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국 정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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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권율로부터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전령을 맞은 운검은 곧 작전회의를 개최하여 도해(渡海)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시모노세키의 도해에는 이순신 함대는 물론 나포한 모리가의 수군 전력 그리고 자체 수군 전력을 총동원하여 일제히 도해하기로 했다.
그래도 한 번에는 모든 병력이 전부 도해할 수는 없으므로 제1진으로 오토모 소린의 3만 병력이 도해하고, 2진으로는 좀 더 늘어난 요시히사의 병력 5만과 히고의 병력 1만 명을 두 차례로 나누어 도해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검과 운곡의 1만5천 조선군이 도해해 항구에 집결을 마치니, 총 병력 10만 5천의 대병이 되었다. 그러고도 히젠 병력 1만, 지쿠고 병력 1만, 지쿠젠 병력 1만 등 총 3만이 아직도 기타큐슈에는 남아 있었다.
이순신 함대를 비롯한 제 함대는 작전 계획에 따라 이들 3만 병을 다시 승선시켜 이번에는 모리가의 거점 도시인 히로시마(廣島)로 향하였다. 이들을 항구로 상륙시킨 이순신 및 그 함대는 다시 시모노세키로 돌아와 권율 부대를 싣고 히로시마로 상륙시켰다.
그러니까 모리 가는 지금 북상하는 적과 자신의 거점으로 쳐들어오는 적 두 갈래의 적을 맞게 된 것이다. 이때 이억기 함대는 제2차 원정군인 신립 부대 1개 사단을 싣고 부산포에서 출항하는 중이었다.
한편 자신의 거성인 요시다 고리야마 산성(吉田郡山城)에서 적의 침입 사실을 보고 받은 모리가의 당대 가주 모리데루모토는 자신의 4촌이자 책사인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를 불러들여 상의를 하였다.
올해 22살로 전형적인 무장인 아버지와 달리 선은 가늘지만 책략에는 일가견이 있는 깃카와 히로이에는, 초조함을 금치 못하고 연신 자리를 왔다 갔다 하는 모리데루모토와 달리, 차분한 안색으로 진언을 하기 시작했다.
"빗추에 있는 불패의 명장 둘째숙부 깃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님을 속히 불러올리시고, 북상해오는 적은 셋째 숙부 고바야가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으로 하여금 막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신 안인 것 같습니다."
"그래? 당장 전령을 보내 그대로 행하고, 이곳을 막을 준비를 해야겠다. 적세가 총 얼마라 하더냐?"
"이곳으로 쳐들어온 적은 이차 집결 군까지 총 4만5천명 정도이옵고, 북진하는 적은 10만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네 말로는 둘째 숙부가 원군을 이끌고 올 동안 이 성에서 수성 전을 하자는 것으로 들리는데, 내 말이 맞느냐?"
"네. 그렇습니다. 당주님! 그동안이면 소식을 들은 다른 곳에서도 구원 병력이 도착하겠지요."
"흐흠..........!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으니 네 말대로 하자꾸나. 그러나저러나 우리와 교전중인 히데요시 군과는 어떻게 대처하지?"
"다카마쓰성(高松城)의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清水宗治)가 아직은 잘 버티고 있으니, 그대로 두는 수밖에 더 있습니까?"
"5천 대 3만으로 불리하지만 당분간은 어쩔 수가 없겠구나."
"그렇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한창 수성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 이 시간 권율 또한 규슈의 세 무장을 맞아 논의가 한창이었다. 지쿠젠의 아키즈키 다네자네(秋月種実), 지쿠고의 쓰쿠시 히로카도(筑紫広門), 히젠의 다카하시 쇼운(高橋紹運) 등의 면면을 살펴보던 권율이 입을 열었다.
"여기는 적진이요. 적의 증원 군이 오기 전에 속전속결을 합시다."
"옳으신 생각이십니다. 산성 공략은 우리가 앞장을 설 테이니, 후방의 지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이오."
다카하시 쇼운의 말에 권율은 곧 찬동하고 내일 새벽을 기해 일제히 공략을 시작하기로 했다. 회의를 마치자 권율은 세 사람을 대동하고 적정을 살피기 위해 나섰다.
