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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인생-134화 (134/141)

<-- 왜국 정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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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라 강을 바라보고 있는 내 머리에 이런 말이 떠올라 나를 실소 짓게 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새가 울지 않으면 단칼에 죽여 버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떻게 해서든 새가 울도록 만들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끝내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오다는 천하라는 떡을 반죽하고, 도요토미는 그 떡을 맛깔스레 빚어 구웠으며, 도쿠가와는 떡을 한입에 꿀꺽 삼켜버렸다.

이런 말도 이제는 다 나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는 말이 되었다. 이 때 송익필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내게 고했다.

"급보입니다. 각하!"

"무슨 일인데 그래?"

"3월 9일 날 에치고(越後)의 군신이라 불리는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이 사망했다는 보고입니다."

"정보가 좀 늦었군."

"내부 단속이 워낙 철저했던 데다 화장실에서 갑자기 쓰러졌다니, 세작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로서는 잘 된 일이군. 차체에 일군을 보내 아예 항복을 받는 것은 어떨까?"

"그게 좋겠습니다. 북해도에서 운봉의 1개 사단이 내려오기는 하지만, 여기서도 1개 군단을 보내 압박한다면 후계자로 선출된 우에스기 카게카쓰(上杉景勝)가 결심을 굳히는데 더욱 효과적으로 작용할 것 같습니다."

"김여물 사단과 이에야스의 10만 병력을 보내도록 해."

"알겠습니다. 각하!"

송익필이 물러나자 나도 그 자리를 벗어나 다음 일정에 착수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점은 에치고(越後)의 용 또는 군략가로라 불리는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의 여성 설이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시해보면 정말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겐신은 살아생전 여자에 가까이 가본 적이 없다는 점. 이 때문에 체격이 좋은 여자라는 설이 있다. 또 겐신의 사인으로는 일반적으로 뇌출혈이지만, 현대에서 말하는 갱년기장애에 의한 부인병의 일종인 대충(大虫)이라고 기록된 문헌이 몇 개 존재한다.

겐신이 가스가 산성의 뒷간(변소)에서 쓰러졌다는 점, 쓰러진 시기가 음력 3월9일이라는 점, 죽었던 때가 4일후인 13일이라는 점. 향년 49세라는 점도 납득할 수 있다. 전투중과 관계없이 매월 10일 전후에 원인불명의 복통이 발생하고, 병사를 이끌고 방에서 두문불출한다. 매월 반드시는 아니지만, 빈번히 있었다. 이 복통이 생리통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요네자와 번에 설립된 우에스기 신사에는 겐신의 의류가 남아있지만, 그 옷은 진한 적색으로 현대의 시점에서 본다면 남성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또, 겐신이 가부키를 했다고는 말할 수도 없다.

겐신이 쓴 서장 등을 보면, 필체나 표현 등이 여성적인 면이 너무 강해 남자로 생각할 수 없다. 스페인의 곤잘레스라는 사람이 쓴 보고서에는 겐신을 가리켜 '가게카쓰의 백모'라고 기재되어 있다.

당시, 백성들은 겐신에 관해서 '남자에 필적하는 무력무쌍'이라는 노래인 고제노래가 있다.

각지의 하쿠잔 신사의 고신타이는 남녀 한조이지만, 에치고의 하쿠잔 신사만은 말을 탄 여성으로 있다. 더욱이 하쿠잔 신사의 하쿠산토에는 여신상이 있고, 비라는 기가 놓여있고, 가스가 산성 쪽을 향하고 있다.

당시, 여성 성주는 드문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오다 노부나가의 숙모 오쓰야노가타 등이 있다. 여성 성주가 인정되지 않았던 것은 에도 시대에 들어서 무가제법도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세키가하라 전투이전부터 도쿠가와 가문과 대립하고 있었고, 도자마 다이묘로 입지가 약한 우에스기 가문은 대폭 토지가 몰수당했다. 실제 요네자와번 30만 석으로 감봉당했다. 이에 더하여 무가제법도에서 성주는 남자라는 공식에 따라

'겐신 시기에서 가문이 단절되지 않겠나?'

하는 우려 때문에, 겐신이 여성이라는 증거를 처분하고, 무리하게 남성으로 만들 필요가 있지 않았나 하고 생각된다.

