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국 정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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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인지라 모리 가가 적에 패해 이미 기청문을 작성했다는 소리만 듣고 순순히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기청문은 무효라고 외치며 지금까지 시종 대결 자세를 멈추지 않고 지속해온 그였다. 그런 그의 자세에 힘을 실어준 사람이 있으니,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동시에 이곳에 당도한, 이복동생으로 4남인 호이다 모토키요(穂井田 元清)였다.
그 또한 이곳에서 머지않은 사쿠라오 성(桜尾城)을 지키고 있다가 모리데루모토의 구원 요청에 호응하여 달려와 보니 벌써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다음이었다. 아직 30세로 젊은 나이였지만, 정처가 아닌 첩의 자식 중에는 맏이인 그로서는,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갖고 가문에 기여해왔던지라, 자신의 참여하지 않은 전투에서의 패전은 인정할 수 없다는 패기가 있었다.
이렇게 죽이 맞은 두 사람 때문에 권율은 물론 시마즈의 3만 군사도 비상이 걸려 이곳 벌판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이를 모리데루모토가 중재하나, 고집을 꺾지 않는 두 무장 때문에 지루한 대치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 시점에서 신립 사단이 때맞추어 등장한 것이다.
송익필이 예측하길 모리가의 당주를 패배시켜도 이들이 순순히 복종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곳으로의 파병을 결정했던 것이다. 아무튼 권율이 하루 동안의 긴박한 대치에 화가 나서, 이제는 협상이고 나발이고 막 두드려 부수려 하는 찰나에, 신립 사단마저 등장하니 협상일 가능할 듯해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상황 전개를 지켜보기로 했다.
병력면에서도 이제 역전이 되어 6만 대 5만이 된 양군이었다. 게다가 이들도 귀는 있어 조선군의 화력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에 모리데루모토의 중재에 어린 당대의 가주보다 실질적 주인이라 할 수 있는 깃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는 다시 한 조건을 조선군에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돗토리 성(鳥取 城)의 포위를 풀어달라는 조건이었다. 이에 권율이 신립이 배석한 상태에서 이제 자신의 군사가 된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에게 돗토리 성 전투의 경과를 물으니 다음과 같았다.
1581년 이나바[因幡] 야마나[山名] 가문의 가신단이 야마나 토요쿠니[山名豊國]를 추방한 후에 모리[毛利] 일족인 깃카와 츠네이에[吉川經家]를 세워 돗토리성[鳥取城]에서 반기를 들었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돗토리성 공략에 나섰다.
히데요시는 작전에 앞서 수개월 전부터 돗토리성 주변의 곡물을 시가(市價)의 몇 배에 달하는 비싼 값으로 매입하였다. 한편 진군을 하면서 농민들에게 가혹행위를 하여 돗토리성으로 들어가 돗토리성의 병량을 더 빠르게 소진하도록 했다. 이어 히데요시는 성을 완전히 포위한 다음, 병사들에게는 접전을 벌이게 하지도 않고 보급품이 성내로 들어가지 못하게만 하는 작전만을 펴도록 했다.
모리[毛利] 측은 돗토리성의 고립을 벗어나기 위하여 해상과 육로로 거듭 보급을 시도했지만 히데요시로부터 작전을 위임받은 명 군사, 구로다 요시타카(黑田孝高)의 치밀한 방어망에 걸려 모두 실패하였다.
벌써 포위된 지 90일.
성 내부에서는 군마가 굶어 죽어가고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는 영양실조로 장님이 된 사람이 생길 정도가 되어, 반란을 일으킨 모리[毛利] 가는 최악의 상황에 처해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명장이라는 깃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도 군량 반입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를 했다.
이에 모토하루는 아예 이를 운용하는 괴수를 타격하고자 한창 다카마쓰 포위전을 전개하는 히데요시에게 달려가다가, 모리가의 위험을 알고 이곳으로 방향을 돌린 상태가 지금까지의 상황전개였다.