모리데루모토가 머물고 있는 요시다 고리야마 산성(吉田郡山城)은 에노가와 강과 다지히 강이 흐르는 요시다 분지의 북쪽에 있는 고리야마 산에 축조되어 있었다. 모리 가문이 히로시마 성으로 자리 옮기기 전까지 사용된 거성으로, 석벽 등을 사용한 근세 성곽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망루 등이 혼마루에 건립되어 있었지만, 천수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산이 경사가 크게 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법 높은 산에 건립되어 있어 공략이 쉽지만은 않아 보였다. 권율이 가만히 가늠해보니 평지에서 망루와 석벽 등이 대포나 신시화전의 사거리에 들까말까 하였다.
이에 권율이 세 무장을 둘러보고 말했다.
"내일 1차로 우리의 화력으로 공격을 해보고 미치지 못하면 좀 더 높은 곳에 타격점을 마련해보십니다. 사거리에 들기만 하면 저까짓 성 정도 부수는 것이야말로 여반장이니, 병력을 좀 지원해주시오."
"알겠습니다. 장군님!"
이렇게 모든 논의가 끝나자 아군은 곧 부대로 복귀하여 내일의 전투에 대비하여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취침한 관계로 새벽부터 일어나 주먹밥 하나로 때운 전 병사들이 먼동이 터올 무렵에는 산성 공략을 시작했다. 먼저 대포와 신기전으로 적의 성루와 문을 공격하였으나, 일부는 맞았지만 일부는 못 미쳐 떨어졌다.
이에 권율의 지시로 2만 병력은 그대로 산성을 향해 기어오르고, 권율 부대를 비롯한 일만의 병력은 산의 3부 능선쯤에 평탄지를 조성하여, 대포 등 각종 화기가 자리 잡고 쏠 수 있는 진형을 만들었다.
그간 1만5천의 성내 군사와 아군 간에 교전이 벌어졌지만, 아군은 권율의 지시로 적이 치고 나오는 것만 경계할 뿐 열심히 싸우지는 않고 있었다. 이윽고 반나절 만에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다시 대포와 함께 신기전이 발사되기 시작했다.
24문의 대포와 24대의 화차에서 일제히 신기전이 발사되자,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적의 성 남쪽 성문은 물론 곳곳에 설치된 망루 때로는 성벽이 터져나가며, 근처에 있던 자들은 폭사되어 하늘로 비산시키고, 다치지 않은 자들조차도 놀라, 성벽에 다닥다닥 붙어 귀를 틀어막고 대가리를 처박고 있었다.
와아...........!
이 모양에 사기충천한 3국의 병사들이 성을 향해 일제히 돌진을 감행하는 가운데, 신기전 또한 하늘 높이 불꽃을 피워 올리니, 성 내부의 가옥에도 불이 붙어 적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제멋대로 대응에 나섰다.
일부 정신을 차린 적군이 아군을 향해 조총과 화살로 대응하는 가운데 일부는 불을 끄러 달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도 적의 반 수 정도는 아직도 뭐가 뭔지 정신을 못 차리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에 성중에 남아있던 모토나리의 9남이자 현 당주의 숙부 되는 14세의 홍안소년 모리 히데카네(毛利秀包)가 악을 쓰며 전투 지휘를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벌써 아군의 일부는 파괴된 성문 안으로 난입해 적들과 창칼을 겨루고 있었다.
이 숫자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많아지는 것에 비례하여 아군의 개인화기 부대도 속속 산을 기어올라 전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천보총과 비격진천뢰가 곳곳에 터지고 쏘아지자 적은 더 견디지를 못하고 안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 시진이 더 흐르자 적은 물이 잦아드는 저수지의 물고기 마냥, 내부에 축조된 작은 이차 산성으로 모여들었다. 이쯤에서 권율은 항복을 권유해보기로 하고, 지략과 용맹을 함께 갖춘 히젠 국의 장수 다카하시 쇼운(高橋紹運)을 항복을 권하는 사절로 적진에 파견했다.
원래 다카하시 쇼운(高橋紹運)은 히젠 국이 아니라 오토모 소린의 가신이었다. 그러나 그가 원체 유명한 무장이라 히젠 국뿐만 아니라, 이곳에 파견된 3국의 으뜸 장수로서 파견되었고, 이런 일화가 있는 사람이었다.
