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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인생-91화 (9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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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예로운 자리에 선발된 그대들에게 일단은 축하를 드리오."

나의 말은 이들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썰렁 그 자체였다. 영문을 몰라 사약이라도 받은 듯 국외 추방을 당하는 마당에 축하라니, 이들에게는 가당치도 않을뿐더러, 이를 추진하는 수괴인 나를 내심 극도로 증오하고 있을 판에, 이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심하게 말하면 비아냥거림으로 들렸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할 말은 해야 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여러분들은 고토 수복을 위한 환상의 조합이오. 이중에는 문에 뛰어난 자들고 있고, 무에 발군의 역량을 지닌 자도 있소. 본 의빈은 여러분의 역량을 높이 사 상감께 특별히 주청을 드려 선발한 바, 자부심을 가져도 좋소. 그렇지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새로운 봉작령이다보니 주거시설이나 모든 환경이 미비하다는 점이오."

"비록 처음이라 모든 것이 부족하고 불편하겠지만 본 의빈은 여러분의 손에 의해 꼭 해동성국(海東盛國)의 꿈이 재현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 인사말은 이것으로 가름하고 앞으로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함께 할 선배요, 동료요, 부하들이니 서로 통성명을 하시오."

그리고 나는 슬쩍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러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이에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니 앞으로 여진인과 부딪칠 일이 비일비재할 텐데, 언어 소통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을 간과했다.

그래서 나는 그 이튿날 바로 궐로 쳐들어가 만주어를 잘 아는 역관 10명을 떼를 써서 얻어냈다. 이들 또한 가족들과 함께 추방령이 내려져 나와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어 대충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하여, 나는 이들을 데리고 일단은 비금도 내려가려 하는데, 의도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들었는지 몰라도 내 사형되는 정인홍과 사제 김우옹이 함께 가겠다고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만부득이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얼마나 급했는지 가족은 추후에 데려가기로 하고, 단신 자신들만 배에 승선했다.

내가 조보 발행이 걱정되어 물으니, 남은 두 사제들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이들의 답변에 나는 조금은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비금도에 도착한 날이 1572년 2월 초아흐레였다.

이곳에서 선진문물을 견학한 내가 뽑은 인사들은 처음과 달리 모두 눈에 생기가 들고, 행동은 활기차졌다. 또한 자긍심이 충만하여 매사에 의욕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세월은 흘러 내가 제1진으로 보냈던 탐사대원들이 돌아왔다.

나는 이들에게 보고를 받고 1차 이주 대상자를 뽑았다. 내가 뽑은 전 문무 관료들은 물론 우리에게서 핵심 역할을 하는 모든 인재들이 1차 이주대상자에 포함되어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민들은 목재 채취와 부가 노동을 제공하던 자들이 제1진으로 선정되어 흥개호(興凱湖) 주변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제1진중에서도 선발대라 출발한 것은 남녘에 봄바람이 살랑대는 삼월 초하루였다.

제 1진에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순신 연대 2,00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순신 함대의 호위를 앞뒤로 받으며 일로 동해바다를 북상해, 우리가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도착한 것이 3월 4일이었다.

즉시 차례로 하선한 우리는 다시 이순신 연대의 호위를 받으며 계속하여 북상을 했다. 그러나 가는 내내 모든 사람들이 추위에 떨어야 했다. 아직 이곳은 겨울의 끝자락으로 곳곳에 잔설이 남아있었고, 바람도 매우 찼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를 미리 예상하고 두꺼운 겨울옷을 준비해라 했건만 내 말을 제대로 실천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 몸을 웅성거리며 북으로, 북으로 행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흥개호 남쪽에 도착한 것이 삼월 열사흘 날이었다.

흥개호(興凱湖) 일명 싱카이후라는 호수.

연해주 지방에 있는 호수로서 대, 소 2개의 호수로 이루어져 있고, 총면적 4,556 평방킬로미터에, 최대 수심 10여 미터, 평균 수심 4~5미터. 대흥개호는 남북 90 킬로미터, 동서 60 킬로미터, 둘레는 400킬로미터로 바다처럼 거대한 호수는 아직 결빙되어 있었다.

