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prologue
“왔다!”
찰칵! 찰칵, 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가 공항 안을 가득 메웠다.
“꺄아아아악!! 에르제 오빠!!”
“여기요! 여기 봐 주세요!!”
“여기 사인 좀!!”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수많은 팬들과 기자들이 공항 출국장에서 나온 남자에게로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본명 서은우, 예명 에르제.
185cm가량 되는 키, 태양과는 담을 쌓은 듯 보이는 새하얀 피부, 그리고 도톰한 붉은 입술.
그의 눈부신 외모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한순간에 매혹되어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였다.
그는 양 손바닥을 들어 흔들어 주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팬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다시 한번 큰 소란이 일었지만, 이번에는 기자들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에르제 씨! 잠시 인터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여기 한번 봐 주시겠습니까?! 이번에 앨범 초동 판매량이 60만 장을 돌파했는데……!”
“오늘 귀국한 소감 한마디만!”
기자들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밀었지만, 바로 옆에 기립해 있던 경호원들에 의해 제지당하고 말았다.
“물러서십시오.”
“촬영을 제외하고 인터뷰는 금지입니다.”
“지나가겠습니다. 비켜 주세요.”
그러나 기자들이 그런 말에 쉽사리 물러설 리 만무했다.
오히려 경호원들을 넘어뜨릴 기세로 거세게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물러나세요!!”
결국 뒤에서 따라오던 매니저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앞을 막아서야 할 정도가 되었다.
“악!!”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여기자 한 명이 인파에 떠밀려 크게 넘어져서 딱딱한 바닥에 무릎을 세게 찧고 말았다.
“으으…….”
그녀가 무릎을 부여잡고 신음을 내뱉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남자에게만 집중할 뿐.
하지만 에르제가 그녀를 발견했다.
“……사람이 다쳤는데.”
날카로운 그의 말에 기자들은 순간 움찔하며 좌우로 갈라졌다.
에르제가 넘어진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자, 경호원들이 그 안이 보이지 않도록 원을 만들어 에워쌌다.
“괜찮아요?”
“네, 네! 괜찮, 괜찮아요!”
에르제가 자신을 신경 써 줄 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는지, 그녀는 상당히 당황한 상태였다.
“피가 나네.”
에르제는 그렇게 말하며 왼쪽 팔로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잡았다.
그러고는 반대편 손을 그녀의 다친 무릎을 향해 뻗었다.
“아!”
에르제의 엄지손가락이 다친 부위에 닿자,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슥―.
무릎 위로 살짝 흐른 피가 그의 엄지손가락에 묻어 나왔다.
“피는 멈췄을 테니 이제 일어나셔도 돼요.”
“어, 어?”
그의 말대로, 더 이상 무릎 상처에서는 피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상처 따윈 없었던 것처럼 말끔해져 있었다.
그녀가 멍한 얼굴로 앉아 있자, 에르제는 그녀의 손을 잡아 반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메고 있는 장비 때문에 결코 가볍지 않았을 텐데도 에르제에게는 손쉬운 일처럼 보였다.
“아…….”
그가 살짝 고개를 꾸벅이고 자리를 떠나자,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경호원들도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른 이들을 따돌리고 공항 밖으로 나온 에르제는 혼자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경호원에게 물었다.
“오늘 차는 뭐예요?”
“그냥 밴입니다.”
“선팅은 되어 있죠?”
“네. 햇빛이 들어올 일은 없을 겁니다.”
에르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타시죠.”
경호원들은 에르제를 장 대표가 준비한 차에 태우고는 그 뒤에 있는 다른 차량에 하나둘씩 올라탔다.
차 안의 중간으로 이동한 에르제는 그대로 쓰러지듯이 자리에 앉았다.
푹신푹신한 쿠션이 잔뜩 쌓인 여독을 풀어 주는 기분이었다.
“흐으으.”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에르제에게 매니저가 운전석에 타면서 말을 걸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너도 고생했어, 라하임. 해외까지 따라온다고.”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라하임이라고 불린 매니저는 멋쩍게 웃고는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들었다.
“어디.”
차의 시동이 켜지자, 에르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얀 송곳니 사이를 비집고 나온 혀가 그대로 그의 엄지손가락을 핥았다.
스륵―.
그러자 새빨간 피가 혀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으음……. 맛은 별로네.”
그가 한숨 비슷한 소리를 뱉어 내자, 라하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드, 아까 그 여자를 권속으로 만들 생각이십니까?”
