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실질적 왕이 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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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결에 호랑이 등에 올라타기는 했지만 앞으로의 일이 걱정입니다. 입 달린 양반들은 다 한마디씩 한다고 상소를 올릴 테니, 심히 우려스럽지 않을 수가 없사옵니다. 이들을 전부 잡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느 역사에서든 기득권층의 가진 것을 내려놓게 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지요. 이를 관철시키느냐 못시키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개혁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하니 어떤 상황이 도래하더라도 굳세게 마음먹고, 오로지 백성들을 잘 살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한 줌 밖에 안 되는 썩은 무리들을 대처해 나갑시다."
나의 말에 모두 열기는 띠었으나, 한 가지 수심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내 측근들이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조의 유대감께서는 인천에서 한양에 이르는 기차의 개통시기를 더욱 앞당겨, 백성과 제 관료들의 시선을 일제히 그쪽으로 유도해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병조 정 대감께서는 군무(軍務)를 정비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는 개혁안을 많이 제출해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사옵니다. 영상대감!"
"하고 호조의 이 대감께서는 아직도 경기도 일원에만 실시되고 있는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민원의 발생 소지를 줄이고, 균역법을 실시하여 조세제도를 일신하는 기회로 삼아주세요. 그리고 이조의 성 대감께서는 조선팔도 329개 외방직에 기존의 판관(判官)말고, 일개 판관 직을 더 신설하여, 기존의 외방관원을 감시하고, 행정을 보좌할 수 있는 제도를 기안해주시오."
"예조의 김 대감께서는 기존의 향교 외에 전 양인(良人)들의 자제가 입학하여 배울 수 있는 학교를 세우는데, 얼마의 예산이 소요되는지 검토하여 주시오. 하고 두 당상은 우리의 정책을 반대하는 자들의 투옥에 주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
"명심하겠사옵니다. 영상대감!"
나는 이들의 대답을 들으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잔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들을 보내고 이어 조보를 발행하고 있는 세 사제를 사랑채로 불러들였다. 하항(河沆), 정구(鄭逑), 최영경(崔永慶)이 그들이었다.
"어서 오시오! 사제들!"
"격조했습니다. 사형!"
막내사제 최영경의 말에 내가 대소하며 말했다.
"하하하........! 너무 외방을 떠돌다보니 그렇게 되었소이다만, 내 그래도 한시도 사제들을 잊어본 적이 없어요."
"그저 고마울 따름이옵니다. 사형!"
나는 사제들의 대답을 듣고는 갑자기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타계하셨어도 아직 영전에 향 한 자루 피워 올리지 못했으니........"
"그게 어찌 사형의 잘못이겠습니까? 연길 위로 나가계시니 어쩔 수 없으셨겠지요."
나는 하항의 말에 고개를 설레설레 지으며 말했다.
"다 이 사형의 정성이 부족한 탓이외다. 아무튼 사제들이 용서하시고, 오늘은 모처럼 사제들을 만나 회포도 풀고, 드릴 말씀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청했소이다."
아무리 사제들이라 하나 나보다 다 연배가 위이다보니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말씀하시죠. 사형!"
내가 잠시 말을 끊고 하나하나에 시선을 맞추자 부담을 느낀 듯 정구 사제가 말했다.
"조보를 발행하는 사람들이니 내 소식을 들었을 것이오."
"얼마나 엄격히 궁문이 통제되는지 정확한 소식을 얻지는 못했사옵니다. 사형!"
최영경의 말에 내가 정언신의 일부터 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자초지종을 언급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길, 내 본의가 아니었음을 누차 말했다. 그리고 이제 기호지세라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것까지 아주 소상히 밝혔다.
"공감이 갑니다만 이 땅의 사대부들이 문제가 아닐 런지요."
정구의 말에 내가 답변을 했다.
"그래서 내가 사제들을 청한 한 이유기도 하오."