덴쇼(天正) 6년(1578년)에 미미가와 전투(耳川の戦い)에서 오토모 가문이 시마즈 가문에게 대패하여 오토모 가문의 세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히젠의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와 지쿠고의 쓰쿠시 히로카도(筑紫広門), 지쿠젠의 아키즈키 다네자네(秋月種実)등이 오토모 가문의 영지로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때 소린은 휴가와 지쿠고 방면에서 시마즈 군은 물론 류조지 군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원군을 보내지 못하여, 쇼운이 지키는 지쿠젠은 적대 세력 한복판에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쇼운은 도세쓰와 협력하여 아키즈키 다네자네와 지쿠시 히로카도 등을 보란 듯이 격퇴하여 뛰어난 지략과 무용을 과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쇼운은 이곳에 파견된 장수들과는 숙적관계였으나, 시미즈 군에 항복한 이래로 한편이 되어 참여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쇼윤을 보내고 적의 대답을 기다라는 동안에도 권율은 긴장을 풀지 않고 경계에 만전을 기하는 한편, 여차하면 다시 공격할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반시진이 흐르자 모리 가문의 당주 모리데루모토는 현 모리 가문이 지배하고 있는 영지의 절반을 할양하면 항복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권율은 즉각 거부를 하며 현 이들이 위치한 아키 국(安芸国)만을 영지로 제공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모리 가문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에 다시 쇼운이 밤새 드나들며 협상을 벌인 결과, 현재 모리 가문이 차지하고 있는 전체 영지의 1/4에 해당하는, 3국만을 그들의 영지로 인정하되, 인질과 함께 우리의 전쟁에 종군하는 조건을 승낙 받았다.
그 3국은 현 모리 가문의 본성이 위치하고 있는 아키 국(安芸国)과, 그 위의 빈고 국(備後国), 빈고 국 위의 북쪽 빗추 국(備中国)이 이에 해당되었다.
빈고 국(備後国)은 산요도에 위치한 일본의 옛 구니로, 현재의 히로시마 현 동부에 해당하고, 아키 국(安芸国)은 현재의 히로시마 현 서부에 해당한다. 또 빗추 국(備中国)은 현재의 오카야마 현 서부에 해당하여 오다 가문의 무장 히데요시와 싸우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빗추 국(備中国)을 할양지에 넣음으로써 모리 가문은 자연스럽게 싸움에 가담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적들은 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작전을 구사하려 했지만 권율은 이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밤중이라도 공격을 개시하여 성 전체를 개미새끼 한 마리 남겨놓지 않겠다는 거듭된 협박에 큰 고생을 모르고 자란 모리데루모토가 굴복한 결과물이었다. 아무튼 이로서 성문이 열리고 적들과 마주하게 된 권율은 이들에게 한 가지 기분 좋은 소식도 전했다.
적과 대진하고 있는 다카마쓰성(高松城)의 포위를 풀어주겠다고 다짐한 것이었다. 이어 권율은 곧장 인질을 요구했다. 그러나 모리데루모토에게는 아직 아들이 없어, 양자로 입적시킨 올해 3살 난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와 함께 전투를 실제로 지휘했던 14세의 숙부 모리 히데카네(毛利秀包)를 인질로 제공했다.
이에 권율은 한 가지 청을 더하여 가문의 책사인 22세의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를 자신의 사단에 출사시키기로 했다.
모든 것이 정리되자 권율은 전 모리 가문의 영지에서 전투 행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모리데루모토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전 영지에 파발마를 띄우지 않을 수 없었다. 권율이 보기에 모리데루모토는 모리 가와 같이 드넓은 영지를 관리할 인물로는 어딘가 부족해 보였다.
주변의 말을 종합해보면 유약한데다 술을 폭음하는 날이 많고, 소심한 성격으로 쉽게 말하면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느긋한 면도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이 시대를 일본 역사물에서는 대개 평범한 무장으로 그려진다고 한다.
아무튼 적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권율은 한시도 긴장을 풀지 않고 산성에 주둔해 있었다. 그렇지만 만일에 대비해 히로시마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이순신에게는 이 소식을 알려 철수해도 좋다는 통보를 보냈다.
이에 이순신은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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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감사, 감사드리고요!
^^
늘 행복한 날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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