 내일까지 숙제 마무리해. 이윤 매니저님이 검사해서 저한테 알려 주세요.”

그녀의 말에 태현우가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늘 밝은 녀석이 그러는 건 이유가 있었다.

― 으아! 은우야! 나 3주 전에 뭐 했지? 우리 뭐 했어? 춤 연습?

― 태현우는 말하기 전에 생각을 할 필요가 있어.

어제 새벽.

태현우는 기억을 잃은 서은우한테 3주 전 일을 물어볼 정도로 패닉 상태였다.

에르제가 ‘숙제 안 할 거야?’라고 묻지 않았다면, 아마 오늘 상황은 더욱 심각했겠지.

‘보니까 안단테도 비슷한 상황 같은데.’

둘 다 일주일 치를 오늘 하루 안에 채워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윤소희가 에르제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은우.”

“네?”

“너는 사고 나기 전까지는 숙제 잘되어 있었으니까 오늘은 그냥 넘어간다.”

그녀의 말에 에르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태현우에게 숙제에 대해서 들은 뒤 에르제도 서은우의 지난 행적을 좇았다.

그에게 부과되어 있던 숙제가 뭐였는지, 그리고 잘해 놨는지에 대한 것들 말이다.

그리고 서은우는 생각보다 성실하게 해 두었다.

일기 같은 건 중간중간 빠져 있는 날도 있었지만, 거의 매일 작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도했던 것도 잠시, 에르제는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하지만, 중요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어.’

거의 대부분이 그들이 소화했던 일과가 적혀 있었을 뿐이다.

서은우의 기억을 읽어 내지 못하기 때문에 일기에서 본체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고 했는데.

사적인 부분은 ‘부모님이 날 버렸다.’라는 점을 제외하면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에르제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거실 중앙으로 이동한 윤소희를 바라보았다.

아까 혼내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지금의 윤소희는 차분한 얼굴이었다.

“원래 내가 여기 온 건 중요 공지 사항을 전달하기 위해서야. 너희들 얼굴을 직접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었거든.”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을 알아들은 민주혁이 작게 “드디어.”라고 중얼거렸다.

“너희 10월 31일, 핼러윈에 맞춰서 데뷔 쇼케 하는 거 알고 있지? 그날 저녁에 음원 풀 거고, 그 전에 5일 동안 매일 하나씩 개인 트레일러 티저를 공개할 예정이야.”

그러고 난 다음 날에는 단체 트레일러 티저와 뮤비 티저를 공개한단다.

윤소희는 잔뜩 긴장한 멤버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스케줄이 좀 빡빡하긴 한데, 조금만 더 고생하자. 이틀 뒤에 뮤비 찍는 거 알지? 티저 클립도 거기서 나오니까 열심히 하자.”

“네!!”

“네!!”

다들 힘차게 대답했다.

자신들이 곧 데뷔를 한다는 사실을 서서히 실감하는 것 같았다.

그건 에르제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 어딘가에 흩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일족들에게 드디어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윤소희가 하는 말 대부분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분위기가 그렇지 않은가.

다들 신이 나서 방방 뛰는 모습을 보니, 절로 흐뭇해지는 기분이었다.

‘10월 31일이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윤치우가 손을 들었다.

“그럼 타임 테이블도…….”

“물론, 그건 곧 공식 계정에 올라갈 예정.”

윤소희의 대답에 윤치우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치우가 리더니까 그 전까지 애들 잘 챙겨 줘.”

“네, 실장님!”

차분하던 윤치우의 목소리가 거의 한 옥타브는 올라가 있었다.

그렇게 윤소희 실장은 이윤과 함께 숙소를 나갔다.

그리고 멤버들만 남은 숙소 안은 시끌벅적해졌다.

“미친, 드디어 우리 뮤비 찍는다.”

“솔직히 시간 질질 끌까 봐 걱정했는데. 하아, 진짜 다행이에여.”

“은우야! 너도 기쁘지! 그렇다고 해!”

태현우가 에르제의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가만히 두었다.

‘이대로 두면, 밤에 잠 안 자고 난리 칠 것 같아.’

그렇게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을 때쯤, 윤소희의 배웅을 나갔던 이윤이 돌아왔다.

그의 얼굴도 다분히 상기되어 있는 상태였다.

“치우야, 애들 무튜브 개인 계정 하나씩 만들라고 하고 너희 그룹 것도 미리 만들어 놔.”

“아! 알겠습니다.”

“거기에 너네 개인 티저 나오면 따로 올리면 돼.”

“넵.”

“아, 그리고…….”

이윤은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윤소희 실장님이 얘기해 줬는데, 너희 세계관 작업이 끝났다고 하더라.”

“엇, 그래요?”

“응.”

이윤은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이세계 느낌으로 가자고 하더라. 판타지.”

“이세계요?”

“응. 어차피 너희 콘셉트는…… 거의 똑같아. 하던 거 하면 돼. 그냥 세부 설정만 바뀐 거야.”

이윤은 태블릿에 ‘Another World’라고 쓰여 있는 글자를 보여 주었다.

“어나더 월드.”

민주혁이 그것을 따라 읽었다.

“맞아. 각자 다른 세계에서 지루함을 느끼던 너희들이 핼러윈 축제를 맞아 지구로 넘어온 거지. 그래서 타이틀 곡 뮤비랑 티저도 그렇게 갈 예정이야.”

“오…….”

그럴듯해 보이자, 태현우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아무튼 너희들한테 크게 바뀌는 내용은 아니라서 알아 두기만 하면 되고.”

이윤은 그렇게 말하며 민주혁과 에르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희 둘은 기존 콘셉트가 바뀌었어.”

“저요? 저 뱀파이어 아니었어요?”

민주혁이 자신을 가리키며 말하자, 이윤이 고개를 저었다.

“너는 마왕.”

그리고 이윤이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뱀파이어는 은우가 하기로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