“아니. 그냥 작은 배려.”
에르제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 그 여자, 이름이랑 어디 소속인지 확인해 봐.”
“예.”
“그리고 그 여자, 병원 가 보라고 해. 그대로 두면 조만간 쓰러질 것 같아.”
“알겠습니다.”
에르제는 양팔을 앞으로 쭉 폈다.
“끄으으, 오랜만에 멤버들 얼굴 보러 가 볼까.”
일본에서 솔로 활동을 마치고 몇 주 만에 귀국해 모카 엔터테인먼트로 돌아가는 길.
그러나 차 바깥은 아직도 산처럼 몰려온 팬들이 공항 입구 쪽에 가득 모여 있었다.
그는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려는 라하임을 막았다.
“잠깐. 잠깐만, 출발하지 마.”
그렇게 말한 에르제는 차창을 내려서 몰려 있는 팬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주 화답하는 팬들을 보며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예전에는 팬이라곤 딱 한 명뿐이었는데.’
자신의 1호 팬이 되어 주겠다던 이는 어느새 스태프 신분에서 벗어나 자신의 스튜디오를 차렸다고 들었다.
‘시간 참 빠르네.’
예전 뱀파이어 로드로서 살았던 2,500년은 그다지 빠르게 흐른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의 삶은 즐거운 만큼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앞으로의 시간도 분명 빠르게 흐를 것 같았다.
“가자.”
다시 차창을 올린 에르제는 추억 속에 잠기며 안대를 올려 썼다.
1화
“쿨럭―.”
“……괜찮으십니까?”
뱀파이어 로드, 에르제는 한층 탁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보아도 괜찮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끝까지 해내야 할 사명이 있었다.
“마지막 남은 일족들이라도 살려야지.”
씁쓸한 미소를 지은 그는, 자신을 부축하고 있던 라하임에게 기대어 다시 일어섰다.
로드인 자신에게 유독 잔소리를 많이 하는 녀석이지만, 그래서 더욱 아끼는 녀석이다.
지금도 자신과 함께 마지막까지 남겠다며, 술법의 대상이 되는 것을 거절했으니 말이다.
“괜찮아.”
에르제는 걱정스러운 표정의 라하임에게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있는 일족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skfdjlqwejlq…….”
“…….”
라하임은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뱀파이어 사냥을 시작한 인간들 때문에 살아남은 일족은 고작해야 서른 남짓.
앞으로 1시간 뒤면 인간들은 겨우 숨어들었던 이 동굴마저도 찾아낼 터이고, 그렇기에 에르제는 남은 힘을 모조리 소진해 일족들을 다른 차원으로 보내는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술법 사용자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 행하는 금기의 주문.
말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에게는 로드의 명령을 거부할 권한이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옷, 바들바들 떨리는 손,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얼굴이 아예 새하얗게 질린 모습까지.
에르제와 죽음을 함께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지금 로드의 상태는 눈을 질끈 감고 외면해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라하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르제는 주문을 마저 외우는 데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dkqjeklqrjwlr…….”
그렇게 비틀거리며 영창한 지 30분가량 지났을 무렵, 그의 손에서 짙은 어둠이 강하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어둠은 서서히 아래로 가라앉아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뱀파이어들 주위로 퍼져 나갔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어둠은 옷자락부터 시작해 그들의 존재 자체를 먹어 치우려는 듯 동굴 안을 잠식해 나갔다.
“다른 곳에선 부디…….”
에르제는 자신의 몸에서 막대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처연한 눈으로 라하임을 바라보았다.
그 의미를 이해한 라하임이 비명을 질렀다.
“자, 잠깐……!”
에르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과 함께 죽겠다던 라하임의 마지막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한 것이다.
“로드―!!”
에르제가 만들어 낸 어둠이, 뒷걸음질을 치는 라하임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아!”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고, 그는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다.
서른 남짓 있었던 일족을 모두 보내고, 이제 혼자 맞이하게 되는 죽음의 순간.
그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어서일까, 두렵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평온했다.
톡―.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그의 고막을 크게 때렸다.
에르제는 누운 그대로 눈을 감았다.
다리도, 팔도, 심지어는 눈꺼풀에도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2,500년.
먼저 세상을 떠난 원로들보다는 오래 살지 못했지만, 그래도 꽤 긴 시간 동안 일족을 다스려 왔다.
이제는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되레 마음이 편해진다.
탁탁탁탁―!!