얼음낚시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지금 이렇게 한가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머리를 저었다. 우선 사람이 살 수 있게끔 거주지부터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기존의 거주하고 있는 조선의 백성들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본 조선의 최대 곡창지대는 전라도가 아닌 함길도라고 보고한 사례도 있다. 이는 이 흥개호 부근에 조선 백성들이 이주해 많은 농사를 지었다는 방증이었다. 그 말을 실감 할 수 있게끔 우리가 자리를 잡으려 하는 호수 남쪽에도 이미 많은 조선 백성들이 이주해와 터전을 잡고 있었다.

이게 가능한 것이 흥개호는 내몽고와 만주 평원 일대에서는 이렇게 거대한 호수 치고 유일하게 염호(鹽湖)가 아닌데다 물속에 영양분이 많아서 고기는 물론 생물이 잘 자라는 부영양호로서 논농사에도 적합해, 이를 관개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군대를 앞세운 우리의 진주에 이미 터전을 잡고 있던 자들이 크게 저항은 못했지만, 더러는 자신의 생명과 같은 옥토를 빼앗길세라 거칠게 저항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배척할 이유가 없어 그들을 잘 달랬다.

'기 당신들이 개간한 농토는 안 빼앗는다. 우리는 새로 농지를 조성할 것이다.'

거기에다 감자와 옥수수 호박 등의 작물의 씨앗도 나누어 주어 재배할 것을 권유하니 그들의 저항도 수그러들었다. 아니 우리에게 의지하려 들었다.

간혹 농사를 다 지어놓으면 여진 놈들이 마적이 되어 이들을 약탈하곤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을 받아들여 이주한 나의 발해 령민과 함께 새로운 편제를 짜도록 했다. 즉 행정 및 군사조직을 애초부터 다시 갖추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현대 군 체제를 적용해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편제를 짰다. 1개 분대를 분대장 포함하여 10명으로 하고, 소대는 화기소대 포함하여 4개 분대 즉 40명이 1개 소대를 이르게 하고, 이를 또 화기소대 포함하여 4개 소대가 1개 중대를 이루게 했다. 그러니까 1개 중대의 인원은 소대장을 제외한 실 인원이 160명이고 소대장 포함하여 중대장, 지원병 포함하여 170명 정도에서 일개 중대를 이루게 했다.

이 체제가 화기중대 포함하여 4개가 모이면 1개 대대를 구성하고 대략 1개 대대의 인원은 대대장과 지원병 포함하여 700명 선에서 1개 대대를 구성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는 화기대대 포함하여 또 4개 대대가 모이면 연대가 아닌 여단이라 하여 독립여단 체제로 운영하기로 했다.

여단 내에는 요즈음의 사단 급에 해당하는 지원부서가 총 망라되도록 했다. 예를 들면 수색 정찰, 위병, 수송, 병기, 병참, 공병, 의무, 인사, 군수, 정보, 작전, 정훈, 헌병 등 제 분야의 지원 부서를 두어 1개 여단이 독립적인 작전을 하도록 편제를 짰다. 그래서 총 인원이 3,500명을 넘지 않도록 했다. 즉 1개 여단 규모는 대략 3,500명 정도 된다는 소리였다.

이렇게 편제를 짜되 나는 한 가정에 군사 1인씩을 배정하여 1개 중대규모 즉 160 가족이 일개 부락을 이루어 집단 거주토록 했다. 그러니까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1개 중대 안에 소속된 군병의 가족이 전부 모여 살게 하여 일개 부락을 형성하게끔 했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1개 중대를 집단 부락으로 하나의 마을을 형성하여 1개 대대로 묶고, 1개 대대는 여단에 편제되는 전체 군사 및 행정조직을 단행했다. 이렇게 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군 자원이 없어 군을 내지 않은 가정도 분명 존재하게 된다.

나는 이들은 별도로 모여 살게 하되 그곳은 행정중심이 되는 봉작령의 영도(領都) 즉 도읍에 전부 모여 살게 하여 외곽에 포진한 군대의 보호를 받게 했다. 또 영도 내에는 자체 군대도 주둔시킬 예정이므로 이들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살도록 한 것이다.

