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8화 (8/307)

제8화

8화

몰래 음식을 꺼내 먹으려다가 걸린 에르제는 얌전히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이 마치 선생님에게 잘못을 들킨 어린 학생 같았다.

“먹지 않았어.”

“알아.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고.”

나란히 앉아 있던 민주혁이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네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데뷔에서 밀린 애들의 박탈감만 더 커져.”

“…….”

에르제는 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현재 숙소에 있는 인원은 5명이지만, 태현우에게서 그 외의 연습생들은 숙소조차 제공받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저 언젠가 데뷔조에 들어갈 거라고 굳게 믿으며 끝도 보이지 않는 지루한 연습생 생활을 견뎌 낸다고.

태현우도 그 연습생 생활을 2년가량 견디고 나서 이제야 데뷔 멤버로 뽑혔다고 했다.

고개를 푹 숙이자, 민주혁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냉장고에 네가 원하는 것도 없고. 먹지 못하게 할 걸 뭐 하러.”

금단의 문을 연다고 하여도, 그 안에 금단의 음식이 있는 것은 아니라니.

이윤은 생각보다 치밀한 작자였다.

그동안 쌓아 두었던 이윤에 대한 이미지를 개미 더듬이만큼 수정한 에르제는 이내 민주혁에게 사과했다.

“사과할게. 1,000년에 한 번 정도 있는 일이긴 하지만, 내 생각이 짧았어.”

“알면 됐다.”

민주혁은 에르제 때문에 잠이 다 깼는지 말을 마치고서도 한동안 소파에 앉아 있었다.

덩달아 같이 앉아 있던 에르제가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자러 가지 않아도 되는 거야? 일찍 자라고 난리던데. 얼굴 붓는다고.”

“어차피 프로필 촬영도 끝났잖아. 그리고 잠을 깨운 건 너거든?”

“생리 현상 때문에 잠에서 깨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야. 그렇게 부끄러워하며 숨기지 않아도 괜찮아. 당당해져도 돼.”

“뭔 소리야!”

얼굴이 벌게진 민주혁이 조그맣지만 짜증스런 목소리로 신경질을 냈다.

“……윤이 형한테 다 말할 거야. 몰래 음식을 훔쳐 먹으려다가 나한테 걸렸다고.”

“훔쳐 먹는다는 표현은 좀 그런데. 그리고.”

에르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늘 점심때의 일을 떠올린 것이다.

“너도 물맛 풀 먹이려 했잖아.”

“웃기지 마. 네가 달라고 했으면서.”

“그게 물인지 알았으면 주지 말았어야지.”

정론에 민주혁이 입을 다물었다.

“쯧. 좋아, 퉁치자.”

“그래.”

에르제가 주먹으로 민주혁의 어깨를 가격했다.

“??”

“?”

에르제는 민주혁과 같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

민주혁은 반대편 손으로 어깨를 주무르며 고개를 저었다.

“……기억 잃었다고 했지 참. 그냥 없던 일로 해 주겠다는 뜻이야.”

‘퉁치다’가 그런 말이구나.

“좋아, 그렇게 하자.”

새로운 단어를 학습한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민주혁은 창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

잠깐의 침묵이 흐르는 거실에 달빛이 비쳐 들고 있었다.

에르제가 좋아하는 초승달이라 그 빛이 그리 세지는 않았다.

은은하게 민주혁의 목덜미까지 닿을 정도였다.

이를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나 너 별로 안 좋아해.”

“……그건 드문 일인데.”

어이없다는 듯이 민주혁이 돌아보았지만, 그는 이내 다시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이제 같은 그룹으로 쭉 함께 가야 하니까 데뷔하기 전에 미리 말 꺼내는 거야.”

씁쓸하게 웃은 민주혁은 잠시 숨을 골랐다.