고심하던 권율은 곧 두 무장의 이를 타개해주면 신속하겠다는 기청문을 받고 돗토리 성을 탈환해주기로 했다. 대신 두 무장도 참여해야 된다는 조건을 달았기 때문에, 이들 두 무장도 출전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모리데추모토도 출전해야한다고 주장하니, 모리가의 당대 가주 역시 울며 겨자 먹기로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대 가주를 끌고 가는 마당에 이제 성이야 있으나 마나라고 판단한 권율은 신립 사단마저 이 작전에 참여를 요청했다.
선임 군단장의 말을 특별한 이유 없이 거절할 수 없게 된 신립이 이에 순순히 동조했고, 이 사실은 도사 해안에 머물고 있던 이순신 함대에도 통보가 되었다. 이에 이순신도 이들의 바다를 통한 지원과 보급을 막기 위해 오다 노부나가의 수군 견제에 나섰다.
이로 인해 바야흐로 국지전투가 대전투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권율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동쪽에서 서쪽해안으로 동서를 가로지르는 행군을 하고 있다는 소식은 곧 세작들에 의해 곧 오다 노부나가에게 보고가 되었고, 노부나가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다카마쓰 성을 공력하고 있던 히데요시에게도 이 전투에 합류하라는 지침을 내리는 외에도, 비교적 가까운 곳인 단바 국(丹波 国)에 영지를 가지고 있던 아케치 미쯔히데에게도 참여를 명했다. 자신 또한 군사를 긁어모아 교토(京都)에서 돗토리 성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이렇게 양군이 군세를 증강하는 가운데 제일 먼저 서전을 장식한 것은 이순신 함대였다. 군량을 지원하러 가던 오다 노부나가의 함대를 운 좋게 해상에서 만난 것이다. 800여 척이 대 선단을 이루어 돗토리 성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이순신 함대가 돗토리 해안에 막 도착한 시점이었다.
이순신의 망원경에 '천하포무(天下布武)'라고 선명하게 쓰인 수많은 깃발이 눈에 띈 것은, 시간적으로 해가 한창 중천에 따서 차가운 해풍을 어느 정도는 상쇄시켜 주고 있는 정오 무렵이었다.
당대 일본에서 무(武)로써 천하를 뒤덮겠다고 외칠 사나이는 오다 노부나가 밖에 없었다. 그 만이 당돌하게도 이런 뜻을 깃발에까지 내걸고 천하에 선전을 해오고 있어, 그의 문장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글귀였다.
망원경에서 눈을 뗀 이순신은 곧 예하 함대에 전투 명령을 발했다. 각 병사들이 각자의 위치로 가 전투 준비를 완료하고 이순신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 것도 모르고 연안을 따라 항해하던 오다 노부나가의 수군이 이순신의 대형함대를 발견한 것은, 애석하게도 그들이 아군 함포의 사정권에 든 다음이었다.
"방포하라!"
"방포하라!"
저들이 설령 오다 노부나가가 아닌 다른 영주의 수군이라도 왜의 수군이라면 다 멸해야할 존재로 보고 있는 이순신에게는 돌아볼 여지가 없는 단호한 명령이었다.
볼 것도 없다는 듯 단호한 이순신의 명령에 아군의 대포와 신기전이 맹렬한 화력을 뽐내는 가운데, 일자진(一字陣)에서 느슨했던 그물을 조이듯 서서히 적을 압박하는 학익진(鶴翼陣)으로 함대 진형이 바뀌어도 맹폭은 계속되고 있었다.
자신들이 지닌 무기의 사정권 밖이라 변변히 저항한 번 못하고 적선이 서로 달아나려 아우성을 치나 군량조차 잔뜩 실린 왜의 군선들은 굼뜨기 짝이 없었다. 여기에 더욱 불행한 것은 바람마저 북풍(北風)이라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적이 있는 남쪽으로 계속해서 배가 떠내려간다는 사실이었다.