이렇게 운을 뗀 나는 다시 한 번 사제들을 세밀히 살펴보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제 우리가 언로(言路)를 장악할 필요가 있어요. 해서 내가 주상께 각재(覺齋)와, 수우당(守愚堂) 사제를 각각 대사간과 대사헌에 추천할 테니 그런지 아시고, 두 기관을 완전 장악해 주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조보를 통한 선전전이오. 매일 우리의 입장을 개진하고, 발호하는 사대부는 그 비위 사실이 있으면 조보에 자세히 게재하여 그 가문에 아주 먹칠을 하시오. 이런 면으로 보면 괴은(乖隱) 사제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어요."
나는 나의 말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정구 사제를 직시하며 목소리 하나하나에 힘을 주었다.
"해서 나는 조보의 발행을 10일 간격에서 5일 간격으로 발행하는 것으로 했으면 하오. 그리고 내 이것은 주상의 윤허를 얻을 테니, 이제는 활자를 이용한 인쇄로 가급적 발행 부수를 늘려야겠어요. 여기에 한자를 가급적 줄이고 언문으로 표기하여 언문의 보급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함으로써 궁극에는 아녀자들이나 글이 짧은 사람도 볼 수 있게끔 하는 게 좋겠습니다."
"취지는 공감하지만 양반 식자층의 외면을 받지는 않을까요."
"궁극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된다는 것이고, 처음에는 어려운 한자에 토를 다는 식으로 서서히 잠식을 해야지요."
"알겠사옵니다. 사형. 아니 영상대감!"
"하하하........! 우리 사이에 뭔 호칭이 중요하겠습니까? 이제 각자 맡은 일에 정진해주시고, 자, 오늘은 이쯤하고 술이나 즐겨봅시다."
"사형은 전주가 있는 가 있는 것 같은데, 말술은 여전하신가 봅니다, 그려."
각재 하항의 말에 나는 빙긋이 웃는 것으로 답변을 하고 술잔을 들어 올려 사제들에게 술잔 들기를 거듭 청했다.
이튿날.
나는 선조 균을 만나 뵙고 최우선적으로 어제 사제들과 나눈 이야기를 처리했다. 그 결과 나의 진언대로 인사가 이루어짐은 물론 '한양순보'에서 '한양신보(漢陽新報)'로 개명한 조보가 5일 간격으로 발행되게 되었으며, 또한 인쇄를 통해 대량 발매의 길을 열었다. 인사 건을 적시하면 아래와 같았다.
홍문관 대제학: 이발(李潑)
대사간: 하항(河沆)
대사헌: 최영경(崔永慶)
조보: 정구(鄭逑)
다음 날은 경연장에서 선조 균의 입회하에 전 의정부 고위직은 물론 육조판서까지 참석한 가운데 본격적인 개혁정책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신이 생각하옵건데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는 폐단이 여전히 많이 존재하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논쟁이 끊이지 않고, 전혀 그렇지 않은 사안도 있사옵니다. 오늘 그 문제를 실무를 담당하는 각조에서 제기할 것이오니, 이 자리에서 논해주시고, 가부를 결정해주셨으면 더한 바람이 없겠나이다. 그럼, 먼저 어느 조부터 의견을 개진하겠습니까?"
"신부터 아뢰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꺼내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나로부터 국방개혁 안을 제시 받은 정인홍이었다.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직을 수호하기 위한 국방을 개혁하는 일입니다. 근자 들어 왜구의 침탈이 주춤해졌으나 이는 근본적으로 치유된 것이 아니옵고, 소신이 살펴본 바로는 당금 왜는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나타나 백년 전쟁이 종식되고 있는 상태이옵니다. 이들의 내전이 끝나면 그 많은 무사계급이 왜 자체의 안정을 저해할 것으로 보고, 이를 조선 출병으로 해결할 것이 소신은 확실하다고 봅니다. 또 여진족 역시 당금 영상의 진무로 두만강 변은 해결이 되었사오나, 압록강변의 여진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 북방을 괴롭히고 있사옵니다. 결국 남왜북로(南倭北虜)의 화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국방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사옵니다. 헌데.........."