“춤도 못 추고, 노래도 썩……. 그렇다고 연습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외모 하나로 데뷔 멤버에 뽑힌다고 하니까 기분이 좋지는 않더라고. 물론 최근에 네 춤을 보고 놀라기는 했지만.”

그렇게 민주혁은 한참 동안이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홀로 자신을 뒷바라지하며 힘들게 키워 주신 어머니의 이야기부터, 어떻게든 아이돌이 되기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결국 그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였다.

“그러니까.”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여전히 그런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좋아. 널 싫어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주제넘을 수도 있지만 충고하는 거야. 데뷔하고 나면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 텐데, 오늘처럼 배고픈 것도 못 참아 내면 앞으로도……. 글쎄, 솔직히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온 만큼 팀에 피해가 가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며 에르제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민주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자신의 목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혹시 자신이 한 말 때문에 기분이 많이 상했나?

아니, 그래도 꼭 필요한 말이었잖아.

서은우는.

부모님을 찾고 싶다고 했던 말과는 달리, 이상하리만치 아이돌이 되는 것에 진심이 아니었다.

늘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와 같이 데뷔조에 뽑혔을 때부터 걱정스러운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다.

아이돌로 성공하는 것은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효도였으니까.

“서은우?”

민주혁이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와앙! 하고 에르제가 그의 목덜미를 물었다.

* * *

이윤은 아침부터 연습생들의 숙소를 찾았다.

[ 형, 주혁이랑 은우가 싸운 것 같아요. ]

아침에 윤치우에게서 온 메시지 때문에 마음이 심란한 상태였다.

“너희 둘.”

이윤은 에르제와 민주혁을 번갈아 바라보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혹시 새벽에 싸웠어?”

“아뇨.”

민주혁이 재빨리 대답했고, 에르제는 팔짱을 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넌 왜 대답 안 해?”

“이윤이 나를 그렇게 경솔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에 온몸으로 실망감을 표출하는 중이에요.”

이윤은 순간, 아침마다 겪는 저혈압 증세가 극적으로 호전되는 것을 느꼈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윤은 민주혁의 목덜미에 선명하게 난 상처를 가리키며 벌컥 화를 냈다.

“그럼 이건 뭔데? 너희 둘이 새벽에 막 소리 지르고 그랬다면서!”

“둘이 아니라 쟤가 그랬는데.”

에르제가 턱으로 민주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건 확실하게 해야 했다.

“아 씨.”

민주혁이 짜증스럽게 맞받아치며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차마 서은우가 자기 목을 물었다고 말할 수 없어서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하는 중인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나.’

자신이 나서는 수밖에.

20살의 애송이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는 없었다.

에르제는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목에 큰 벌레가 있었어요.”

“……벌레?”

“네. 그것을 잡아 주려다가 낸 상처예요.”

이윤이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이 주혁의 상처를 에르제에게 들이밀었다.

“까졌잖아. 도대체 벌레를 어떻게 잡아야 이런 상처가 나는데?”

에르제는 그 말에 손을 반듯하게 수평으로 세웠다.

그러고는 손톱을 앞으로 향하며 찌르기를 했다.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서 손톱을 사용했어요.”

“내가 바보냐.”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멤버 내에서 싸우는 일이 발생하면 적어도 치우나 주혁이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이고.”

이윤은 민주혁의 목에 난 상처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내가 없는 데서 벌어진 일이고 혈기왕성한 너희들끼리 다툼이 없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보이는 곳에 상처는 내지 마라.”

그 말에 에르제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래서 바로 고쳐 놓으려고 했는데.’

민주혁이 곧장 비명을 지르고 그 소리에 다른 멤버들이 깜짝 놀라 자던 방에서 뛰어나오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뭐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무사히 넘어갈 것 같았다.

혹시나 뱀파이어인 것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던 자신이 조금 민망해졌다.

물론.

“당연히 싸우지 않는 게 우선인 건 알지? 이럴 때마다 너한테 부탁해서 미안하기는 한데, 치우가 리더 역할을 잘해 줘.”