이순신 함대의 계속되는 포격전에 온통 한낮의 바다는 화광이 충전하고 매캐한 화약연기는 물론 시체와 부유물 그리고 비명 소리로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연출되고 있었다. 적선의 1/3 쯤을 부수고 나자 이순신의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군량(軍糧)'이라는 생각이었다.
사실 아군은 제대로 된 병참선을 유지할 수가 없어서 항상 식량이 달랑달랑한 상태였다. 총리의 지시로 현지조달의 원칙이 정해지자, 아군은 적을 멸하지 않으면 굶어죽어야 하는 다급한 처지에 항상 노출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었다.
"적선을 나포하라!"
바늘에 꿰인 실처럼 적선을 나포하면 자연스럽게 그 안에 실린 군량과 적병은 딸려오게 되어 있었다. 이를 잘 아는 이순신으로서는 별도의 다른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이에 따라 아군 함정은 점차 속도를 올리며 적선에 가깝게 접근했다. 그러자 이제는 천보총과 화차, 비격진천뢰, 각종 총통 류를 비롯해 경화기들이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웬만한 집안의 기둥 굵기 만한 장군전의 활약도 대단히 컸다.
아무튼 총성과 비명이 난무하는 속에서 적선은 하나둘 바다로 수장되거나 반파 또는 완파되었으며 일부는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신속한 백기를 내거는 군선들이 생겨났다.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법. 항복의 의사를 표현한 배에는 적의 사격이 가해지지 않는 것을 발견한 노부나가의 수군에게 들불처럼 번지는 것이 있으니 백기 투항이었다.
그로부터 채 반 시진이 지나지 않아 바다는 평온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아직 화광이 충천하고 비명과 신음 소리 바닷바람을 잠재우고 있지만, 곧 해풍이 달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릴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로부터 바다가 완전히 평온을 되찾은 것은 이순신 함대의 유도에 따라 적의 항선 전부가 돗토리 만에 정박을 하고, 배에서 내린 왜의 수군들이 장관을 이룬 사구(砂丘) 곁 백사장에, 열과 오를 지어 정렬을 마친 순간이었다.
일부 구조된 부상자들마저 들것이 실려 맨 후미에 정렬된 상태에서 아군 병사들이 곧 인원을 파악하니 온전한 자가 27,450명 부상자가 1,275명이었다. 적선은 모리 가의 수군보다 배가 많았으나, 포로의 숫자가 비슷한 것은 아마 군량을 많이 실은 관계로 전투요원이 덜 승선해서 인 것 같았다.
아무튼 이순신이 이들의 점고를 끝내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때였다. 사구 너머 수많은 왜병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직 아군의 육군은 도착하지 않았고, 이는 필시 성을 포위했던 군사의 일부일 것이라 판단한 이순신은 곧 명령을 내렸다.
"모두 포로들을 이끌고 각자의 함대에 승선하라!"
"승선하라!"
부하들이 일제히 복창하며 아군 한 명이 두 명을 휘몰아 썰물처럼 바다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에 박자를 맞추어 함대에 남아있던 아군 병사들이 원거리 포격을 개시하니, 생전 처음 들어보는 천지를 떨어 울리는 굉음에 달려오던 적들의 기세가 주춤했다. 아니 일부는 납작 엎드려 전진을 하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자 4인 교자에 앉아 이를 지휘하고 있던 지휘봉이 그런 자들을 가르켰고, 그런 자들에게 상관들의 심한 매질이 시작되었다. 이순신은 이를 빙긋 웃음으로 지켜보다가 유유히 함선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군 육군이 올 때까지 바다에 머물며 기다렸다. 우세한 화력을 지녔지만 만용을 부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항상 신중하게 작전을 운용하는 이순신다운 태도였다.
그로부터 5일 후.
고대하던 아군의 육군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적들도 속속 증원군이 모여들어 돗토리 성은 일대 피바람을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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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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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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