철컹, 철컹―.
갑옷이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병사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때가 됐나.’
금지된 술법의 여파, 혹은 인간들에 의해…… 방법이 다를 뿐이지 결국 자신은 죽는다.
“…….”
감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뭐가 그렇게 미워서 자신의 일족을 죽이려고 이렇게 안달이 난 걸까.
인간들에게 피해를 준 적도 없었고, 반대로 피해를 입은 기억도 없었다. 그저 인간 세상에서 미치광이 황제가 등극했을 뿐.
인간 세계의 대륙을 통일한 황제의 손에 모든 종족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다.
굴복하거나, 자신들처럼 싸우다가 멸망하거나.
‘섞여 지내던 때가 좋았는데.’
에르제는 음유시인이 되어 대륙을 누비던 과거의 시간을 떠올렸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로드라는 짐을 잠시 벗어 둔 채 여러 종족들과 뒤섞여 살았던 행복한 기억이었다.
어쩌면…… 그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인간에 의해 일족이 멸망을 맞이했음에도, 그들에 대한 미움이 없다는 게 퍽이나 우스웠다.
‘죽기 직전에 떠오르는 추억이 이런 것이라니.’
그런 마지막 생각과 함께, 엷은 미소를 짓고 있던 에르제의 숨이 끊어졌다.
그리고.
에르제의 몸 위로 조금 전의 검은 기운이 그대로 뒤덮었다.
* * *
“아아아아아……!!”
이윤은 온 세상이 무너진 듯 절망하며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모카 엔터테인먼트’의 매니저가 된 지도 어느새 6년. 그 시간 동안 단 한 번의 사건 사고도 없이 무탈하게 직장 생활을 보내고 있었건만.
‘하필……!’
아이돌의 사고라니.
그것도 가벼운 사고가 아니라 교통사고였다.
다행스럽게도 목숨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크게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머리에서 피가 철철 날 정도로 다치는 바람에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고.
담당 매니저인 자신이 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지금 병원에 왔다.
이윤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필 은우가…….’
일반 연습생이었다면 그저 크게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했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서은우는 곧 데뷔할 아이돌이었고, 하필이면 그게 고작 한 달밖에 남지 않은 10월 31일이라는 점이다.
콘셉트상 무슨 일이 있어도 핼러윈에 데뷔를 해야 했기에 소속사 입장에서는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물론 사람이 먼저이기는 하지만…….’
이윤은 죽어 가는 사람처럼 고개를 들어 올려 병실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냐.’
물론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고 치고 데뷔 멤버에서 제외시키는 방법도 있었지만, 사실상 그렇게 하기는 어려웠다.
녀석은 아주 특별한 재능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사실 녀석은 노래와 춤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것도, 그렇다고 랩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외모.
남자 아이돌이든, 여자 아이돌이든 압도적인 비주얼은 ‘실력’을 훌쩍 뛰어넘는 법이니까.
“스읍.”
급 담배가 당긴 이윤이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던 그때.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은우 환자 보호자분?”
“네, 네.”
괜스레 침을 꿀꺽 삼키자, 의사가 안경을 올려 쓰며 입을 열었다.
“다행히 피를 흘린 양에 비해서 다친 정도가 심하지는 않습니다. 수술도 무사히 끝났고, 음……. 앞으로 경과를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큰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하아아.”
이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에 손을 올리자, 의사가 말을 이었다.
“다만…… 부분적인 기억상실이 있을 수도 있으니, 이 점은 유념해 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일단 입원한 사실은 외부에…….”
“네. 알고 있습니다.”
의사는 차트를 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호자께서 곁에서 잘 지켜봐 주세요.”
“……그래야죠.”
일주일 안에 일어날 수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윤은 끝내 그 질문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대답이 뻔했으니까.
일주일 내에 의식이라도 차려 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드륵―.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병실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돈이 없는 서은우를 위해 소속사에서 비용을 대 준 4인실이었다.
벌써 밤이 되어서 그런지, 보호자도 환자도 모두 조용했다.
이윤은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서은우가 누운 병상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눈썹을 살짝 덮을 정도로 내려온 흑발, 그와 대비되는 새하얀 피부.
눈을 감고 있음에도 섬세한 이목구비는 서은우의 미친 외모를 더욱 부각시켜 주고 있었다.
새근새근 잠이 든 모습을 바라보던 이윤은 한숨을 툭 내뱉었다.
“하아, 남의 속도 모르고.”