우에스기 겐신의 초상화는 수염이 있는 남성이지만, 이것은 에도 시대에 그려진 것이다. 상기와 같이 겐신을 남성으로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여태까지의 것은 처분하고 남성의 초상화를 그렸지 않았나 생각하면, 에도시대의 전까지 초상화가 없었던 점도 납득할 수 있다.

또 이외에도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발각될 우려로 인하여 후사를 낼 수 없어서 누이의 아들인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는 점 등을 꼽고 있다. 아무튼 나는 우리와의 전투에서 피해를 본 왜 측의 피해 상황을 보고 받았는데, 당시의 짧은 접전만으로도 왜 측은 5만 여명이 사망자가 발생했다.

나는 나머지 병력을 논공행상 하듯 나누어 주었는데, 5만 명을 이끌고 참여했던 아케치 미쯔히데에게 5만 명을 떼어주어 10만 명을 채우게 했고, 7만 명을 데리고 참여했던 히데요시에게도 3만 명을 나누어주어 10만 명을 채우게 했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포함하여 세 무장이 각각 10만 명을 거느리게 되었다. 여기에 아군으로 6만 명을 거느리고 참여했던 시코쿠 섬의 조소카베 모토치카도 4만을 떼어주어 10만 명을 채우게 했으며, 시마즈 가문도 10만을 채워주었다.

그러고 나니 오다 노부나가의 병력은 12만 명이 남았다. 나는 히데요시에게 양해를 얻어 그의 군사(軍師)였던 구로다 요시타카(黑田孝高)를 나의 직할 수하로 삼아 2만 명을 떼어주었다. 그러고도 남는 군사 10만 명은 나의 직할 군사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세 무장에게는 지금 현재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지를 그대로 차지하게 했으며, 여타 오다 노부나가 및 이번에 전사한 그에 속했던 무장들의 영지는 몰수해 이 또한 직할 영지로 삼았다.

그리고 나는 교토로 꽃놀이 구경삼아 상경하기 시작했다. 내 휘하 조선 및 왜의 군사 35만에 금번에 항복한 왜 측 무장 중 이에야스의 10만 명을 제외한 25만 명이 교토로 상경하니 가는 곳곳의 소 영주들이 환영을 나와 우리를 접대하기에 바빴다.

이 당시 교토는 오다 노부나가가 점령하여 휘하에 두고 있었던 관계로 별 저항 없이 교토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하긴 지금 이 시점에서 저항을 해보아야 당랑거철의 만용에 불과하겠지만. 그나마도 그렇게 할 군세가 이제 일본 전역에서는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느릿느릿 교토에 입성하는 것을 축하라도 하듯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카게카쓰(上杉景勝)도 항복을 해왔다. 이로써 일본 전토가 내 수중에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직 항복하지 않은 대소 다이묘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속속 이 시각에도 항복을 하고 있는 바, 곧 일본 전토가 평정되지 않을까 싶다.

만약 시세를 잘못 읽고 저항하는 자가 있다면 나의 일군만 보내도 이를 평정하기는 손바닥 뒤집기보다도 쉬울 것이라 생각하고 나는 전혀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항복한 가게카쓰도 곧 교토로 와 나를 볼 것을 강요했으며, 운봉의 1사단은 그대로 북부에 주둔해 있도록 했다.

그 전에 올지 휘하의 1개 사단도 기후성에 머물게 한 바, 이제 일본 전역에는 조선의 5개 사단이 머물며 왜 병들을 상시 감시하게 되었다. 여기에 나는 권율 사단을 교토에 주둔시켜 일본 전역을 감시하는데 일익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는 일본 왕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다가 일왕 일가는 그대로 존속시키기로 했다. 조선왕조의 선조를 그냥 무늬만 살려놓아 양반들의 반발을 잠재웠듯, 일왕 가도 그냥 존속시키기로 한 것이다.

일왕 또한 지금은 아무런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이지만, 미증유의 이 전란 속에서도 일왕이 어느 영주를 지목해 필요한 공물을 요구하면, 이를 거부하는 영주는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그의 후광은 아직도 막강한 바가 있어 공연히 벌집을 쑤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나는 권율을 '간파쿠(關白)'로 삼아 전 일본 영토를 통치하도록 했다. 또 허필량을 참모로 붙여주어 그를 보좌하도록 했다. 나는 대신 '은퇴한 간파쿠'를 뜻하는 다이코(太閤 :태합)가 되었다. 정식명칭 다이코카(太閤下)가 된 것이다. 경칭은 덴카(殿下)로, 직접 부르는 경우에는 다이코덴카(太閤殿下)라고 불렸다.