이윤의 얼굴이 6개월은 늙어 보이는 건 결코 기분 탓이 아니리라.

* * *

이윤에게 따로 한 소리 듣고 방으로 돌아온 에르제는 심각한 표정으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혼나서가 아니라 새벽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몰래 거실로 나왔던 이유는 배가 고파서였지만, 민주혁의 목을 물었던 것은 본능이었다.

뱀파이어에게는 권능이자 굴레가 될 수밖에 없는 흡혈 본능.

피를 향한 끝없는 갈증은 그들이 오랜 세월을 살 수 있게 해 주는 권능이었지만, 반대로 흡혈을 하지 못했을 때에는 생명의 위협이 되는 굴레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제는 굉장히 이상했다.

달빛과 목덜미.

순전히 본능에 의해서 물었지만, 흡혈을 하기 전 따라와야 하는 ‘갈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히 송곳니도 나오지 않았고, 흡혈도 하지 못했다.

본능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기보다는 그냥 흡혈 능력 자체가 없어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기는 했어.’

병원에서 퇴원한 뒤로 단 한 번도 흡혈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무려 2,500년 동안 몸에 밴 습관 때문에 어제의 일이 발생했던 것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몇 주 아니 몇 달이고 흡혈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욕구를 느끼는 주기가 3일에 한 번 정도였기에, 흡혈의 필요성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해 보였다.

생각 끝에 에르제는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지금 자신이 들어와 있는 육체가 인간이기 때문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설마 어제의 축복 때문인가?’

에르제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이 세계에서 살게 되었을 때, 어쩌면 가장 불편한 점이 사라져서 좋다고도 여길 수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유한하고도 짧은 생을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일족들을 찾는 데 썩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에르제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나중에 다시 확인을 해 보는 게 좋겠어.’

당장 피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 사안은 좀 더 여유 있게 시간을 두고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권속을 들이는 일도 꼭 흡혈을 통해 하지 않아도 되니 상관없고 말이다.

그렇게 침대에서 뒹굴뒹굴하고 있는데, 에르제에 이어 민주혁과 이야기를 마치고 온 이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너, 어제 주혁이랑 싸운 게 냉장고 몰래 털다가 들켜서 그런 거라며?”

그 말을 듣자마자 에르제는 분기에 차서 벌떡 일어났다.

서로의 잘못을 아름답게 용서해 주는 과정을 겪고 놓고 이렇게 보란 듯이 배신을 하다니.

‘구울로 만들어서 더 심한 허기를 느끼게 해야 하나.’

유리보다 쉽게 깨지는 신뢰감에 힘이 빠진 에르제가 털썩 주저앉자, 이윤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번에 공연하는 거 때문에 빡세게 하는 거니까 잘 끝내고 나면 고기라도 구워 먹자고 대표님한테 건의할게. 조금만 참자.”

안쓰러운 말투로 말한 그는 이내 일어나라고 손짓하며 다른 용건을 꺼냈다.

“오늘 오후 일정이 너희 데뷔 앨범 녹음하는 거거든?”

“녹음이요?”

에르제가 묻자, 이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원래는 며칠 전에 녹음 따고 앨범 제작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지금 네가 노래하는 부분만 비어 있어.”

“아아!”

사고 때문이구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다른 멤버들의 녹음 준비는 어느 정도 된 모양이었다.

“그럼 지금……?”

이윤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바로 가자는 건 아니고, 그 전에 네가 해야 할 게 있어서.”

“해야 할 거요?”

“어.”

이윤은 그렇게 말하며 태블릿을 조작해 에르제에게 넘겼다.

새까만 화면에 삼각형 하나가 보였다.

“너희 데뷔 앨범에 실릴 두 곡이야. 이따가…….”

이윤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녹음하러 가기 전까지 최대한 외워 둬. 가사지 보면서 하면 되니까 가사는 됐고, 멜로디 우선으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