무신론자인 이윤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에게든 빌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녀석이 깨어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위에서는 힘없는 자신을 미친 듯이 쪼아 댈 테니까.
‘제발 하느님, 부처님 누구든……!’
지금껏 이토록 간절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이윤은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그리고.
“으음…….”
갑자기 서은우의 입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번쩍 뜬 이윤이 그를 쳐다보자, 서은우도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상태로 이윤을 마주 보았다.
‘……!?’
기도가 통했다.
* * *
‘여긴…… 어디지?’
긴긴 어둠을 뚫고 나온 후 펼쳐진 광경은 난생처음 보는 것들로 가득했다.
건물 내부는 그 전에 봤던 것과 비슷한 듯했지만 무언가 달랐고, 2,500년을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특이한 도구들이 주변에 널려 있었다.
‘죽지…… 않았어?’
에르제는 뿌옇게 흐려진 눈을 깜박이며, 손에 힘을 주었다.
푹신한 것이 그대로 손가락에 말려 들어왔다.
약하게 풍겨 오는 약품 냄새도, 지금 손가락에 닿는 부드러운 감각도 아주 생생했다.
자신은 분명 술법의 여파로 죽었어야 마땅한데, 어째서인지 목숨이 아직 붙어 있는 듯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렇게 혼란스러운 생각에 빠져 있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좀 들어? 괜찮아?”
이마를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실루엣으로만 보이던 옆의 형체가 점차 뚜렷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윽고 흔들리던 시야가 복구되는 순간, 에르제는 솜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인간!?”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를 뱉어 낸 그는 황급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야! 그렇게 급하게 움직이면 안 돼!”
눈앞의 인간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으나, 에르제는 재빠르게 피해 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지금 누워 있었던 곳이 그리 넓지 않았기에 에르제의 몸은 곧장 아래로 기울어졌다.
에르제의 몸이 난간 같은 것에 잠시 걸쳐져 있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윽……!”
우당탕 아래로 넘어진 에르제는 눈물을 글썽였다.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듯, 찌릿찌릿한 고통이 팔꿈치부터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아무래도 바닥에 왼쪽 팔꿈치를 찧은 듯했다.
그렇게 엎어진 채 욱신거리는 부위를 매만지던 에르제의 눈에 손등에 부착되어 있는 관이 보였다.
‘……?’
바늘로 꽂아 놓은 듯한 관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이상한 마도구에 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설마?’
죽어가는 자신을 실험체로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쳤다.
“미치겠네, 진짜!”
그사이 반대편에 앉아 있던 인간이 황급히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왔고, 에르제는 오른손을 움직여 그대로 관을 뽑아냈다.
그러고는 가까이 다가오려는 인간을 향해 손을 뻗으며 으르렁거렸다.
“가까이 오지 마!”
하지만 빠져나갈 곳이 도통 보이지 않는다.
정면에 있는 인간을 제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도대체 어디가 문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여기서 더 크게 소란을 일으켰다간 이곳을 지키는 경비들과 맞닥뜨려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눈앞의 인간은 자신을 생포하려는 요량인지, 손바닥을 보이며 식은땀을 흘렸다.
“진정해! 일단 진정하고, 여기 병실이거든? 제발 목소리 좀 낮춰!”
“병실? 병실이라고? 실험실이 아니라?”
“실험실은 또 뭐야……! 아니, 그리고 링거는 도대체 왜 뽑은 거야? 돌아 버리겠네, 진짜.”
말이 통하지를 않는 상황에 에르제와 이윤 모두 극한의 답답함을 느꼈다.
그렇게 이윤이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자, 옆쪽에서 짜증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밤이다, 이눔들아.”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가 침대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천을 걷어 냈다.
“오밤중에 대체 뭣들 하는 거여. 시끄럽게 할 거면 나가서 해, 나가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윤은 연거푸 할머니에게 사죄를 하고는, 에르제에게 바깥으로 나가자고 손짓을 했다.
“은우야, 나가서 이야기하자.”
“방금…… 누구라고?”
자신을 부르는 듯한 그의 말에 에르제가 당황하여 물었다.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다면, 이름 정도는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머리가 냉정을 되찾기 시작하자, 주변의 풍경도 확실히 실험실과는 다르게 보였다.
“누구냐니…….”
그러자 이윤은 그의 모습에서 불현듯 의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기억상실.’
에이, 아니겠지. 설마.
그렇게 생각하며, 이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말이야……. 서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