그리고 나는 이번 일본 정벌에 가장 공이 큰 시미즈 요시히사를 다이조다이진(太政大臣)에, 모리데루모토를 사다이진(左大臣)에, 조소카베 모토치카를 우다이진(右大臣)에 임명하는 등 삼공(三公)으로 삼았다.

그리고 나는 일본에도 개혁정책을 실시하니 다음과 같았다.

우선 나는 농부, 상인, 승려의 무기 사용을 금지하는 가타나가리레이[刀狩令]를 내렸다. 이어 일본 전역에 널려 있는 불필요한 성(城)을 철거시키는 시로와리[城割] 같은 조치를 취했다.

또한 사농공상제(士農工商制)를 도입하여 무사, 농민, 장인, 상인의 계급을 엄격히 구분함으로써 신분 차이를 명확하게 했고, 봉건사회의 신분체계를 확고히 하기 위해 각 계급으로 하여금 도시나 마을에 모여 살도록 했다.

한편 겐치(檢地:토지측량)를 실시해 조세 징수를 고르게 하여 통일정권의 기반을 굳혔으며, 교통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도로검문소를 철폐했다. 또한 광물자원 개발의 장려로 화폐의 주조가 원활해짐으로써 교역이 촉진되도록 했다.

그리고 또 나는 누구나 읽고 쓰고 배우기 쉬운 언문 즉 한글과 조선말을 왜어와 공식문서나 여타 일상생활에서도 병존해 쓰도록 했다. 그리고 나는 여진과 몽골을 거쳐 명나라를 정벌한다는 미명 하에 전 일본 내, 전 대소 영주들의 소집령을 내렸다.

* * *

내 전역의 대소 다이묘들이 모인 자리.

나는 좌우로 길게 늘어 선 그들을 바라보며 위엄 있게 말했다.

"이제 조선과 왜는 둘이 아닌 하나의 관계가 되었다. 조선말과 글을 같이 써야하듯 운명공동체가 되었다는 말이다. 해서 본 다이코는 상국(上國)이라 자처하며 조선과 왜에 한없이 시건방지게 구는 명을 정벌하고자 한다. 그 전에 여진과 몽골을 먼저 점령하여 지리적으로도 유리한 여건을 차지하고, 군사적으로 더한 군사를 얻어내어, 명나라 정벌에 일조하게끔 하려한다."

여기서 말을 끊은 나는 기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장내의 제 다이묘들을 다시 한 번 위엄 있게 둘러보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해서 제 다이묘들은 다투어 군사와 배를 낼 것이며, 다투어 무기를 버려야 할 것이다. 만약 이를 태만히 하는 자가 있다면, 그 가문은 깨끗이 일본의 영토 내에서 지워질 것이다. 내 너희들에게 의무만 지우지는 않는다. 열심히 선봉을 다투어 싸우는 자에게는 이 일본 내만이 아니라, 명나라 내에도 은상으로 봉토를 내릴 것이니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알겠는가?"

"네, 다이코덴카(太閤殿下)!"

나는 이들에게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제공해 이들의 반발심을 잠재웠다. 아무튼 나의 말에 일본 내 제 다이묘들이 깊숙이 부복하는 가운데 나는 권율에게도 명을 내렸다.

"하고 간파쿠는 이들에게 얼마의 군사와 배를 낼 것인지 이 자리에서 그 계획을 받아라!"

"네, 태합 전하!"

권율이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는 가운데 나는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그리고 나는 큰 지침만 내리고 제일 먼저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조선에 돌아와 내가 제일 먼저 행한 일은 명목상의 군주인 선조에게 이를 보고하는 일이었다.

할 일이 없어 후원에서 궁녀들과 주색잡기에 빠져있던 선조가 나의 입궐 소식에 황급히 궁녀들을 물리고, 급거 사정전에 임어하나 술이 많이 취해 몸이 건드렁거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애써 위엄을 갖추어 나를 맞는 선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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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이제 얼마 남지를 않았군요!

^^

지금까지 후원해주신 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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