여기서 일단 말을 끊은 정인홍의 말이 이어졌다.
"오군영과 진관체제는 허물어진지 오래이옵고, 지난번 군포론으로 사인(士人) 층까지 시행되었던 2필의 군포납부마저 흐지부지되고 말았지 않았사옵니까? 이 모든 것을 해결할 방법으로는 오군영체제를 부활시키는 것은 물론 지방에도 유사시에 대비한 군대를 둘 필요가 있다고 소신은 생각하옵니다. 해서 소신은 가장 중요한 한양의 방어만이라도 우선 시행하기 위해, 훈련도감이라는 것을 창제하여 지속적으로 신병들을 훈련시켜 충원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이들은 또한 상시 군이 되어야만 국방에 전념할 것인즉, 나라에서 녹봉을 지급해야만 하옵니다."
"그 방법으로 저는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제기합니다. 백미 80석을 나라에 헌납하는 자는 사인(士人)이 될 수 있게 하고, 또 3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는 자 또한 서얼은 사인이 되어 과거를 볼 수 있게 하고, 사천(私賤)은 양인으로 신분상승을 꾀하게 끔 해야 부족한 자원과 재정을 확보할 수 있다고 봅니다."
"병판, 잠시 만요."
이때 제동을 걸고 나오는 자가 있으니, 우의정 노수신이었다.
"지금 서얼허통 문제를 다시 제기하시는데, 그 문제는 선대 대왕 때 이미 논의가 이루어져 경국대전에도 명확히 명시가 되어있질 않소. 이 문제를 오늘 또 다시 제기한다는 것은 찬반논쟁에 또 다시 불을 지피는 것으로, 국사에 전혀 도움이 되지를 않아요."
"결코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판단이 되면 얼마든지 제기하여 바로잡아야 된다고 봅니다. 상국으로 섬기는 명국에도 없는 법률을 유독 조선만 제정하여 사족의 반에 해당하는 인재 층을 매몰시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큰 손해라고 봅니다."
정인홍의 반론에 또 다시 노수신이 반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병판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나 이는 첫째, 존비(尊卑)의 등급을 엄격히 해야 할 필요성이 있어 명문화 된 것이고, 둘째, 선왕의 법을 지켜야 하며, 셋째, 이들을 등용하면 명분이 문란해져 체제마저 문란해질 우려가 있어, 지금까지 금하고 있는 것 아니오?"
정인홍이 또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선왕의 법이라 하셨는데, 그럼 왜 병축(幷畜:처나 첩을 여러 명 두는 일)은 지켜지고 있지 않으며, 선왕 때의 법이라는 것도, 전 대왕인 명종대왕 때 '자손(子孫)' 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 것을, 새롭게 주해(註解)하여 자자손손으로 바뀌었지, 언제부터 서얼들을 그렇게 가혹하게 대했습니까?"
정인홍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대명률(大明律)에도 첩을 여러 사람 두는 사람은 장형을 가하게 되어 있어, 아국도 이를 국초에는 실행했던 바, 지금은 아예 사문화되어 지켜지지 않고 있고, 또 <경국대전〉법전에 실린 내용은 '재가(再嫁)하거나 실행(失行:정조를 잃는 행위)한 부녀의 자손과, 서얼자손은 문과의 생원시, 진사시에 응시하지 못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법전 안에 한품서용(限品敍用:제한된 품계로 등용하는 것)에 관한 내용도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 청요직은 금지하더라도 여타 관직으로의 진출은 허용해야 된다고 봅니다."
둘의 논쟁이 계속되자 내가 끼어들었다.
"이 문제가 논쟁거리로 지속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이 제도의 수혜를 받는 기존 양반층이 재산의 상속문제라든가, 관직에 나갈 기회에서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자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로 인해 조정은 그만한 인재 층을 잃게 되고, 서얼들의 집단 상소를 제기케 해 정무를 오늘과 같이 격론의 장으로 몰고 가는 것은 물론, 국방력 또한 그들의 배제로 약화되고 있질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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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
늘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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