이런 행정 군사상의 발상 하에 나는 기존 거주하던 조선 백성들에게도 군사를 한 명씩 내도록 하고, 없는 가정은 개간한 토지를 보상해주고, 장차 조성될 도읍에 모여 살도록 했다. 이렇게 홍개호 밑에서부터 경작 또는 개간 가능한 대지를 일개 부락 단위로 떼어주며, 점점 위로 북상했다.

이 홍개호 주변은 천연의 옥토였다. 농작물이 잘 자라는 흑토지대로 구성된 토양인데다 관개할 거대한 호수까지 있으니 개간과 관개 시설만 갖추면 전천후 옥토가 될 소지가 농후했다. 이런 평원이 거대 분지를 이루어 북쪽의 우수리 강까지 이어져 있으니, 대략 경상도만한 땅이 거대한 곡창지대가 될 개연성이 아주 높았다.

이곳이 또 하나 유리한 점은 기존의 조선 백성들 외에, 야인 여진은 훨씬 북쪽 우수리 강변에 위치해 있었고, 건주여진 더 정확히는 장백 여진 부락은 두만강 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이 부근은 여진족이 큰 부락을 이루고 있는 곳이 없다는 점 일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런 천혜의 환경과 인종적 환경 하에서 계속하여 북으로 올라가며 중대 단위의 부락을 갖추도록 했다. 이렇게 땅 배분이 끝나는 곳은 바로 살집부터 짓게 하여 주거의 안정을 꾀하도록 했다.

집이 지어지면 바로 올 봄의 농사를 위해 최대한 땅을 개간하여 기존의 조선족들에게 벼 씨앗을 받아 뿌리도록 하고, 우리는 그들에게 감자나 옥수수 등 신 작물을 주도록 했다. 이렇게 군조직과 행정조직을 갖추다보니 자연스럽게 기존 농사를 짓고 있던 조선 백성들도 파악이 되었는데, 근 7만의 인구가 새로 유입되어 새로운 군 자원을 선발하니, 7천 명의 장정이 선발되었다. 2개 여단을 이룰 수 있는 규모가 된 것이다.

나는 이들을 안정이 되는 대로 신병교육대를 꾸려 그곳에 입소시킬 예정이었다. 그러나 저러나 나는 이렇게 많은 조선 백성들이 살고 있었는데, 선발대는 이에 대해 제대로된 보고가 없었다는 점이 이상했다.

그래서 그들을 불러 추궁한 결과 이 흥개호 밑에도 그 십분의 일쯤 되는 호수가 있었는데, 그들은 이곳 위주로 답사를 하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곳에도 이런 추세라면 조선 백성이 모여 살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이에 대한 추궁을 하니, 개간을 해 농사를 지은 흔적은 무척 많았으나, 조사 당시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는 답변이었다.

이들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고 해서 나 혼자 추측 건데 장백 여진의 약탈이 심해, 야인 여진과의 중간지대인 이곳 즉 흥개호 부근으로 집단이주를 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확인 차 기존 이곳의 조선 백성들을 붙들고 물어보니 나의 추측이 맞았다.

이곳으로 집단으로 이주해 기존의 세력과 합치고 더욱 개간지를 넓히면서 자경단도 조직해 가끔 출현하는 여진족의 약탈에 대항하며 생존을 해왔다는 것이다. 때로 그들의 기동력에 일부가 피해를 보기는 했지만, 못살 정도는 아니어서 계속해서 이곳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4월이 되자 선발대로 차례로 이주한 신안위 백성들이 차츰 안정화 되자 나는 2진 5만을 또 불러들여 더 위 북쪽에 터전을 잡도록 했다. 그리고 또 한 달 보름 만에 나머지 3진 5만을 불러들였는데, 이때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흥개호 남쪽에서 시작해 동쪽을 돌아 계속 북으로 이어지던 흑토지대의 평원을 이들에게는 더 이상 제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궁여지책으로 최초의 선발 탐사대가 보았다는 호월호(胡月湖) 주변에 1만5천, 흥개호 서쪽 평원 내지는 습지대에 1만5천을 배정하고, 나머지 2만은 대부분이 조선공들이었으므로 블라디보스토크를 개척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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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

늘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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